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교리는 역사적으로 부침(ups and downs)을 거듭하면서 기독교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고, 특히 종교개혁시대의 신학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다양한 부류의 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현대 신학자들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소개했다: 현대인들은 에덴동산의 원죄 이야기를 역사적이기보다 신화적으로 알아듣고, 조상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현세대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남녀의 결합을 마치 죄의 질병을 옮기는 순간으로 해석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판이 있다 하더라도, 원죄의 개념은 인간의 경험과 죄의 보편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기 때문에 여전히 필요할 뿐 아니라, 신학을 “구성적”으로 작업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신학적 용어”라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원죄는 “생리적 유전(遺傳)의 모델”로 설명되어왔다. 이는 최초의 죄가 그 후손에게 생리적으로 유전되어 모든 사람이 “생득적”으로 죄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의 유전적 해석 모델을 제시한 대표적 신학자였다. 그는 원죄를 둘로 구분했는데, 하나는 “육욕”(concupiscentia canalis)이고, 다른 하나는 “육욕으로 인한 죄책”(reatus concupiscentiae)이다. 하지만 원죄 교리를 성(性) 문제와 직접 연계하는 것은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 문제를 성욕과 연결시킨 것은 “다분히 개별적 경험에 근거한 주관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의 성관계 때문에 죄가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도 없다. 그보다 원죄는 “인간의 존재 안에서 죄가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행위임과 동시에 하나의 보편적이고 숙명적인 힘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깊이 표현하려는 전문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원죄의 상대 개념인 자범죄는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범하는 죄를 말한다. 원죄가 어떤 방법으로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해석상의 차이가 있지만, 내재된 원죄의 속성이 행동으로 표출되면 그것은 스스로 범하는 죄(transgression)가 된다. 일반적으로 원죄라는 개념은 죄의 책임을 최초의 인간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있지만, 자범죄는 죄를 범하는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전자보다는 후자가 죄의 실체를 인식하는 데에 좀 더 현실적이고 능동적이 된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2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