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정월 대보름 달>/구연식
현대사회는 다문화 융합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오랜 세월 후에는 ‘민족문화’는 낯선 단어가 될까 봐 두렵다. 이제는 민족의 뿌리보다는 인류의 뿌리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공자는 논어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전통 정신의 바탕에서 미래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 아무리 하찮은 것도 민족의 뿌리는 가다듬고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뿌리는 육체를 만들고 정신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동양 한자문화권의 나라에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 농경문화 세시풍속의 공통점이 많다. 전통사회에서 농사는 태양을 바라보며 작물을 재배해 왔다. 태양의 빛과 열 그리고 비가 농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농사 24 절기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며 세시풍속은 음력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기에 동양의 전통적 음력 위에 서양의 양력을 절충하여 농사와 세시풍속을 조화하여 내려오고 있다.
인류의 원초적인 1차 산업은 농업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의식주 중에서 바로 생명에 직결되는 것은 식(食)이기 때문이다. 태초 인류의 삶터에는 식량 획득인 농사의 흔적이 있다. 그래서 24 절기는 농사 지침의 농가 월력이다. 세시 풍속은 농사와 더불어 농경문화의 상부상조와 여유 그리고 풍류 문화였다.
정월 초하루 설날은 조상에 대한 숭모(崇慕)와 자손의 도리를 다짐하는 연중 첫 행사의 대 명절이다. 정월 대보름은 설 때 빠졌던 모든 것을 추스르며 곧 이어질 봄을 대비하여 농사 계획을 준비하기도 했다. 논· 밭을 점검 정리하거나 특히 농사는 이웃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마을 그리고 이웃 간의 화목을 위한 선린(善隣) 문화가 대부분이다.
9 가지나물과 5곡 밥, 부럼 깨물기, 더위 팔기(賣暑), 달 집 태우기, 쥐불놀이, 액막이 연날리기, 지신밟기, 귀 밝기 술, 등 모두 다 농사와 관련이 있고 적은 식량을 늘려 먹고 건강을 챙기는 흔적이 대부분이다. 기계 영농이 아니라 육체노동에 의존했던 시절이라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으로 건강을 돌보는 민속놀이였다.
오늘처럼 정월 열 나흗날 밤이면 ‘보름 새기’ 행사로 집마다 등불을 켜 놓고 악귀로부터 집을 지키는 풍습이 있었다. 나와 동생은 초저녁에 밤을 새기로 어머니와 약속을 했으나 평소 취침 시간을 못 버텨 잠을 자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찹쌀가루로 눈썹이 하얗게 칠해졌다. 간밤에 어머니와 약속을 어겨서 영등할머니가 내려와서 벌을 주고 갔다며 다음에는 어머니 약속을 잘 지키기로 했다.
오늘은 입춘이고 내일은 정월 대보름날이다. 그 옛날 시골 고향마을 뒷산에는 27 연대 영외부대 육군 야전 훈련장이 있었다. 전투식량으로 C 레이션이 보급되어 훈련장 쓰레기 소각장에 가면 깡통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보름날 불 깡통은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보름날 밤이면 마을 앞 큰 시냇가 대부 둑에서 불 깡통으로 동그라미 혹은 8 자 돌리기 쥐불놀이하다가 하늘에 높이 힘껏 던지면 불꽃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려 희열을 느꼈다.
보름날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에는 옆집 친구를 공연히 불러내어 친구 얼굴이 보이면 친구가 말하기 전에 “니 더위 내 더위 맞 더위”하면서 도망 나온다. 그때 서야 친구는 올해 나의 여름 더위를 자기가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식식거리면서 화가 났는지 다른 옆집 친구한테 나처럼 더위를 파는 놀이가 있었다.
아침 식사 후에 아이들은 자기 집에도 잡곡밥과 나물이 있었지만, 조금 잘 살아서 밥과 나물의 메뉴가 고급스러운 집은 앞을 다투어 돌아다니며 5곡 밥과 9가지 나물을 얻어서 각자의 집에서 먹어야 건강하고 액땜을 한다고 믿었다. 그때도 나는 성격이 숫되어 아래 동생을 시키고 그 집 대문 밖에서 기다린 적이 있다.
정월 보름날 망월(望月)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마을 앞 시대산이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려 토종닭 노른자 같은 보름달이 앞산에 얼굴을 내밀면 마음씨 좋은 누님 같아 그저 좋기만 했다. 시골 마을 집마다 언제 달맞이를 나왔는지 여기저기서 “망월이야! 망월이야”를 외쳐댄다. 농촌 새벽에 어느 집 수탉이 ‘꼬끼오’하고 울면 온 동네 닭들이 여기저기서 합창하여 울듯이 망월이야로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나도 덩달아 망월이야를 외쳐댔다. 어머니는 달님께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 물으신다. 아무것도 안 빌었다면 실망하실 것 같다. 그렇다고 거짓말하자니 양심이 걸려 그냥 피식 웃기만 했었다.
어린 나이에 무슨 소망을 빌어야 할지 몰랐다. 아마도 불편했지만, 티 없는 세상에 살았기에 억지로 소원 같은 것은 몰랐을 것이다. 지금처럼 세파(世波)에 시달렸으면 양심을 숨기고 욕심으로 가득 찬 소원을 달님에게 빌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보름달은 그대로인데 나의 영혼만 홍진(紅塵)에 그을리고 갈퀴여서 사람들에게 스크루지 영감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내일 밤에는 망월을 보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되겠다고 소원을 빌 작정이다. (2023.2.4 정월 대보름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