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제주를 거닐게 됐는데 하멜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다는 팻말을 본다. 대항해시대의 물결이 조선의 바닷가까지 밀려 왔던 거지. 물론 그 이전에 왔던 벨테브레도 있지만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자신의 사연을 남기지도 못했어. 하지만 그나마 하멜은 돌아가서 조선이란 나라를 알렸으니 더 유명해진 거겠지. 그렇게 서양 사람들과 조우를 하고도 조선 조정은 답답할이만큼 무심했다. 서양인들로부터 뭘 배울 생각은 커녕 좀 신기한 동물 취급하다가 밥이나 먹이고 잔일이나 시키는 관노 정도로 전락시켰으니까. 하지만 일본인들은 탈출한 하멜 일행으로부터 단 며칠만에 하멜 일행의 조선에서의 삶의 얼개를 재구성하고 필요한 정보를 빼냈어.
이 하멜이 떠난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던 서양인들은 1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다시 출몰한다. ‘이양선’이라는 이름의 배들이 조선의 동서남해에 툭하면 출몰하면서 깊이를 재고 물길을 가늠하고 심지어는 상륙해서 이것저것을 요청하거나 통상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무력을 사용하여 충돌하기도 했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본격적인 무력 침공 전에도 자잘한 부딪침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서해안에 나타난 건 1866년 8월 17일이었어. 선적은 미국이고 선주는 프레스톤이라는 미국인이었지만 선장은 덴마크 사람이었고 선원들은 영국인부터 중국인, 말레이인까지 그야말로 다양했지. 이 제너럴 셔먼 호를 조선으로 몰고 온 프레스톤의 내심이야 알 수가 없고 제너럴 셔먼 호에 대한 의견도 해적선부터 ‘미제국주의의 첨병’까지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그 배는 교역을 표방하긴 했고 동시에 무장도 하고 있었어.
처음 조선의 관원들이 제너럴 셔먼 호에 올라 왜 왔는지를 물었을 때 관원들은 기절할 듯 놀라게 된다. 웬 눈 파랗고 코도 높은 서양인 하나가 우리 말을 해 오는 거야. “여키서 피엉이앙이 멉니카? 우리넌 통상하러 왔?미다.” 이미 프랑스 신부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도 반세기가 지난 터고 새남터에서 피 뿌리고 죽은 신부도 많긴 했으나 시골 관원들로서는 거의 원숭이가 사람 말을 하는 느낌이었을 거라.
바로 그 서양 사람은 토머스 목사라는 사람이었어. 우리나라 개신교인들이 최초의 순교자로 떠받드는 사람이지. 이 사람의 신앙의 굳건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미전도종족”에 대한 선교 의욕을 불태우며 가톨릭 99퍼센트의 나라에 ‘선교’하러 가는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에 필적하는 선교욕에 불타 오르고 있었어. “내가 저 은자의 왕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리라!” 이미 조선에 주님의 복음이 들어온지 100년을 헤아린다는 것도 알긴 했겠지만 .... 모르지 이 사람도 요즘의 골때리는 개신교 목사처럼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봤는지도.
이 사람의 선교 열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원래 그가 탈 배는 프랑스 신부의 죽음에 분개하여 이를 응징하고자 출동 준비를 하던 프랑스 동양 함대의 전함이었어. 그러니까 침략자의 배에 올라타고 선교를 하러 오려 했던 건데 프랑스 함대가 출동을 연기하면서 제너럴 셔먼 호에 옮겨 타게 된 거였지. 토머스의 행동에 대한 걱정은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이야. 토머스가 소속됐던 런던 선교회 총무는 이런 편지를 토머스에게 보냈으니까. “무장한 선박을 타고 조선에 나간다니 이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요, 더욱이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조선 말을 하는 이 서양 젊은이는 조선 관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관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 젊은이는 매우 교만했다고 해. 칼을 차고 관원들을 상대하는가 하면 관원들의 만류도 들은체 만체 했다고 하니까. 이런 말은 했다고 하네. “우리는 천주교와 달라 인의충효를 중히 여깁니다.” 아무데나 가서 땅밟기 하고 앙코르와트에서 불상 부수는 결기와 가톨릭에 대한 콤플렉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성 싶네.
마침내 8월 21일(양력) 대동강을 거슬러 오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 이른다. 구르듯 달려온 역졸의 보고에 평양 감영은 술렁이지. “이양선이 계속 강을 거슬러 오릅네다.” 이때 평양 감사는 박규슈. 유명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일단 박규슈는 기존의 조선 정부의 원칙대로 사람을 보내 통상을 거부함을 알리고 돌아가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돼지고기나 닭고기도 안기면서 손님(?)에 대한 예우도 소홀히 하지 않아. 그러나 제너럴 셔먼은 묵묵부답이었고 8월 27일에는 만경대까지 진출한다.
박규수는 다시 관원들을 파견해서 돌아갈 것을 설득하지만 제너럴 셔먼 호는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는 악수를 두고 만다. 이현익의 억류는 그때까지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지켜보던 평양 사람들을 흥분시켰어. “양코배기들 와 우리 관원을 잡아 가두는 거이가.” “우리 둥군 이현익을 내보내라우.”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변으로 모여들었고 중군 이현익을 돌려보내라고 아우성을 쳤지. 동양인들은 총 소리만 들리며 도망간다고 생각해서일까 제너럴 셔먼 호 선원들은 총을 쏴 댔고 조선인들은 이에 더 흥분한다. “저 아새끼들 때려 ?이라.”
박규수도 격노했지만 중군이 제너럴 셔먼 호에 있는 이상 공격도 맘대로 할 수 없었지. 이때 퇴역 군인 한명이 자원하여 제너럴 셔먼 호에 올라 담판을 짓고 중군을 구해 오게 돼. 모르긴 해도 화약 한 짐 지고 올라가 같이 죽자고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인질이 사라진 제너럴 셔먼 호에는 더 큰 충격이 덮치지. 양각도 부근 모래톱에 제너럴 셔먼 호가 걸려 버린 거야. 즉 배가 멈춰 서 버린 거야. 아마 선주 이하 페이지 선장도 토머스 목사도 이때는 얼굴이 백짓장이 되지 않았을까. 동시에 조선인들의 눈동자는 허연 살기로 빛났다. “인차 죽었다고 복창하라우.”
이때 자포자기인 건지 악에 받친 건지 제너럴 셔먼 호에서 대포를 있는 대로 쏘았고 일곱 명이나 되는 조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명은 동시에 제너럴 셔먼 호 선원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도 같았어. 박규수는 기름 듬뿍 묻은 목선들에 불을 질러 상류에서 하류로 떠내려 보냈고 모래톱에 얹혀진 채 행동의 자유를 잃고 있던 제너럴 셔먼호는 그 불의 배들을 고스란히 맞이하게 돼. 제너럴 셔먼 호의 화약에 불이 붙었고 곧 폭발한다. 몇 명은 배에서 탈출했지만 조선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지. 박규수는 이들을 살려 줘 후일을 대비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피를 본 조선 인민들은 그럴 깜냥이 없었어. 생존자들은 글자 그대로 맞아 죽는다.
이때 엇갈리는 게 토머스 목사의 최후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를 부르짖으며 성경을 나눠 주다가 죽었다고 주장하며 최초의 순교자로 모시고 평양에 토머스 교회까지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측의 기록으로 보면 그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이현익에게서 빼앗은 인신(印信) 즉 신분증을 내걸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다고 해. “살려만 추십시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타임머신이 발명되기 전까진 알 길이 없겠지만 말이야.
이 사건은 여러 교훈을 내포하고 있어. 우선 선교는 토머스같은 방식으로 하면 안된다. 미전도 종족에 대한 불타는 선교 의지로 무장한 상선에 올라타나는 행동보다는 “개종을 강요하지 말라.”는 교황의 설교가 더 성스럽다. 연결되는 문제겠지만 교만의 문제다. 프레스톤 선주나 토머스는 교만했을 거야. 저 미개한 조선인들이 하면 뭘 얼마나 하고 말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만류를 듣고도 발바닥의 때로밖에 여기지 않았겠지. 동시에 그들의 죽음은 조선을 교만하게 한다. 기껏 상선 하나 불질렀고 그 상선은 아무리 많이 봐도 군함은 아니었는데 조선은 자신들의 군사력이 대단하다고 여긴 거지. 5년 뒤 신미양요에서 그 교만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뜻하지 않게 제주를 거닐게 됐는데 하멜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다는 팻말을 본다. 대항해시대의 물결이 조선의 바닷가까지 밀려 왔던 거지. 물론 그 이전에 왔던 벨테브레도 있지만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자신의 사연을 남기지도 못했어. 하지만 그나마 하멜은 돌아가서 조선이란 나라를 알렸으니 더 유명해진 거겠지. 그렇게 서양 사람들과 조우를 하고도 조선 조정은 답답할이만큼 무심했다. 서양인들로부터 뭘 배울 생각은 커녕 좀 신기한 동물 취급하다가 밥이나 먹이고 잔일이나 시키는 관노 정도로 전락시켰으니까. 하지만 일본인들은 탈출한 하멜 일행으로부터 단 며칠만에 하멜 일행의 조선에서의 삶의 얼개를 재구성하고 필요한 정보를 빼냈어.
이 하멜이 떠난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던 서양인들은 1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다시 출몰한다. ‘이양선’이라는 이름의 배들이 조선의 동서남해에 툭하면 출몰하면서 깊이를 재고 물길을 가늠하고 심지어는 상륙해서 이것저것을 요청하거나 통상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무력을 사용하여 충돌하기도 했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본격적인 무력 침공 전에도 자잘한 부딪침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서해안에 나타난 건 1866년 8월 17일이었어. 선적은 미국이고 선주는 프레스톤이라는 미국인이었지만 선장은 덴마크 사람이었고 선원들은 영국인부터 중국인, 말레이인까지 그야말로 다양했지. 이 제너럴 셔먼 호를 조선으로 몰고 온 프레스톤의 내심이야 알 수가 없고 제너럴 셔먼 호에 대한 의견도 해적선부터 ‘미제국주의의 첨병’까지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그 배는 교역을 표방하긴 했고 동시에 무장도 하고 있었어.
처음 조선의 관원들이 제너럴 셔먼 호에 올라 왜 왔는지를 물었을 때 관원들은 기절할 듯 놀라게 된다. 웬 눈 파랗고 코도 높은 서양인 하나가 우리 말을 해 오는 거야. “여키서 피엉이앙이 멉니카? 우리넌 통상하러 왔?미다.” 이미 프랑스 신부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도 반세기가 지난 터고 새남터에서 피 뿌리고 죽은 신부도 많긴 했으나 시골 관원들로서는 거의 원숭이가 사람 말을 하는 느낌이었을 거라.
바로 그 서양 사람은 토머스 목사라는 사람이었어. 우리나라 개신교인들이 최초의 순교자로 떠받드는 사람이지. 이 사람의 신앙의 굳건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미전도종족”에 대한 선교 의욕을 불태우며 가톨릭 99퍼센트의 나라에 ‘선교’하러 가는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에 필적하는 선교욕에 불타 오르고 있었어. “내가 저 은자의 왕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리라!” 이미 조선에 주님의 복음이 들어온지 100년을 헤아린다는 것도 알긴 했겠지만 .... 모르지 이 사람도 요즘의 골때리는 개신교 목사처럼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봤는지도.
이 사람의 선교 열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원래 그가 탈 배는 프랑스 신부의 죽음에 분개하여 이를 응징하고자 출동 준비를 하던 프랑스 동양 함대의 전함이었어. 그러니까 침략자의 배에 올라타고 선교를 하러 오려 했던 건데 프랑스 함대가 출동을 연기하면서 제너럴 셔먼 호에 옮겨 타게 된 거였지. 토머스의 행동에 대한 걱정은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이야. 토머스가 소속됐던 런던 선교회 총무는 이런 편지를 토머스에게 보냈으니까. “무장한 선박을 타고 조선에 나간다니 이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요, 더욱이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조선 말을 하는 이 서양 젊은이는 조선 관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관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 젊은이는 매우 교만했다고 해. 칼을 차고 관원들을 상대하는가 하면 관원들의 만류도 들은체 만체 했다고 하니까. 이런 말은 했다고 하네. “우리는 천주교와 달라 인의충효를 중히 여깁니다.” 아무데나 가서 땅밟기 하고 앙코르와트에서 불상 부수는 결기와 가톨릭에 대한 콤플렉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성 싶네.
마침내 8월 21일(양력) 대동강을 거슬러 오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 이른다. 구르듯 달려온 역졸의 보고에 평양 감영은 술렁이지. “이양선이 계속 강을 거슬러 오릅네다.” 이때 평양 감사는 박규슈. 유명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일단 박규슈는 기존의 조선 정부의 원칙대로 사람을 보내 통상을 거부함을 알리고 돌아가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돼지고기나 닭고기도 안기면서 손님(?)에 대한 예우도 소홀히 하지 않아. 그러나 제너럴 셔먼은 묵묵부답이었고 8월 27일에는 만경대까지 진출한다.
박규수는 다시 관원들을 파견해서 돌아갈 것을 설득하지만 제너럴 셔먼 호는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는 악수를 두고 만다. 이현익의 억류는 그때까지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지켜보던 평양 사람들을 흥분시켰어. “양코배기들 와 우리 관원을 잡아 가두는 거이가.” “우리 둥군 이현익을 내보내라우.”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변으로 모여들었고 중군 이현익을 돌려보내라고 아우성을 쳤지. 동양인들은 총 소리만 들리며 도망간다고 생각해서일까 제너럴 셔먼 호 선원들은 총을 쏴 댔고 조선인들은 이에 더 흥분한다. “저 아새끼들 때려 ?이라.”
박규수도 격노했지만 중군이 제너럴 셔먼 호에 있는 이상 공격도 맘대로 할 수 없었지. 이때 퇴역 군인 한명이 자원하여 제너럴 셔먼 호에 올라 담판을 짓고 중군을 구해 오게 돼. 모르긴 해도 화약 한 짐 지고 올라가 같이 죽자고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인질이 사라진 제너럴 셔먼 호에는 더 큰 충격이 덮치지. 양각도 부근 모래톱에 제너럴 셔먼 호가 걸려 버린 거야. 즉 배가 멈춰 서 버린 거야. 아마 선주 이하 페이지 선장도 토머스 목사도 이때는 얼굴이 백짓장이 되지 않았을까. 동시에 조선인들의 눈동자는 허연 살기로 빛났다. “인차 죽었다고 복창하라우.”
이때 자포자기인 건지 악에 받친 건지 제너럴 셔먼 호에서 대포를 있는 대로 쏘았고 일곱 명이나 되는 조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명은 동시에 제너럴 셔먼 호 선원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도 같았어. 박규수는 기름 듬뿍 묻은 목선들에 불을 질러 상류에서 하류로 떠내려 보냈고 모래톱에 얹혀진 채 행동의 자유를 잃고 있던 제너럴 셔먼호는 그 불의 배들을 고스란히 맞이하게 돼. 제너럴 셔먼 호의 화약에 불이 붙었고 곧 폭발한다. 몇 명은 배에서 탈출했지만 조선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지. 박규수는 이들을 살려 줘 후일을 대비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피를 본 조선 인민들은 그럴 깜냥이 없었어. 생존자들은 글자 그대로 맞아 죽는다.
이때 엇갈리는 게 토머스 목사의 최후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를 부르짖으며 성경을 나눠 주다가 죽었다고 주장하며 최초의 순교자로 모시고 평양에 토머스 교회까지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측의 기록으로 보면 그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이현익에게서 빼앗은 인신(印信) 즉 신분증을 내걸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다고 해. “살려만 추십시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타임머신이 발명되기 전까진 알 길이 없겠지만 말이야.
이 사건은 여러 교훈을 내포하고 있어. 우선 선교는 토머스같은 방식으로 하면 안된다. 미전도 종족에 대한 불타는 선교 의지로 무장한 상선에 올라타나는 행동보다는 “개종을 강요하지 말라.”는 교황의 설교가 더 성스럽다. 연결되는 문제겠지만 교만의 문제다. 프레스톤 선주나 토머스는 교만했을 거야. 저 미개한 조선인들이 하면 뭘 얼마나 하고 말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만류를 듣고도 발바닥의 때로밖에 여기지 않았겠지. 동시에 그들의 죽음은 조선을 교만하게 한다. 기껏 상선 하나 불질렀고 그 상선은 아무리 많이 봐도 군함은 아니었는데 조선은 자신들의 군사력이 대단하다고 여긴 거지. 5년 뒤 신미양요에서 그 교만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