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폰이 고장 나서 바꾸라하고 외근을 다녀왔더니 두 명이 전화기를 들고 낑낑댑니다.
뭐하는지 봤더니 본체와 수화기에 꼽는 코드를 거꾸로 끼우다보니 이게 들어갈 턱이
없지요. 그런데 두 명중 한 명은 명색 엔지니어인데, 마케팅팀의 사원이 그러고 있으니
얼떨결에 한다는 짓이 구멍 맞춘다고 칼로 깎고 있는 겁니다. 뭐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얘기가 오고 갔겠습니까? 전화기를 이따위로밖에 못 만든다는 둥,
아직 기술력이 멀었다는 둥, 아마도 이대로 가다가 나라가 망할 거라는 얘기도 나왔을
겁니다. 어이없고 우습고 황당한 일이지만, 살아오면서 저도 이런 바보스런 짓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그런 기억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조직에 몸을 담고 일하다보면 어느새 경력도 쌓이고 지위도 올라가게 됩니다. 신입 때는
윗사람 욕하고 뒷 담화 하는 재미로 견뎌내면서 내가 저 자리에 가면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겠지만, 기실 그 자리에 오른 사람 중에 썩 훌륭한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위가 높아갈수록 스스로의 틀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모든 걸 생각하고
판단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는데, 아래 사람이 그 범위를 벗어나면 불편해하는 경향이 생깁
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지위가 높아간다는 것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름대로의
아집과 편견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래에는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만 취사선택하게 되는 것이지요. 농경시대에는 이런 경험에서 오는 고집은 훌륭한
노하우로 여겨졌습니다. 농사도 그렇고, 장 담그는 것도 그렇고, 전통으로 해석되어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변화무쌍한 시대에는 시세에 안 맞는 경험을 기반 하면
즉시 ‘아집’과 ‘편견’으로 치부되어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아무튼 작든 커든 일정한 조직의 리더가 되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평가하고 상벌을 내릴
수 있는 인사의 권한을 무기로 사람을 다스리게 되며 그 과정에 자신만의 리더쉽을 만들게
됩니다. 만약 아래 사람들이 아부가 심하다거나 혹은 근무시간이외에도 자신의 시간을
희생한다거나, 회의 시간에 의견 내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누군가 리더와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를 말하고 다니면서 호가호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리더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며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하는 사람입니다. 직장에서 퇴직연령을 두고,
대통령을 비롯한 선출직 고관들의 임기를 제한하게 되는데, 이것은 재임 중에 생긴 편견과
아집을 짧은 시간으로 보정을 하는 것이지요.
리더는 자신을 보고 있는 다수를 끌고 가야 하는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다수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중재하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할 일은
않고 뒤에서 욕이나 해대는 사람도 있고, 능력은 없으면서 업무외적인 관계에 치중하는
사람도 있고, 일은 잘하고 참 좋은데 뻣뻣해서 기분 상하게 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일은
더럽게 못하면서 온갖 휴가와 수당 빼먹는데 도가 튼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
의 의견들을 수렴한다는 것은 곧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런 인내심과
적절한 소통의 유도와 냉정한 평가를 통한 정당한 인사 등이 리더가 반드시 가져야하는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게는 이런 리더의 덕목을 팽개치거나 외면하게 되고, 가질 수 있는 달콤한
과실만을 탐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리더의 노릇이 아주 재미 집니다. 책임은 아래 사람
한테 지우고, 참모는 아부에 능한 사람들로 구성하게 되면 대통령 노릇도 누워서 떡먹기가
아닐까요? 요즘 언론을 보면 내가 미친 건 지, 아니면 리더 노릇하는 것들이 맛탱이가
가버린 건 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국정원과 국가기록원, 국회의원들도 그렇고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다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독야청청 하는 분은?
‘고뇌의 질곡’은 리더의 숙명입니다. ‘나’를 버려야하고 ‘나’를 따르는 무리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해야하기 때문에 그 자리가 어려운 것이고 잘해야 본전이니,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겠지요. 조그만 회사 부장노릇도 힘든데, 최고의 자리가 그렇게 쉬웠어야
되겠습니까? 아무튼 비빔밥님이 올려주신 일본의 상황을 보고 문득 느껴지는 것이 왠지
국경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싸움으로
번지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은 분명히 생존의 문제
이며 그것도 부모 자식의 목숨을 담보한 생존인데, 저렇게 철저히 무대책으로 나가는 것을
보면 의아스럽다 못해 인구조절 정책을 통해 절반의 국민을 버리는 패로 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내부로 눈을 돌려봐도, 단 한 가지도 억지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우민화’가
민주주의 하에서 핵심 지배논리 라 하더라도, 멀쩡한 저 같은 사람이 밥이라도 느긋이
먹을 수 있도록 해야지 뉴스를 보면 튀어나오는 욕찌기 땜에 도무지 목구멍에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군요. (근데 살은 왜 자꾸 찌지?)
‘경제민주화’ 나 ‘창조경제’의 의미를 채 파악하기 전에 ‘성장’정책을 쓴다는 얘기가 나왔
습니다. 대기업 순환출자도 풀어주고 수도권 투자도 기업 마음대로 하게하고, 부동산
취득세도 영구감면하고...좋네요. 하긴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고통을 덜 느끼라고 몰핀
주사를 놔주는 것도 훌륭한 휴머니즘이고 리더쉽이 될 수도 있겠지요? 결국은 자본가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같이 폭주하려고 했던 건 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리더의 자리에 있는 자가 행복하게 보이는 것은 다수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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