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세월을 걸레로 살았어. 중광이 보다 더 걸레였으니까.” ‘걸레’라는 낱말은 스님의 외모에서 쉽게 건져 올려진다. 삭발을 하지 않은 비구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알카에다의 모자 같은 것을 썼는데, 마치 얼굴에 검은 터번을 한 것처럼 보였다.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승복 바지를 입었고 버선도 회색이긴 하지만 군데군데 숭숭 기운데다, 기운 것마저 닳아빠져 발가락이 보일 듯 말듯 아슬아슬했다. 윗옷은 몸집에 비해 두 배 정도나 되는 검은색 파카였는데 앞에 뚫린 주머니가 유달리 커 보였다. 누군가가 때마침 돈 봉투를 건네주자 마다하더니 받고는, 나를 포함해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만 원짜리를 한 장씩 빼주고 나머지는 그 큰 앞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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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스님의 뒷모습과 하담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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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걸레로 살면서 지리산을 청소한다”며, “청소하느라 편안한 날이 없다”고 말했다. 스님이 무슨 청소를 하는지 궁금했다.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는 것인가? 설마하니 형이하학적인 청소는 아닌 것 같아, “왜 지리산을 청소합니까?”라고 물었다. “지리산에는 원한이 많아. 육이오 전쟁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 원한들을 영적으로 정화하느라 쎄가 빠지는 거야.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눈물이 절로 줄줄 흘러내려.”
스님이 출현한 곳은 문수골이었다. 반달곰이 자주 출현한다는 골짜기다. 이 골짜기의 앞과 뒤가 노고단이고 왕시루봉이라 골이 깊고 물이 맑다. 골 끝자락에 여수사람이 지어 놓은 통나무 산장이 있다. 내가 평소에 자주 왕래하는 곳이다. 그 여수사람으로부터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마침 스님이 그곳을 방문했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 갔던 것이다.
스님은 자주 몸을 숨기기 때문에 좀체 만나기가 힘들다. 이름도 지금은 보리스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스님은 늘 몸을 숨기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이 고귀하기 때문에 사람이 다칠 때는 내 몸에 희생이 오더라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는 “중생이 다 내 몸이기 때문”이란다.
신학대 졸업 후 수녀로 전세계 순례여행
스님의 눈빛에는 신기(神氣)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는데, 스스로 견성(見性)했다고 말했다. 밀양 얼음골에서 견성을 했고, 견성 후에는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에서 짚단 두 개를 깔고 수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스님은 견성을 했지만 아직 해탈은 하지 않았다고 말해 견성과 해탈을 구분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스님은 미인이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긴 하지만 피부색이 하얗다. 이가 하얗고 입술이 발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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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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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에게 “견성한 바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으면서 “제일 좋은 것은 바로 이 자리에 있고, 병이 있다면 제일 좋은 약은 그대 안에 있다”고 말을 꺼내고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냥 그렇게 살어. 정직하게 살다가 보면 그대가 원하는 선물을 받게 돼. 이렇게 우리가 다 만나잖아? 언제 이런 만남이 다시 이루어지겠어? 또 님이 무엇을 더 알고 싶어 하나?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다 거짓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것에 속고 다니지 말어. 진실은 언어가 없어. 그대로 스며들 뿐이야.”
스님을 두 번째로 본 것은 하동 화개농협 앞의 주차장에서였다. 뜻밖에도 스님은 미국산 지프차에 앉아 있었다. “왜 좋은 차를 타고 다니십니까?”하고 묻자 “어떤 님이 사 준 것인데, 토굴로 쓰고 있다”면서, “이 차를 끌고 다니다가 잠이 오면 어느 곳에서나 차를 세우고 차 속에서 잠을 잔다”고 말했다. 건네 준 손이 따뜻했지만 몹시 거칠었다.
내가 손을 한참 내려다 보자,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 때느라 손이 거칠어졌다고 말했다. 스님의 실제 토굴은 피아골이다. 피아골에서 혼자 기거할만한 크기의 방에 장작불을 지피고 산다.
스님과 헤어진 후 세 번째로 만난 것은 거제도에서다. 거제도의 무이사(無二寺)에 스님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다. 무이사는 거제 둔덕면 폐왕성지 안에 있는 태고종 사찰로 한창 터를 닦고 있는 중이었다. 주지는 하담(何譚)이라는 스님인데, 속세 때의 직업이 목수라 바깥에서 목수 일을 해가면서 불사를 하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원래 하동 화개동 삼신에 있는 어안동에서 토굴생활을 하다가 이곳으로 왔다. 하담스님에 의하면 어안동에 있는 자기를 보리스님이 관법으로 튕겨서 거제도까지 튀어 오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절 이름과 스님의 법명은 보리스님이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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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를 쓴 보리스님. 카메라를 들이대자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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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님은 가톨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처음에는 수녀생활을 했다. 성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이었다. 수녀였을 때 이집트, 이스라엘, 필리핀 그리고 로마를 순례했다. 이집트 사막에서는 신부님과 함께 미사도 했다. 로마에는 교황 바오로 2세의 초청으로 갔는데, 색동 한복차림으로 교황을 친견한 적이 있었다. 스님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결과 그 시기가 20년여 전인 것 같다. 수녀의 신분으로 순례여행을 한 이유는 서양사상을 먼저 체험하고 동양 쪽으로 오기 위해서였단다. 스님의 말로는 “발바닥에 흐르는 피가 신을 흥건하게 적실 때까지 지구를 돌아다녔다”고 술회했다. 인도와 티베트에서도 오랫동안 머물렀다. “지구 몇 바퀴를 돌았던 거야. 그냥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니까.”
“지리산 청소로 매일 바빠” 걸레스님 자평
그녀에게 불교를 가르쳐 준 이는 대여섯 분의 스님이다. 비구니 스님이 둘, 비구스님이 서넛이다. “나는 일반 스님들처럼 대중생활을 해 본 적이 없어. 대중적인 조직생활은 수도회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뿐이었어.” 종교가 가톨릭인지 불교인지 물었다. “종교가 무엇이 중요하나? 난 옷만 승복을 입었을 뿐이야. 이 옷만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녔지. 그러니까 가톨릭에서는 나를 개종한 줄로 알고 있더라.”
“그렇다면 스님이 믿고 의지하는 종지는 무엇입니까?” “나의 종지가 깨달음이야. 석가모니도 깨달은 사람이고 예수님도 깨달은 사람이야. 깨달아서 섬기는 것은 하늘과 땅이고 사람이야.” 스님이 승복은 입었으면서도 머리를 길게 한 이유는 “수도원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기 위해서”라고 했다.
“머리를 깎으면 스님인데 스님을 수도원에서 받아 주나? 내가 그들에게도 가야 하는데.” 스님과 이야기 도중에 가톨릭 교구에서 파문당해 하동 적량에 은둔하고 있는 황선목 신부의 이미지가 떠올라 혹시 그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스님은 황신부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단순히 만난 적이 있는 것만 아니라 사상적인 교류가 서로 많이 오고 갔다.
스님이 지리산 칠성계곡의 금대에서 수행 중이었을 때인데, 예수성심 수도회 수도원장의 부탁으로 황신부를 처음 만났단다. 스님이 금대에서 출발해 가고, 황신부는 악양 매계에서 차를 타고 와서 산청의 성심원에서 만났다. 그날 황신부와 스님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었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황신부는 성경 전체를 외울 정도로 성경의 구절들을 술술 풀어내며 자기의 주장을 펼쳤는데, 그 주장들은 온통 가톨릭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맞습니다. 신부님의 말이 옳습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더니, 황신부가 눈을 번쩍 뜨며 “수녀님의 종교가 가톨릭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스님이 “맞다”고 대답하자, “가톨릭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반색하며 그때부터 ‘미친 듯이 스님에게 달려들었다’고 술회했다.
그 당시 강원도의 가르멜 수도원에서 10명의 수녀들이 옷을 벗고 나왔는데, 황신부네 집에서 마지막 미사를 보았다고 한다. 황신부는 그 후 사흘 후에 사제복을 벗었다.
그 날 이후 보리스님과 황신부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단다. 두 사람은 지리산 기슭에서 살면서도 지금까지 전혀 왕래가 없었다. 밤 열두시가 넘어서야 스님과 헤어졌다. 헤어져서 차를 타고 오면서 스님의 말을 되뇌었다. “깨달음은 있지만 종교는 없어. 우리 모두가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을 뿐이야.”
/창원대 강사·언어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