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유전자는 협력을 주저하지 않는다
로빈손 크루소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모두 사회를 이루고 산다. 사회는 협력도 있고 갈등도 있다. 그러나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갈등보다는 협력에 있을 것이다. 협력은 인류 문명이 만들어지면서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인류가 지구상 가장 강력한 포식자가 된 것은 바로 이 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 협력을 진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책이 바로 니컬라 라이하니의 ‘협력의 유전자’이다.
‘협력의 유전자’라는 제목을 보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생각난다. 둘 다 진화론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자기중심적’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이는 유전자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가 있다는 뜻이다.
이들 관심사란 바로 다음 세대에서 반드시 발현하는 것이다. 이기적 관점이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개체의 번식이나 생존을 낮추는 유전 형질, 그리고 그런 형질을 뒷받침하는 변이 유전자는 개체군에서 인정사정없이 모조리 제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협력의 유전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협력에 초점을 맞추고 다윈의 진화론은 개체가 제 잇속을 좇아 행동한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기적’이라는 말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협력의 유전자가 다른 개체에 들어있는 동일한 유전자를 복제하는 데 도움이 될 때 자연선택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전자는 이기적일지 몰라도 상황이 적절할 때는 협력을 주저하지 않는다.
나. 협력의 진화론
이 책은 협력과 사회적 상호 작용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즉 협력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협력이 인간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협력을 이루기 위해 어떤 유전자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또한 협력이 인간의 문화와 진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인간이 협력을 이루는 유전자적 특성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인간이 협력을 통해 생존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사례들을 소개하며, 사회적 상호 작용이 어떻게 협력을 촉진시키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한편으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개인의 이기심과 경쟁의 역할도 놓치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협력과 상호 작용에 대한 진화론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네 개의 커다란 범주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1부에서는 개체의 진화를 다루고 있다. 먼저 우리 몸속 깊숙이 자리 잡은 작은 것에서 출발해 유전자와 세포가 어떻게 협력해 통합된 독립체, 즉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형성하는지를 살핀다.
지구에 처음으로 생명체가 나타난 이후로 , 단독 개체들은 서로 협력하여 진화해왔다. 이러한 협력은 동종 사이에서 일어나며 서로 다른 종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다툰다. 다윈의 진화론은 개체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강조한다.
2부는 가족의 진화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사실 함께 할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이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뇌가 통증 신호를 보낸다.
집단생활을 하면 혹독한 환경에 둘러싸인 개체에게 보호막이 되고, 때로는 치러야 할 대가를 충분히 넘어서는 이익을 얻는다. 대형 영장류 중에서도 인간은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우리는 사회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안정된 집단도 이르고 있다.
자식을 돌보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인간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시간과 노력을 많이 쏟고,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적극적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종은 드물다. 엄마는 자식을 키울 때 다른 식구의 도움을 받는다. 가족 사이의 이런 제도를 협력 번식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때로 가족이 아닌 완전한 타인한테까지 도움을 베풀기도 한다. 3부에서는 이와 관련해 논의한다. 우리는 인간답게 하는 특성 중 하나가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과도 협력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협력해 자식을 키우는 여러 종 가운데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협력 번식에 뛰어나다. 인간의 이런 사회성은 다른 여러 인지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낯선 이를 돕는 종이 우리만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계에서 우리만큼 큰 규모로 협력하는 종은 없다.
우리 인간이 협력에 이토록 뛰어난 이유는 더 강력한 인지 능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자연이 우리 앞에 던진 여러 제약 너머를 내다보고 더 협력하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협력은 호혜주의와 상호의존성 때문이다. 제대로 된 유인책이 없으면 취약해지고 제 잇속을 좇는 개인의 행동에 쉽게 무너진다. 여러 실험에 의하면 처벌이 협력을 촉진한다. 배신보다 협력이 더 이익이 되도록 딜레마를 바꿔놓기 때문이다.
4부에서는 대규모 사회의 진화를 논의한다. 초기 인간 사회는 꽤 중요한 특징을 공유했을 것이다. 인류 역사 대부분을 일정한 거주지 없이 저밀도 사회에서 살았고, 재배나 구매로 먹거리를 구하기보다 사냥이나 채집에 의존했다.
그 이후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이어지면서 소유물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생활이 제법 안정되자 인구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소유물 분배 과정에서 권력이 생겨나고 마침내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때의 인간 사회는 평등주의 사회였다.
평등주의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길은 폭력과 위협이 아니라 신망과 존경이다. 힘이 아니라 설득이다. 그래서 대체로 존경받고 너그럽고 집단에 가장 이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른다.
인구수가 늘어나자 인간에게 협력은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의 조상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가족 구성원과 허물없는 친구들 다수가 멀리 떨어져 사는 광범위한 사회관계망 속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 협력과 인류의 미래
지구의 자원은 제한적이다. 거기에 인구는 점차 늘어 80억 명에 육박한다. 개인, 지역사회, 국가 간 협력이 이루어지기가 점점 더 어려울 수 있다. 협력이 부정적인 쪽으로 이루어진다면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다.
코로나 19가 확산되자 사방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주로 좁은 지역 단위에서 일어난다. 위협이 닥치면 도덕적 배려의 범위가 줄어든다. 각국은 국경을 봉쇄했고, 백신 사재기를 시도했다.
인류에 의해 지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 동식물의 서식지 파괴와 멸종, 환경 오염 증가, 자원 과소비, 핵무기 감축 불이행이 모두 인간이 공공의 이익을 달성하고자 협력하는 데 실패한 방식을 기록한 한없이 길고 우울한 목록에 올라 있다.
이런 문제를 풀기 어려운 까닭은 인류 전체가 협력해야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 공공재는 누구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의 공기 오염을 간신히 줄이더라도 SUV 운전자가 그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하게 막을 길은 없다.
서로 협력해 지구 공공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느냐가 인간이 이 행성에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를 아주 크게 좌우하지만 무임승차 하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므로 해법을 찾기란 무척 어렵다. 저자의 마지막 일이 머릿속을 맴돈다.
“협력하지 않으면 길게 볼 때 재앙을 부르겠지만, 그 시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간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우리는 이 냉혹한 진화 논리에 내몰린 나머지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운명을 알면서도 멈춰 서서 휴전을 선언하지 못한 채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