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게다스 - 영혼 속에 담긴 원주민 세계
앙헬 플로레스 / 현중문 옮김1)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José María Arguedas, 1911~1969)의 단편 소설 「물」(Agua)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작가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려고 페루의 수도 리마로 편지를 보냈다. 1955년 11월 23일, 3장에 걸쳐 자신을 상세하게 소개한 답신이 도착하였으므로, 전부를 여기에 싣는다.
저는 1911년 1월 18일 페루 아푸리막 주의 지방 도시 안다우아일라스(Andahuaylas)에서 태어났습니다. 안다우아일라스는 고대 찬카(chanka) 족의 중심 도시입니다만, 잉카 제국의 황제 야우아르우아칵(Yahuarhuaccacc)의 침입으로 몰락하였습니다. 1940년 현재, 총인구 90.195명 가운데 케추아어를 모르는 사람은 265명뿐이며, 80,611명은 오로지 케추어어만을 사용합니다.
아버지 빅토르 마누엘 아르게다스는 변호사였습니다. 어머니 이름은 빅토리아 알타미라노입니다. 아버지는 쿠스코 출신이며, 어머니는 안다우아일라스 출신입니다. 제가 세 살 나던 해 어머니는 라 마르(La Mar) 지방의 산 미겔에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아버지는 그곳 판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안다와일라스로 돌아왔으며, 아버지는 검사로 일했습니다.
1917년, 아버지는 아야쿠초(Ayacucho) 주의 루카나스(Lucanas) 지방으로 전근되었고, 저는 1918년 루카나스 지방의 푸키오(Puquio)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산 후안(San Juan de Lucanas)의 유지이자 미망인인 그리마네사 아랑고이티아와 재혼하였습니다. 계모에게는 딸 둘과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푸키오에서 산 후안까지는 3 레구아(legua. 1레구아는 약 5.5km) 길이었습니다. 저는 계모와 함께 산 후안에서 살았고, 아버지는 토요일마다 말을 타고 오셨습니다.
1920년, 아버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해직당했으며, 변호사 자격마저도 박탈당했습니다. 아버지는 1923년까지 루카나스 지방의 오지 마을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에 계모와 저는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의붓형의 희생물이었습니다. 의붓형은 산 후안의 주인과 다름없는 유지였는데,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친척 소유의 농장에 피신해 있었으며, 나중에는 우테코(Uteco) 마을에 숨어 지냈습니다. 우테코 농장(hacienda) 이름은 비세카(Viceca)였습니다. 오지에 있는 이 농장의 소유주는 여러 명이었는데, 그들은 물이나 경계가 불분명한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잔인하게 싸웠습니다. 이 기간에 원주민들이 저를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1923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 의붓형 아리스티데스(Arístides)는 리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국가에 공헌한 대가로 받은 작은 리마의 작은 집에 기거하고 있었지요. 우리는 아야쿠초로 갔습니다. 말을 타고 12일이 걸렸습니다. 코라코라까지 말로 3일, 로마스 항구를 통해서 쿠스코까지 가는데 말로 6일, 쿠스코에서 푸키오로 돌아오는 데 말로 12일, 칸가요까지 말로 10일이 걸렸습니다. 다시 우아이타라(Huaytara)까지 가는 데는 말을 타고 5일, 버스를 타고 하루가 걸렸습니다. 우안카요(Huancayo)까지 말로 6일, 그곳에서 팜파스까지는 버스를 타고, 여기에서 야우요스(Yauyos)까지 가는 데는 말로 4일이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야우요스에서 카네테로, 다시 푸키오로 갔고, 그곳에서 1931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924년에서 1925년까지 저는 아푸리막 주의 주도인 아반카이(Abancay)에 머물렀고, 아버지는 찰우안코(Chalhuanco)에 계셨습니다.
저는 루카나스 지방의 산 후안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고, 푸키오에서 2학년까지, 아반카이에서 5학년까지 다녔습니다. 중등학교 1․2학년은 이카에서, 3학년은 우안카요에서, 그리고 4․5학년은 독학했습니다. 1931년에 리마의 산 마르코스(San Marcos) 대학에 입학했는데, 산체스 세로(Sánchez Cerro) 정권은 1932년에 이 대학교를 폐쇄하였습니다. 1932년, 저는 리마의 우체국에 취직해서 1937년 대학에 복학할 때까지 일하였습니다. 산 마르코스 대학교는 1935년에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1937년 저는 인문대학 문학부 마지막 학년을 다녔습니다. 그 후 1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938년 6월에 석방되었습니다.
1939년 2월에는 쿠스코 주 시쿠아니(Sicuani) 지방에 있는 ‘마테오 푸마카우아’ 국립학교의 스페인어, 지리 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39년 6월 시쿠아니에서 셀리아 부스타만테 베르날(Celia Bustamante Vernal)과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내가 병원, 다시 말해서 죄수 병동에서 폐결핵을 앓고 있었을 때 생명을 구해준 사람입니다. 애인의 간호 덕택에 살아난 것입니다. 죄수 가운데는 수리타(Zurita)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절도죄로 8년형을 언도 받은 사람인데 제 침대까지 피어가 튈 정도로 각혈이 심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간호해주었습니다. 비범한 인물이이서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1940년, 저는 아내와 함께 멕시코로 여행했습니다. 1942년, 중등교육 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리마로 돌아왔습니다. 1943년 과로로 인하여 심하게 앓았는데, 그 이후로는 건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리마에 머물면서 스페인어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1946년 민족학을 공부하려고 대학에 입학하여 1948년에 졸업했습니다. 1946년에는 교육부 민속국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민속 음악과 민간 전승 문학을 채록하고 편찬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1950년에는 아내와 함께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를 여행했고, 1951년에는 칠레 여행을 하였습니다. 이런 해외 여행은 길어야 3개월 정도였습니다. 1953년에는 국립역사박물관의 민속학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1년까지 국립교육대학(Instituto Pedagógico Nacional de Varones)에서 ‘페루 문화의 제문제’라는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저의 집필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3~1934년 리마의 《프렌사》(La Prensa)지에 「카예타나 부인」(Doña Cayetana), 「복수의 사나이」(El vengativo), 그리고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단편소설 3편을 발표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작품의 사본은 제 수중에 없습니다. 1935년 단편집 『물』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에는 「물」, 「학생들」(Los escolares), 그리고 「와르마 쿠이아이」(Warma Kuyay) 가 실려 있습니다. 1938년에는 민속음악을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케추아의 노래』를, 1941년에는 소설 『야와르 축제』를, 1948년(또는 1949년)에는 『케추아족의 노래와 이야기』를 출판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단편집 『다이아몬드와 자갈』을 출판하였는데, 실제로는 단편집 『물』에 단편 「오로빌카」(Orovilca)를 첨가하여 재출판한 것입니다. 잡지 《트레스》(Tres)에 단편 「와일루이」(Waylluy)를 발표하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발행되는 《프렌사》(La Prensa) 지에 단편 「쿠이아이」를 발표하였습니다.
최근에 발표한 단편 「아랑고 형제의 죽음」(La muerte de los hermanos Arango)은 멕시코 일간지 《우니베르살》(El Universal)에서 수여하는 ‘엘 우니베르살 상’을 받았는데, 이 상은 3개월마다 수여합니다.
저에게 문학이 지니고 있는 힘을 알게 하고, 또 저를 감동시킨 최초의 작품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었습니다. 제는 이 작품을 아마존 강의 지류인 아푸리막 강 상류에 위치한 우아유우아유(Huayu-huayu) 농장에서 읽었습니다. 폐허로 변해버린 농장의 저택에서 이 책을 발견한 것이지요. 이 저택의 주인은 아버지의 친척으로, 근처 다른 농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농장은 아푸리막 강이 밀림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빌카밤바 산맥 서쪽을 침식해 형성된 까마득한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고 작품을 읽은 때는 1925년으로 제 나이 14살이었습니다. 독서를 하는 동안 틈틈이 햇빛도 쬐고 바람도 쐴 겸 과수원으로 나갔습니다. 과수원에는 바나나, 레몬, 오렌지나무가 있었고, 커피밭과 아보카도밭도 있었습니다. 그곳 나무 그늘에서는 눈 덮인 산맥이 보였습니다. 저는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충동을 두 번 느꼈습니다. 마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그 시절부터였습니다.
전에 농장에서 일하다가 사탕수수 압착기에 오른손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갔는데, 그 즈음 상처가 차츰 아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 영감은 저를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군식구로 농장에 눌러앉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도 저도 아버지가 찰우안카에 계신지 아니면 코라코라에 계신지 잘 몰랐습니다. 농장 주인은 제가 염증 때문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양철 자르는 가위로 나머지 뼈를 잘라냈습니다. 그러나 저를 살려낸 사람은 원주민 치료사였습니다. 이 원주민 치료사는 산꼭대기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 착한 농장 관리인이 불러온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곳에서 『바다의 일꾼들』, 『아이슬랜드』, 『세기의 전설』 등을 읽었습니다. 주인 영감은 내가 이런 소설을 읽고 있을 때 아반카이로 내쫓았습니다. 저에게 3리브라(libra. 화폐단위)를 쥐어 주더군요. 지독하게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농장 주인은 이 돈을 받기 위해 몇 년 동안 아버지가 계신 각처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쨌거나, 농장 주인은 수십년 동안 빅토르 위고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저는 빅토르 위고를 존경했습니다. 『레미제라블』만한 감동을 준 작품은 『카라마조프 형제들』과 『죄와 벌』뿐입니다만, 제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1929년이었습니다. [이하 타자기의 xxx로 지워진 글이 있는데,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레미제라블』만큼 강렬한 감동을 준 또 다른 책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숭고한 삶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국립도서관과 산 마르코스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거나 개인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러시아 작가의 작품은 모두 읽었습니다. 코롤렌코의 『마카르의 꿈』은 페루인의 열악한 삶에서 움튼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적과 흑』, 『보봐리 부인』도 읽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책은 고리키의 『토마스 고르데예프』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독파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백경』은 1943년 병을 앓고 난 직후 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중남미 작가의 작품으로는 『돈 세군도 솜브라』(Don Segundo Sombra)와 『텅스텐』(El tungsteno)만 읽었습니다.
시에 관해서 얘기하면, 에구렌(Eguren)과 베스트팔렌(Wesphalen)의 작품을 읽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제가 이 시작품을 읽은 것은 24살 나던 해였는데, 그때까지 나는 고전 작품밖에 몰랐습니다.
깜빡 잊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 작품,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입니다. 22살 이후에 들었던 음악, 특히 모차르트와 바하의 음악은 처음 접했을 때는 당혹스러웠으나, 이 당혹감은 이내 저의 유년시절과는 상이한 세계로 몰입하려는 의지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졸작 「오로빌카」를 읽어보도록 권합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값어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와르 축제』를 탈고한 후에 아직 극복하지 못한 당혹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인의 정신 구조는 복마전처럼 복잡해서 쉽게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와르마 쿠이아이」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언했듯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페루 원주민의 문화에 젖어든 어떤 사람도, 다시 말해서 그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자란 어떤 사람도 나만큼 서구 문화를 천착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구 문화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문화 전반을 이해하고 또 그 문화가 지닌 무한한 힘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 힘은 일종의 공포감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저라는 존재의 뿌리를 형성하는 문화가 지닌 가치들이 용해되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 가치들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문화적 접촉이 저의 무의식에 외상을 남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지배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악마적이고, 또 신의 뜻에 반하는 비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뇌를 야기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요 몇년 동안 저는 서구 문화에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원주민 공동체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긴 편지를 쓸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선생은 이 자료를 급히 보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현대 음악, 예컨대 바르톡, 드뷔시, 호네거,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현대 미술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졸작 「물」을 읽어보시면 제가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고, 또 어떻게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평은 제가 쓴 것도 몇 안 되지만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명성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아마도 비평가들의 말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야와르 축제』가 가치가 있으며, 시로 알레그리아의 『세계는 넓고 낯설다』보다 훨씬 소설답다고 얘기한 라트참(Latcham)의 견해는 예외입니다. 페루 시인 에스코바르가 스페인 세비야에서 발간되는 《중남미 연구》지에 기고한 논문의 일부, 페데리코 슈와브(Federico Swab)의 비평, 그리고 세바스티안 살라사르 본디(Sebastián Salazar Bondy)의 비평을 동봉합니다. 살라사르 본디의 평을 보면, 저를 칭찬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나 허둥대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다른 평론도 보내 드리고 싶지만, 벌써 오래 전에 평론을 모아놓은 스크랩북을 잃어버렸답니다.
리라(Lira) 신부의 채록집에 실린 케추아어 글 가운데 제가 번역한 작품도 함께 보내드립니다. 최근 이사하면서 ―올해만 벌서 두 번이나 이사했습니다― 원고들이 뒤죽박죽 되어버렸기 때문에 다른 작품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졸작에 관심을 보여주신 선생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루스 스테판에게도 마찬가지로 감사 인사 드립니다. 지금 상제중인 책이 출판되면 여러모로 제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이 책은 앙헬 플로레스와 루스 스테판 등이 영어로 번역하여 1957년 텍사스 대학교에서 출판된 『노래하는 산지인들, 케추아족의 노래와 이야기』를 가리킨다.] 지금 우리 페루 지식인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 또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충심으로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드림
추신. 그다지 진지하지 않으나 매우 칭찬할 만한 최근 평론을 보내드리오니 다음에 돌려주시기 바랍니다.[앙헬 플로레스는 이 평론을 돌려주었다.]
여기서 아르게스다스의 경력에 몇 가지 사항을 덧붙이겠다. 아르게다스는 1956년까지 교육부 민속․대중예술국에서 일했다. 그 후 페루 문화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1956~1963), 스페인에서 1년 동안 조사 연구를 마친 끝에 1963년 ‘스페인과 페루 공동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1968년 산 마르코스 대학교에서 출판되었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는 페루문화연구소를 이끌었고, 이어 국립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민족학과 학과장직을 맡기도 하고, 아그라리아(Agraria) 대학교에서 케추아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967년 시빌 아레돈도(Sybil Arredondo)와 결혼한 후, 1968년에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방문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 상을 수상했다.
1969년 11월 27일, 아르게다스는 아그라리아 대학교 총장과 학생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만한 힘과 깨우침, 다시 말해서 삶의 가치를 정당화할 만한 힘과 깨우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기에 사임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강의실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이보다 3년전인 1966년 4월 아르게다스는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권총이 빠르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969년 12월 2일 숨을 거두었다.
아르게다스의 인생 역정은 이중 국어 사용자, 즉 이중 문화의 이상한 경우를 보여준다. 스페인어로 말하고 스페인어로 기도를 올렸던 백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원주민의 땅으로 이주해서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다. 아르게다스는 안데스 산맥의 생소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주 행복하게 살았고, 쉴새없이 케추아어를 말했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인간, 동물, 땅, 하늘―에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서구 문명으로 돌아갈 시점을 맞이한 것이다.
레카바론에 따르면, 리마로 돌아온 아르게다스는 “영혼 속에 고향을 담아왔으며, 어린 시절의 놀라고 당황한 눈동자로 포착한 현실을 능숙한 솜씨로 문학 작품 속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원주민으로서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숨겨진 것을 외적으로 표출해 낸 작품이 아르게다스가 19살이 되던 193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물」이다. 이 작품에는 원주민의 심리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법, 나아가서는 그들의 언어까지도 진지하고 충실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살라사르 본디의 얘기에 의하면, “아르게다스는 원주민들 용의 특수한 스페인어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아르게다스가 얘기할 때, 즉 작가가 화자가 될 때 구사하는 스페인어는 새로운 분위기의 스페인어, 전혀 상이한 영혼이 숨쉬고 있는 언어이다. 바로 여기에 아르게다스의 독창적인 표현이 뿌리박고 있다.”
실제로 아르게다스는 케추아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원주민이라는 느낌을 준다. 라트참이 적절하게 표현하였듯이 아르게다스의 중편소설 『야와르 축제』는 시로 알레그리아의 『세계는 넓고 낯설다』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르게다스의 단편 「물」은 토박이문학(indigenismo)의 정수이자 이 장르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한다. 오로지 호르헤 리라(Jorge Lira) 신부가 수집하고 아르게다스가 손수 스페인어로 번역한 『케추아족의 노래와 이야기』에 수록된 케추아족의 작품들만이 이에 필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르게다스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3편의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깊은 강』, 『모든 피』(역주. 모든 피란 페루의 모든 인종, 문화, 계급을 가리킨다), 그리고 1971년에 출판된 미완성 유고 『위 여우 아래 여우』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는 이렇게 평가한다. “원주민들 아르게다스의 소설들을 통해서 진정으로 페루 문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안데스 산지인들의 아름다움, 암울한 폭력, 치명적인 모순, 감미로운 시와 신화 또한 페루 문학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르게다스 연보
우 석 균
1911년 페루 아푸리막(Apurímac)주의 안다우아일라스(Andahuaylas)에서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José María Arguedas) 탄생.
1914년 모친 사망.
1917년 아버지의 재혼으로 산 후안 데 루카나스(San Juan de Lucanas)에 있는 계모 농장으로 이주. 농장의 원주민들이 실질적으로 그를 양육함에 따라 스페인어보다 케추아어(quechua, 안데스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원주민 언어)를 먼저 배움. 또한 아르게다스가 인종적으로는 백인에 가까웠음에도 원주민들에게 동족 의식을 느끼는 계기가 됨.
1923년 아버지를 따라 남부 안데스를 두루 여행하며 잉카의 옛 숨결, 안데스의 대자연, 원주민들의 민속과 음악 등을 내면화시킴.
1931년 리마(Lima)의 산 마르코스(San Marcos) 대학교 문학부 입학.
193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고학으로 학교를 다님.
1935년 첫 창작 단편집 『물』(Agua) 발표.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의 중편 소설 『텅스텐』(El tungsteno)과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José Carlos Mariátegui)의 영향을 받아 수탈자들에 대한 증오를 담고 있는 작품.
1937년 파시스트 성향의 당시 페루 정부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했다가 투옥됨.
1938년 『케추아의 노래』(Canto quechua) 출판
1939년 출옥 후 교직 생활과 창작을 병행. 결혼.
1941년 교육부 공무원이 됨. 식민지 시절에 스페인에서 유래되어 안데스 지방에 독특한 형태로 토착화된 투우 축제를 소재로 한 중편 소설 『피의 축제』(Yawar fiesta) 발간. 전통 토박이문학(indigenismo)이 원주민 문제의 해법을 계몽이나 경제적 불평등 등에 입각하여 찾으려 했던 데에 반해 이 소설은 문화적 주체성 확립을 화두로 삼고 있어 아르게다스의 작품 경향을 신토박이문학(neoindigenismo)라는 새로운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1944년 정신 질환으로 창작 활동 중단.
1948년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봉급을 삭감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이 재발.
1949년 『케추아족의 노래와 이야기』(Canciones y cuentos del pueblo quechua) 편찬.
1950년 스페인어로 원주민의 삶에 대해서 작품을 써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페루 작가들의 고뇌를 담은 『페루의 소설과 문학 표현 양식의 문제』(La novela y el problema de la expresión literaria en el Perú) 발표. 인류학 석사 학위 취득 후 산 마르코스 대학 민족학과 교수가 됨. 원주민들의 전통 신화, 음악, 문학 채집 및 당대의 원주민 부락에 관한 연구 등의 인류학적 작업은 소설 창작과 더불어 아르게다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 세계에도 깊은 흔적을 남김.
1953년 문화박물관 산하 민족학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
1954년 오랜 침묵을 깨고 중편 소설 『다이아몬드와 자갈』(Diamantes y pedernales) 발표.
1956년 원주민 부락의 변화 과정에 대한 인류학 저서 『원주민 부락의 변화』(La evolución de las comunidades indígenas) 발간.
1958년 위 저서로 유네스코에서 연구비를 얻어 스페인 여행. 대표작 『깊은 강』(Los ríos profundos) 발표. 토박이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꼽혀 여러 나라에 번역되었으며 아르게다스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문화적 주체성을 강조한 아르게다스 특유의 문학 세계의 완결판이었으며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도 더 진정한 마술적 세계관을 형상화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하는 이도 있다.
1961년 청년 시절 형무소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 소설 『제6형무소』(El sexto) 발표.
1963년 페루와 스페인 부락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1964년 최고의 야심작이며 비평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장편 소설 『모든 피』(Todas las sangres) 출간. 아르게다스는 이 소설을 통해 페루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깨어 있는 의식을 지닌 원주민 민중이 변혁을 주도하는 희망찬 미래가 오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
1965년 국립 역사박물관장 취임. 두번째 결혼.
1966년 정신 질환 재발로 자살 기도. 이후 몇 년간 칠레를 오가며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인류학 연구와 소설 집필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 원주민 전설을 채집한 『우아로치리의 신들과 사람들』(Dioses y hombres de Huarochirí) 편찬.
1968년 일생의 영예로 생각한 가르실라소 델 라 베가상(賞) 수상.
1969년 장례식에서 원주민 형제가 케나나 차랑고(안데스의 전통 악기들)를 연주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
1971년 미완성 소설 『위 여우 아래 여우』(El zorro de arriba y el zorro de abajo) 발간
|
첫댓글 중남미의 페루 작가 아르게다스....그지없이 암울한 幼年시절과 성장기의 인생력정, 14살 때, 농장폐가에서 우연히 주워읽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문학의 힘"을 깨달은 것이 작가의 꿈과 야심을 갖게된 계기였다는 사실부터가 그대로 감동이다. 스페인식민지였던 페루의 역사도 그처럼 처절하였다는 점, 약탈과 폭력이 란무하는 역사시대적 풍경을 겪으면서 <어린 시절의 놀라고 당황한 눈동자>로 포착한 현실을 능숙한 솜씨로 문학 작품 속에 토해낸 작가, 특히는 서구문화의 횡포속에서도 원주민세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인간적, 양심적 문학의 신조를 일궈내고 웨친 작가!.....(아래 계속)
그런 이르게다스가 "권총 자살'로 "현란한 추락"을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었이었을까?....“저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만한 힘과 깨우침, 다시 말해서 삶의 가치를 정당화할 만한 힘과 깨우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기에 사임합니다.” --이 사임書에 은폐시킨 작가의 메타포와 메시지!.....
서구문화의 횡포속에서도 원주민세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인간적, 양심적 문학의 신조를 일궈내고 웨친 작가... 프린터해서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