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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핀 동산에서, 감나무 늘어선 산길에서
구 본 황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
올해가 되면서 당뇨 합병증으로 투병 중이신 장인의 건강 상태가 더욱 나빠지자, 아내는 부모님이 계신 시골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이었다.
마침 4월 5일(화)이 생신일이라, 객지에 사는 자손들이 4월 2일(토)에 시골에 내려와서 생신 모임을 갖고, 어른들을 위로해드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올해 대학 입시에 합격한 아들이, 모처럼 시골 나들이에 참석하겠다고 기꺼이 자원하여, 무척 대견하였다.
반포에 살던 시절에는 아들이 초등학생이었는데, 우리 부자는 한강 시민공원으로 달려가서 테니스 공으로 야구 놀이를 즐기고, 공원 잔디밭에서, 어린이용 축구공으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땀을 흘리고 놀았었다.
그러나 일원동으로 이사하고, 중학생이 되면서 아이는 무척 내성적으로 바뀌어 바깥나들이를 꺼리면서, 우리 부자만이 갖고 즐겼던 단란한 시간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함께하였던 여행의 기억도 가물가물 사라져가서 항상 아쉬웠었다.
이렇게 긴 시간, 가족의 사랑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친밀한 접촉 기회를 상실하다 보니,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였었는데,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모처럼 아들과 나들이를 하게 되니, 설렐 정도로 기뻤다.
아침에 아내는 처형과 함께 일찍 시골에 내려갔고, 아들도 같이 귀향하였으리라 여겼는데, <아빠는 언제 외가에 가느냐?>는 병모의 전화가 와서, 반가운 마음에, <같이 점심 식사하고 내려가자!>하고 제안하였으나, 아들의 대답이 시원하지 않아서 섭섭하였다.
그런데 학교 컴퓨터 앞에 앉아 거북이 목을 하고, 글 정리 작업을 시작한 것이 한량없이 시간을 잡아당겨서, 약속한 오후 2시까지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려면, 점심 식사할 시간도 부족하게 되고 말았다.
부랴부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달음박질을 하다가, 베이커리에 들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즐겨 먹었던 여러 종류의 빵을 산 다음, 인파가 북적이는 터미널에서, 비좁은 자리를 나누어 앉아 간식 같은 빵으로 함께 한 끼를 때우게 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사방으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 덕분에, 봄나들이 인파가 많았을 주말인데도, 불과 1시간 40분 만에 부여터미널에 도착하여, 아내에게 전화하니, 간발의 차이로 먼저 나연이와 고향을 찾은 손아래 처남이,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하고 승용차를 몰고 마중 나와서, 반가움 반 미안함 반을 느껴야 하였다.
수선화 핀 동산에는 산비둘기 소리가 아늑하고
시골 마당 위에 있는 야트막한 동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선화 꽃이었다.
아직 마른 풀잎과 앙상한 나뭇가지가 봄날의 그리운 추억을 끄집어 내오지 못하고 있는데, 초록색 이파리 위로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수선화 꽃이야말로, 봄 처녀가 수놓고 간 <등불>같이 사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처남과 동산을 이리저리 거닐며, 휴대폰을 꺼내 유치원 원생들 같은, 앙증맞은 꽃 무더기를 촬영하다 보니, 뒤 편 대나무 숲에서는 산비둘기들이 굵은 목소리로 열심히 <사랑가>를 합창하고 있어서, 시골에서나 맛볼 수 있는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대숲이 모진 추위를 떨쳐내고 봄볕을 따스하게 품어주니, 꿩들과 산비둘기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열심히 데이트를 한다고 처남은 너털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시골 이부자리 속에서, 신선궁의 꿈을 꾸고
아내와 처형은 열심히 장모님을 도와 음식을 만들고, 남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생신 상을 꾸민 다음, 좁은 부엌에 옹기종기 둘러 앉아 와인과 케이크로 생신 분위기를 띄우며 왁자지껄 정담을 나누니,
사람 사는 재미가 느껴져서 좋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내, 처남, 처형과 마을길을 산책하다 보니, 아내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저절로 화제로 떠오르는데, 뒷산 너머 조성된 백제문화단지의 영향으로, 시골 모습이 낯설 만큼 달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고속도로 같은 대로변에는, 수학여행 학생들도 수용할만한 커다란 식당이, 흥부네 박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왕방울 눈동자를 굴리며 잽싸게 몰려오는 차들을 부르고 있고, 문화단지 쪽 들판에는, 이주해온 뒷동네 주민들이 논밭을 메워 조성한 멋진 전원마을이, 새로운 신도시가 들어선 듯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더욱 얼떨떨한 장면은, 고개 넘어 백제문(건의문)으로 들어서면서 나타났다.
서울 도심의 초호화호텔 같은 롯데 리조트 건물이 문화단지를 마주보며 떡 버티고 서 있는데다가, 주위 야산에선 한밤중임에도 포클레인의 불빛을 번쩍이며, 골프장 조성 공사가 한창이지 않은가!
그러나 40년 동안 어르신들의 손때가 묻어온, 시골집으로 되돌아와서, 어르신 팀, 남자 팀, 여자 팀으로 나누어, 세 방에 각각, 장모님이 고슬고슬하게 정성껏 준비해놓으신 시골 이부자리를 깔고, 몸을 눕히니, 대나무 숲을 헤집는 맑은 바람 소리가 없더라도, 신선궁의 꿈을 꿀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시골은 시골다워야지, 뒷산 너머 특급 호텔방에서 어찌 이 아늑함을 느낄 수 있으랴!
어깨를 포개고, 향긋한 내음을 내뿜는 쑥국을 맛보다
4월 3일(일), 어제 밤늦게 합류한 처남댁과 지현이까지 좁은 부엌에 졸린 눈을 부비고 얼굴을 내미니, 무려 10명의 대식구가 운집한 셈인데, 어깨를 포개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니, 시골에서나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흥겨움이 넘쳐흘렀다.
새로이 합류한 가족들을 위해, 프랑스 메독 지방의 귀한 레드 와인의 뚜껑이 열려지고, 이 고장의 자랑인 규암 딸기와 기술자 떡집의 인절미가 가세하였으며, 장모님이 손수 채취하신 여린 쑥으로 조리한, 쑥국이 향긋한 내음을 내뿜으니, 생신 상으로서 더할 나위가 없었다.
식사 후 여성 동지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처남과 나는 정원으로 달려가 구슬땀을 흘리면서, 복숭아나무와 대추나무를 옮겨 심었다.
아직 크지 않은 나무들이지만, 이 나무들이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 고운 꽃도 피우고, 탐스러운 열매도 매달아, 이 고장을 찾아오는 기쁨을 더해주길 기원하였다.
도원결의하고 시베리안 허스키를 몰아 무량사로 진격!
귀한 땀을 닦으면서,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는데, 처남에게 지난 해 우리산악회의 여름 철 답사여행 중, 무량사를 그냥 지나친 아쉬움을 이야기하자, 기다렸다는 듯, 무량사를 가보자고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도원결의하듯 의기투합하여, 우리들은 다른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시베리안 허스키(처남의 승용차 별명)>를 몰아 대문로(규암 백제문화단지 길)를 신나게 달려 나갔다.
40번 국도를 달려, 보령시 경계에 있는 무량사를 찾아가는데, 내산면에 진입하니, 벌써 차령산맥의 억센 근육이 꿈틀꿈틀, 예사롭지 않은 산줄기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앞길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추억을 되살려주는 쌀바위를 만져보고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아담한 면사무소 건물이 반겨주었다.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지난 날, 저 건물에서 장인어른의 정년 퇴임식이 있었고,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은 두 딸이 아장아장 걸어가서 꽃다발을 안겨드리던 장면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르는 것이었다.
처남은 내산초교를 지나자마자 갑자기 시베리안 허스키를 산길로 내몰았다.
이곳에 세계최대(?)의 와불을 모신 미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눈웃음지으며 귀띔해주는 것이었다.
얼핏 신도의 시주 재물을 탐하는 신흥사찰이 아닐까 생각하였으나, 백제 무왕 때(602년) 관륵이 창건하였고, 무학대사가 득도하였던 유서깊은 사찰이어서, 절 주변 계향산에는 대사가 심은 적송의 자손들이 숲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절 입구엔 33층 흰색의 사리탑이 반겨주고 있었고, 경내에 들어서자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거대한 와불(2005년 4월 조성)이 손으로 머리를 떠받치고 비스듬히 누운 모습으로 인사하는 것이었다.
이 부처 발바닥을 만지고 빌면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는데, 등 뒤에 있는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작은 법당이 조성되어 있고, 수많은 작은 부처님들이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이 절에서 가장 정감이 가는 것은 쌀바위(충남지방문화재 371호)이었다.
어렸을 적 밤중에 동무들과 뛰놀 때, 돌멩이끼리 부딪히면 불꽃이 일어나던 차돌이, 무려 30m의 높이를 자랑하며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원적외선을 방출하여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이 바위에는, 욕심을 경계하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 노파가 손자 보기를 소망하여 쌀바위에 와서 치성을 드렸는데, 어느 날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주면서, 이 쌀알을 바위에 심으면,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할머니는 이로써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의 효험으로 손자도 보게 되었는데, 커가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여 많은 식량을 얻으려고, 부지깽이로 바위를 후벼 파니 핏물이 흘러나왔다.
하얀 차돌을 붉게 물들인 선혈 자국을 혀를 차며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오려는데, 절에 온 날이 하필 법회 날이라, 점심 공양에 참여하라는 정이 많은 시골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성화가 빗발쳐서, 처남과 함께 인정이 자르르 흐르는 꿀맛 같은 음식을 입속에 담을 수 있었다.
<충남의 봉정암>, 금지사를 찾아 가는 길
미암사를 벗어났으나, 젊은 시절 역마살이 있어 이 고장 방방곡곡을 누빈 처남은, 옛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충남 지역에서 가장 높은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 <충남의 봉정암(설악산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암자)>, 금지사를 향해 시베리안 허스키의 방향을 다시 바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도가도 산길 너머로 절의 자취가 보이지 않아서, 이구동성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평탄한 지형인 충남 지역에서, 십리 넘어 산등성이를 구불구불 감돌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신선이 사는 구름 속으로라도 들어가는 것일까?
금지사는 충남의 명산 월명산(해발 540m) 정상 부근에 위치해 있었는데, 명산이어서인지 등산로 표지판이 내방객을 반겨주고 있었다.
처남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중수하고 정비된 모습이라고 하는데, 절벽 같은 산꼭대기에 지은 절이라서 그런지, 작은 암자 같은 느낌이고, 초라한 법당 보다는, 날아갈 듯 날씬한 자태를 자랑하는 산신각이 돋보였다.
법당 뒤편에 금이 나오는 작은 연못이 있기 때문에 <금지>라는 절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소문을 들어서, 바삐바삐 돌아가서 살펴보니, 단출한 약수터 하나 만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내밀고 있지 아니한가!
바위 한 쪽에는 나반존자상으로 알려져 있는 돌사람이 턱을 고인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어서,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이었다.
아직도 역마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남은, 이곳에 작은 방을 마련하여 살고 싶다고 중얼거리다가, 날이 맑은 날은 여기에서 부여 백마강 일대도 환히 보인다고 설명해주어, 이곳이 과연 <충남의 알프스>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산을 오르는 아주머니께 절의 사정을 물어보니, 주지 스님이 위중한 병에 걸려서 요사 채에서 요양하고 계셔서, 공양음식을 가지고 올라오는 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 높은 산꼭대기까지 정성껏 남을 위한 음식을 이고 지고 오르니, 저렇듯 부처님 같이 얼굴에서 빛이 쏟아지는 것이 아닐까 느껴졌다.
아미산 아래 돌담을 거닐며 신선이 되는 꿈을 꾸다
소 몰고 다니던 고향의 산길 너머에 잣티고개가 있어서, 잣티고개를 생각하면 칡뿌리 캐러 다니던 추억이 떠오르곤 하였는데, 시베리안 허스키가 잣티고개를 연상시키는 지티고개를 넘어서자, 부여군 차령산맥의 최고봉 아미산(해발 639m의 峨嵋山, 부여 쪽에서는 성스러운 아미타불의 거주지란 뜻으로 阿彌山으로 표기) 산자락 아래, 처남이 가고 싶어 했던 반교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마을은 제주도 민속마을을 육지로 공수해온 듯, 마을길을 에워싼 담장이 주변 밭에서 주워온 자연석(호박돌)으로 단장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어 이채로왔는데, 마을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반교마을 옛담장>이 문화재청에 선정되어,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80호>로 2006년 12월에 이미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처남은 이곳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선생이 조성한 멋진 거처가 있다며,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앙증맞은 나무 사립문이 나타나고, 제주도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정낭이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유별난 집>이 자연스레 발길을 인도하여, 이 집이 그 거처인 것을 눈을 감고도 느낄 수 있었다.
집의 명칭은 <휴휴당(休休堂)>이라, 쉬기 위해 마련 한 집인 것을 한눈에 느낄 수 있으나, 너른 정원을 온갖 건축물과 석조물, 수목으로 꾸미고 관리하다보니 너무 힘에 겨워서, 사모님은
“젠장 쉬러 왔더니, 쉬는 것을 쉬는 집이 되어 버렸다.”
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가장 눈길을 이끄는 것은 개울가에 자리한 <탁오대(濯吾臺)>라는 정자인데, 통나무 다리로 이어지는 개울 저편 아미산 자락의 멋진 정경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꽃과 신록이 가득한 계절에 이 자리에 서면, 현판에 새겨진 <운외몽중(雲外夢中)> 즉, ‘구름 밖에 구름이고, 꿈속에 꿈이다.’라고 추사가 읊었던, 신선이 되는 꿈을 나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면사무소 앞거리를 지나며 시골의 옛 정취를 그리워하다
부여군 외산면사무소 앞거리를 지나면서, 처남은 20여 년 전엔 이곳이 시골 주민들의 집합 장소로 흥청거렸다며, 시골의 옛 정취가 살아있었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고향과 가까운 세도면사무소 앞거리(삼거리)에 젊은 시절 시골버스를 타고 내리면, 여기저기 마을 어르신들이 눈에 들어왔고, 음료수 한 병도 나누워 마시며, 그간의 회포를 함께 나누곤 하였었다.
무량사는 어떤 절인가요?
무량사는 외산면 반교마을과 외산면사무소 앞길에서 지척의 거리에 위치하여 있다.
외산면의 명산 만수산(해발 575m, 아미타불이 거주하는 산이라는 뜻) 기슭, 넓은 분지에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서 불교의 영기가 넘치는 아미산, 경순왕의 옥마 전설로 유명한 옥마산(해발 602m)이 감싸주고 있으니, 유홍준 선생이 ‘자연과 가람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감탄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장보고가 활약하던 신라 말기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 후,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조선 중기 인조 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절은 그 보다 조선 초기의 불우한 천재 매월당 김시습이 방랑을 멈추고, 10년 간 머물다 세상을 버린 절로 더욱 유명하다.
무량사 입구에는 독특한 일주문이 버티고 서서 길손을 맞아주고 있는데, 아름드리 되는 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생긴 그대로 기둥으로 삼고 있었다.
천왕문을 나서면 가운데에 막돌로 조성하여 오히려 걷기에 불편한 돌길이 나있어 웃음이 나오는데, 돌길 건너편엔 이 가람의 중심 건물로서 모두 보물로 지정된 석등, 석탑, 극락전이 일직선상으로 서서 반겨주고 있었다.
무량사 석등(보물 제233호)은 통일신라 말기~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날아갈 듯한 경쾌한 구조와 세밀한 연꽃무늬 장식이 돋보이고,
무량사 5층석탑(보물 제185호)은 고려 전기 작품으로, 통일신라의 특징을 보여주는 장중한 몸체와 백제의 미를 보여주는 날씬한 지붕돌이 잘 조화되어 있었다.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356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2층 건물 모양의 층단지붕이 독특한데, 현판의 글씨는 바로 김시습이 썼고, 수미단에 모셔진 아미타불 부처님과 석가불을 그린 탱화(보물 제1265호)는 오늘 날 전해지는 것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매월당의 자취를 찾아 청한당, 영정각을 오르내리다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 초기 인물로, 3살 때 글을 깨치고, 5살 되던 해에는 천재 소문이 널리 알려져서 세종의 명령으로 승정원에 들어가서 멋진 시를 짓게 되었는데, 비단 선물을 받자 꼬마가 들고 오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비단 자락을 땅에 풀어서 끌고 돌아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전국을 유람하였는데, 고향 남산초등학교 북쪽 기슭에 있는 <남산사>도 이 고장에 김시습이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유적일 것이다.
31살에는 경주 남산(금오산) 용장사터에 <매월당>이란 초가집을 짓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창작해 내었으니, 방황은 하였으나, 천재의 창조성은 죽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만년에는 부처님의 사랑이 넘치는 만수산으로 돌아와, 극락전 뒤편에 있는 청한당(물론 옛 건물은 아니지만)에서 이승의 업보를 모두 내려놓고 수도 정진하다가, 10년 째 되는 59살에 입적하였는데, 매월당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지 않고 관에 모셔놓았는데, 3년 후 열어보니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놀란 스님들이 성불한 것으로 종단에 보고하고,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한 후 사리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부도 밭에 가면 매월당의 사리탑이 가장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영정각에 가면 김시습 본인의 자화상을 볼 수 있는데(매월당의 초상화, 보물 제1479호), 티끌세상을 호령하던 자취를 보여주는 찌푸린 눈썹, 근심어린 표정과 넘쳐나는 창조력을 감추고 있는 눈매가 함께 반긴다.
젊은 날의 추억이 숨겨져 있는 감나무 산길
지난 날 처남은 이곳 무량사 개울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도솔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였다면서, 가시등걸을 헤치고 징검다리를 건너, 감나무가 줄을 지어 마중하는 산길로 인도하였다.
가을 철 이곳을 걸으면서,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감을 바라보며, 젊은 날의 처남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문득 궁금하여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남이 두 여스님과 머물렀다는 <도솔사>는 <무량사 도솔암>으로 명찰을 바꾸어 달고 맞이하여서 안타까웠다.
이 조그만 절이 <약육강식>이란 속세의 법칙에 말려서, 사실상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구나 처남이 공부했던 처소는 화재로 전소된 듯, 검은 색으로 그을린 채 앙상한 자취만 남아 있었고, 새 주인이 된 무량사가 제 몸집을 부풀리려는 듯, 낯선 새 건축물을 짓고 있어서 더 머물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처남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면서, 샘터로 안내하고 나서는 숨겨놓은 비화(秘話)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이곳은 너무나 은밀한 곳이고, 두 여스님과 청년 학생이 같이 생활하고 있어서 묵계(비밀 약속)를 정했는데, 제주도 마을처럼 통나무 정낭을 마련하여, 서로 목욕할 때는 이것을 설치하여 샘터 출입을 하지 않기로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 날 밤, 처남이 샘터에 갔는데 정낭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옷을 훌훌 벗고 미역 감으려 하였는데, 아뿔싸 젊은 여스님이 벗은 채로 먼저 와 있지 않은가!
( 2011년 6월 17일 씀 )
첫댓글 즐거운 여행 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꾸준히 마음 수련을 하여서, 즐거운 여행을 하고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역사와 우애, 그리고 일화까지 잘 어우러져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가지로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