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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마을과 서원
2012년 4월 17일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이날 우리 춘초몽회원 여럿이 모여 역사문화유적탐방 길을 나섰다. 와부읍에 있는 석실마을과 서원, 김상헌, 김상용, 조말생 묘 탐방이다.
먼저 석실마을 입구에 내려 김상용선생 묘에 참배를 하고 마을 안쪽 송시열 선생의 글씨 <醉石>비를 둘러보고 김상헌선생 묘에 참배했다.
석실마을은 16세기 중엽 이후 안동 김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다. 원래 안동에 세거하던 김씨는 김번(金璠)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계기로 서울의 북악산 아래로 이주하였다. 김번이 죽자 석실산에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이곳이 안동 김씨의 묘산(墓山)이 되었고 이후 후손들이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곳은 또한 왕릉 후보지가 되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가 워낙 강해서 능을 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이 이곳에 살게 되는 계기는 혼인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김번은 세조․성종 연간에 연이어 공신을 배출한 훈구계열의 남양홍씨와 결혼하였다. 즉 홍걸(洪傑)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남양홍씨들은 일찍부터 와부면 일대에 묘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석실마을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김번의 후손들은 서인․노론세력의 가장 강력한 중심세력으로 정계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석실서원의 창건과 강학을 주도하면서 경화(京華)학계의 학풍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김번의 묏자리는 명당이었다고 한다. 이 명당을 둘러싸고 친정아버지의 묏자리까지 빼앗은 풍수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안동 김씨가 와부 석실에 입향하기 전에는 이 일대의 산은 모두 남양홍씨의 선산이었다. 그 때 남양홍씨 가문에서 딸을 안동김씨 가문으로 출가시켜 두 집안이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동김씨 가문으로 출가한 홍씨는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 김번과 사별을 하였다. 이때 친정아버지가 사망하자 석실마을로 갔다. 홍씨 부인의 친정에서는 지관을 시켜 묏자리를 보고 광중(壙中)을 파두었는데, 그 자리가 옥호저수형, 즉 옥항아리에 물을 담은 형국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이 말을 들은 홍씨 부인이 밤새도록 광중에 물을 퍼다 부었고 결국 친정아버지의 시신을 안장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3년 후 홍씨 부인은 사별한 남편 김번을 옥호저수형의 땅에 이장시켰는데 그 후로 안동 김씨일가는 고관대작과 문장, 충신이 수없이 나왔다. 이 자리는 금관자, 옥관자가 3말씩 나오는 자리라고 한다.
또 하나의 풍수에 관한 전설도 있다. 석실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팔대 명당의 하나라는‘옥호저수형’의 명당자리가 있었다. 즉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으로 덕소 쪽으로 병입구 모양을, 정상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율석리 쪽에서 봉우리를 맺으면서 병마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병마개 중심에 안동김씨 김번(金璠)의 묘소가 있다.
인조 때의 명신인 김상용·김상헌의 5대조 할아버지가 가난하게 살다가 돌아가셨단다. 그의 아우는 당시 양산 통도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던 백운거사였는데 형님의 부음을 전해 듣고 천릿길을 단숨에 달려왔다. 그러나 백운거사가 덕소의 형님 집에 왔을 때는 이미 상을 모두 치른 뒤였고, 형수는 어린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그 방앗간 집에서 삯방아를 찧고 있었다. 풍수지리에 밝은 백운거사는 무심코 이 방앗간 자리가 천하의 명당 정혈임을 알고, 형수에게 말했다. "형수님, 이곳은 비록 방앗간이지만 천하의 음택 명당으로 옥호리병에 물이 담긴 형상의 옥호저수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님의 묘를 이장하시어 후손의 발복을 기원·도모하십시다." 백운거사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여 그 발복이 자신에게까지 미칠 것을 고려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방앗간을 당장 그만두어야 하니 형수로서도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백운거사의 형수는 자신의 지아비, 즉 백운거사의 형님 묏자리로 쓴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노라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는 형님의 시신을 이곳에 옮겨 묻고는 어린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는 지금 비록 매우 가난하지만 자손이 영달하여 출세할 것이다. 앞으로 너의 자손 중에서 금관자(金冠子)·옥관자(玉冠子)가 쏟아져 나올 것이니 모두가 네 아버지 묫터의 발복임을 꿈엔들 잊지 말아라." 신기하게도 백운거사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인조 이후 안동김씨는 금관자·옥관자가 쏟아졌다. 산 구릉이 멈춘 방앗간 양택에 묘를 쓰고 발복을 하니 흔하지 않는 사례의 하나이다. 모두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지금 이곳에는 취석이란 비석이 있다.
‘취석(醉石)’은 우암 송시열이 도산정사를 건립할 당시 김수증에게 준 글로, 김수증이 이것을 4년 뒤인 1672년 지금의 비석 앞면에 각자한 것이다.
‘취석(醉石)’은 원래 출전이 도연명의 고사에서 온 것으로 중국의 ≪여산기≫에 “도연명이 거처하던 율리에 큰 돌이 있는데, 연명은 술에 취하면 항상 그 돌에 올라 잠을 잤다. 이로 인해 취석이라 이름 붙였다.”는 고사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이 글씨를 써준 데는 이유가 있다. 청음 김상헌이 청에 볼모로 붙잡혀 있을 때 맹영광이 김상헌의 의로운 행동을 흠모하여 도연명의 채국도를 보냈으며 이를 도연명의 진영과 함께 도산정사에 안치해 두었다. 그런데 도산정사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石室’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형상임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곳에 도연명의 고사가 담긴‘취석(醉石)’두글자를 새겨두는 것도 격에 맞는 것 같다. 이에 김수증은 우암 송시열의 뜻을 헤아려 비석 앞면에 醉石을 각자하고, 뒷면에 그 유래를 써서 각자하였다.
우리는 다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석동으로 건너와 조말생선생의 묘를 참배했다.
구리 토평 인터체인지에서 한강을 따라 춘천 가는 길에 옛 평구역 못 미처 미음나루가 있는 수석동에는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었다. 지금은 빈터에 최근에 세운 조그만‘석실서원지’란 표석하나 있을 뿐, 이곳이 충청도 화양서원과 더불어 노론의 튼실한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길가의 숱한 음식점과 조말생묘 안내 표지판밖에, 석실서원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다. 단지 석실마을이란 버스정류장 안내가 끝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당대 석학들의 일기와 시에서 자주 등장하던 미호(渼湖)와 그 석실이 바로 이곳이고, 석실을 빼고 조선후기 사상사를 이야기 할 수 없음에도 빈터에 230여년의 나이를 먹은 큰 느티나무 몇 그루가 전부이다.
석실서원은 효종 때 수석동에 건립되어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 사림들의 학풍을 빛낸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17세기 중엽 서인학파의 한 흐름을 대표하는 이단상이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서, 이이를 비롯하는 기호사림의 학맥을 크게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김상용·김상헌의 위패를 모셨다. 현종 때 서원으로 승격했다가 숙종 때 김수항·민정중·이단상, 김창협을 추가 배향했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고 석실 마을에 옮겨다 놓은‘석실서원 묘정비’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했던 청음 김상헌과 강화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한 선원 김상용 형제를 모신 석실서원은 이후 김창협·김창흡·김원행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문의 정치 사상적 근거지였다. 김원행이 석실서원 아래쪽 지금은 음식점이 있는 어간에‘삼주삼산각’이라는 서재에서 담헌 홍대용, 이재 황윤석 등을 제접할 때 석실서원은 가장 빛이 나는 때였다고 본다. 석실의 영화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끝이 났는데 석실서원의 훼철은 대원군의 목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금곡에 있던 조말생 묘역이 홍유릉이 조성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석실서원 터는 더욱 궁색한 것이 되어 결국 잊혀 버렸다. 이때 조말생신도비를 굴려굴려 이곳까지 옮기는데 3,4개월 걸렸다 한다. 숙종·영조·정조시대를 조선후기 르네상스라 일컬으며 소위‘진경(眞景)시대’라 운위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동양 3국은 각각 전쟁복구기를 거쳐 200여 년간의 평화 시기를 열어 자문화에 대한 재발견을 하고 있었다. 연경을 다녀온 노론의 젊은 층은 북벌론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청나라에서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북벌과 북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연결되고 19세기 조선정국을 주도한 남공철과 김정희에 이르러 북학론이 실천적인 학술체계로 정립되지 못하고 북학을 실천으로 옮긴 시기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의 완원을 따라 배우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완당(玩堂)으로 바꿀 때, 혹은 하와이를 지나며 아름다운 섬에 반해 호를 도산(島山)으로 했던 안창호의 시각에서 사상적 유사성과 위약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지금의 세계화를 노래 부르며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는 자들의 생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실서원은 존명사대(尊明事大)와 반청(反淸)의 기치를 표방함으로써 뒷날 북벌론(北伐論)의 이념적 표상으로 길이 추앙의 대상이 되었던 김상헌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이곳은 그가 만년에 우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숙종 21년에 양주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고 숙종 23년에 석실서원에 김수항․이단상․민정중 3인을 제향하였다. 이에 도봉서원과 석실서원은 노론의 지역적 기반으로 강학(講學)이 시작되었다. 이때 경화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18세기 이후 만개한 진경문화(眞景文化)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석실에서 교유한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 등이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다. 후에 석실서원의 강회는 북학(北學)의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안동김씨 일문에 의한 세도정치, 즉 김조순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가던 시기에 석실서원에 안동김씨의 인물 5명이 추배됨으로써 강학으로 경화학계를 주도하던 앞 시기의 선진성은 사라지고 일문의 가묘로 변질되었다. 석실서원의 위치는 겸재의 그림에서 추정해 볼 때, 현재 조말생의 신도비가 있는 근처로 그 옛날 석실서원의 터였음을 알리는 화강암 비석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따름 흔적조차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조선후기 그토록 명성과 영화를 누리던 석실에서 한 참 정도의 거리에 마재가 있다. 마재에는 다산 정약용 생가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학의 집대성자로 일컬어지는 다산이 지척에 있는 석실을 운위한 적이 없고, 역시 석실을 드나들던 그들도 다산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후기 조선의 고통스런 단면이었다. 독점된 권력의 우악스러움과 소용되지 못한 채 찻잔 속의 폭풍으로 끝나 버린 개혁의 꿈.
국가에서는 처음부터 서원의 내부 문제에 대하여는 스스로가 처리하도록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까닭은 서원이 차차 당쟁의 근거지가 되었고 국가의 재정을 축내는 데서였다. 서원이 소유한 토지를 부치는 소작 민들에게 소작료를 과하게 부담시키고 농사일이 바쁠 때에도 과중한 노역을 부과하였다. 국가에서 노역을 금하여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원생, 토지, 노비, 그리고 수입을 처리하는 기능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많이 샀기 때문이다. 또 서원의 특권이 관료들은 자신과 같은 서원을 나온 관료들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뭉치고 뭉치다 보니, 관직에 누군가를 추천하게 되더라도 동문을 추천하게 되고, 다른 쪽을 밀어내야 자신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으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특권으로는 서원에 다니는 평민은 군대를 갈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과 서원 소유의 토지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는 것이었다. 법적으로는 양반들도 평민이므로 군대에 갈 의무가 있으나 서원에 이들의 이름이 오르면 군대에 갈 의무가 없어졌다. 이를 노리고 서원에 적을 올리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며, 이러한 수요에 따라 서원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전국에 난립되어 있는 600여개소의 서원을 철폐하고 기존에 있던 주요 서원 47개소만 남겼다. 이는 서원에 딸린 전지와 노비를 줄여 양반층의 경제력과 그 세력기반을 약화시켜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확보하고 중앙집권의 정치형태를 재확립하며 백성에게도 이익을 주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실추된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분들이 살았던 삶과 시대의 고민을 같이 느껴본 시간들이었다. 世道정치가 勢道정치가 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대원군도 나중엔 그 역시 勢道 정치나 하다가 남양주의 같은 하늘에 잠들어 있다. 권력의 무상함을 일깨워 준 시간들이었다.
한강상류가 내려다보이는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고 수령 230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기념사진 한 컷. 한강을 등지고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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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소 선생님 부지런도 하십니다. 날씨도 좋았고 가까운 곳이라 이동하기도 좋았지요? 다시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석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