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YAL SWEDISH OPERA, STOCKHOLM
- A SHORT HISTORY
오페라라는 예술이 처음 스웨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세기의 시작과
더불어였다. 첫 공연은 해외공연단의 순회공연이었고 스웨덴에서 제작된
진짜 스웨덴 오페라는 1770년대 초반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1771년 국왕
구스타프 3세는 몇십년동안 스톡홀름 왕궁 옆 언덕에 있는 볼후셋극장
에서 공연을 해오던 프랑스인의 오페라단을 해산시키고 그대신 스웨덴
오페라단을 만들었다. 여기서 모든 오페라는 오직 스웨덴어로만 공연
되어야 했다. 프란체스코 우티니, 요제프 마르틴 크라우스, 요한 고틀
리프 나우만과 아비 포글러 등 수입된 작곡가들이 스웨덴 시인들의 시
에다 곡을 붙여 오페라를 만들었고 국왕은 스웨덴의 오페라 예술을 위한
재단을 세웠다. 구스타프의 오페라는 이렇게 스웨덴 음악사에 가장
뚜렷한 개념으로 드러났다. 구스타프의 재위동안 많은 걸작들이 나왔다.
요한 헨릭 켈그렌의 대본과 나우만의 작곡인 "구스타프 바사" (Gustaf
Wasa) 켈그렌의 대본과 크라우스 작곡의 "카르타고의 아에네아스"
(Aeneas in Carthage)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1773년 1월 18일은 스웨덴 오페라가 시작된 날이다. 알더만 요한 벨란더
대본 프란체스코 우티니 작곡의 "테티스와 펠레"가 역사적인 초연을
맞게 되었다. 1782년까지 스톡홀름에서의 모든 오페라는 볼후셋극장
에서 공연되었는데, 다양한 유럽 작품들이 모두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불려졌다. 글룩, 그레리, 헨릭 필립 욘센은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였다.
자신의 뜻에 따른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지던 그해, 국왕은 오페라극장
을 계획하기 시작했고, 1775년 기공된 왕립 오페라하우스는 1782년
9월 30일 정식으로 개관되었다. 개관기념작은 크라우스의 "아에네아스"
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적군 장군의 사랑 이야기였다. 원래 아들
러벳의 대본에 의한 나우만의 작품 "코라와 알론조"가 초연될 예정이
었으나 "아에네아스"가 대신하였다. 오페라와 아델크란츠가 설계한
오페라하우스 둘 다에 대한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극장은 다음 세기
까지도 스톡홀름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완벽한 극장의 하나로 인정되었다.
오페라하우스 개관 10년이 채 안된 1792년 3월 구스타프 3세 국왕은
가면무도회 도중에 암살당한다. 국왕의 시해는 문명 세계에 충격을
주고 이 사건은 프랑소와 오베르와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로
다시 태어난다.
당시 공연된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현재 알려진 것으로는
파이지엘로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그레리의 "사자왕 리차드"
"카이로의 대상" 그리고 1799년 11월 초연된 크라우스 작 "카르타
고의 아에네아스"정도였다. 현재는 작품의 일부만 전해진다.
볼후셋의 로얄 오페라는 무용예술인 발레도 공연하여 주목을
끌었다. 최초로 공연된 작품은 골로디에르의 "기회만 주면
누구나 도둑이 된다"였는데 200년이 넘은 최근 복원되었다.
1812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스톡홀름에서 초연되었고 이어서
"돈 죠반니"와 "후궁탈출"이 뒤를 이었다. 1821년에는 '피가로의
결혼", 1823년에는 베버의 "자유의 사수"가 공연되면서 위대한
오페라의 시대가 열렸다. 모차르트 "황제 티토의 자비", "코지
판 투테", 로시니 "세빌리아의 이발사", "이탈리아의 터키인".
베토벤 "피델리오", 도니제티 "루치아", 벨리니 "노르마", "몽
유병의 여인"등이다. 1850년이 되기 이전에 이 작품들은 스톡홀
름에서 친숙한 작품이 되었다. 물론 이 기간동안 스웨덴 오페라
및 노래극들도 만들어졌다. 프란츠 베르발드의 "골콘다의 여왕"
과 :소리아의 에스트렐라"는 최근에 복원되었다. 그의 "수도원에
가다"와 "양장재단사" 역시 스웨덴 음악사에 기록될 작품이었다.
린드블라드의 "프론되르나", 1846년 3월에 초연된 란델의 "뵘
란트의 사람들" 역시 로얄 오페라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이
작품은 1997년까지 842회 공연을 할 만큼 스웨덴 국민의 인기를
끌었다.
1845년부터 새 오페라하우스에서는 매년 평균 3작품의 발레를
무대에 올렸다. 첫 작품은 클래식 발레의 걸작 "지젤"이었고
1896년 또 다른 미래의 클래식 "코펠리아"가 공연되었다.
오귀스트 부르농빌의 소품들과 다른 작품들은 시간의 망각을
당해내지 못하고 잊혀져 갔다. 19세기에 쓰여진 차이코프스키
3대 발레는 1929년 "호두까기 인형", 1942년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이어 1953년 "백조의 호수" 전막이 겨우 공연되었지만
이후 500여회나 공연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로얄 오페라극장(사실 그동안 이름이 12번이나 바뀌었다)에서
베르디 오페라가 초연된 것은 1852년 8월 "맥베드"였다. 4년전
"에르나니"가 공연되긴 했지만 그것은 순회공연단에 의한 것
이었고 로얄 스웨디시 오페라가 프로덕션한 것은 1852년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첫 공연은 "리엔치"로 1863년 6월이었고 72년
"방황하는 화란인"이 들어간다. 비제 "카르멘"은 파리 초연후
3년만인 1878년 3월 무대에 오르는데 지금까지 1390회나 공연
깨지지 않을 최다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베르디 "오텔로"는 1890년 5월 공연되었고 마스카니 "카발레
리아 루스티카나"는 그해 12월 구스타프 국왕의 오페라하우스
에서 최후로 초연된 작품이 되었다.
오랜 기간이 지남에 따라 건물의 기초가 스톡홀름강 쪽으로
느리게 이동된 것을 발견되자 결국 극장을 닫기로 결정되었다.
1891년 11월 30일 고별공연이 이루어졌다. 원래의 건물은
완전히 철거되고 새 극장을 위한 기초가 세워졌다.
요즘의 스톡홀름 관광객은 현재의 오페라하우스 광장을 지나
스웨덴 외무부가 있는 곳에서 구스타프 국왕의 오페라하우스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7년동안 오페라단은 블라시홀멘에 위치한 스벤스카 극장에
상주하며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 레온카발로의 "팔리
아치", 바그너의 "발퀴레", 베르디의 "팔스타프"를 처음
무대에 올린다. 스벤스카에서의 공연은 1989년 6월을 마
지막으로 끝났다.
이해 가을 악셀 안데르보리가 설계한 네오클래식 풍의 새
오페라하우스가 옛 극장 자리에서 개관되었다. 9월19일
개관공연에서는 옛 극장에 대한 찬사를 바치며 린드발드
"프론되르나", 베르발트 "소리아의 에스트렐라" 하일라
이트와 함께 이바르 할스트롬의 신작 칸타타가 연주되어
스웨덴다운 공연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898/99 시즌은 빌헬름 스텐함머의 "티르핑"과 안드레아스
할뢰의 "발데마르스카텐"으로 이어졌다. 1901년 스톡홀름의
오페라 팬들은 11월에 처음 소개된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2년후 1904년 2월 초연된 "토스카"에 열광한다. 1907년 2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초연되면서 "니벨룽의 반지" 전작
공연이 완성된다. 이듬해에는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살로메"
역시 무대에 올렸다. 이로써 로얄 스웨디쉬 오페라는 바로크
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오페라와 발레의 방대한 레퍼터리를
모두 갖춘 셈이 된다.
20세기 스웨덴 작곡가들의 오페라도 꾸준히 무대에 오른다.
빌헬름 페테르손베르거의 "아른리욧"이 1910년에, 잉그바르
리트홀름의 "꿈속의 놀이"가 1992년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998년 로얄 스웨디쉬 오페라는 개관 100주년을 맞아 스웨덴
오페라 스벤 다비드 샌드스트룀의 "도시"를 공연하여 시인
카타리나 프로스텐손과 함께 널리 찬사를 받았다.
로얄 스웨디쉬 오페라에서 지금까지 전설적인 오페라 스타
들이 무대를 빛내주었다. 제니 린드, 크리스티나 닐손, 유씨
비욜링, 비르깉 닐손, 시구르트 비욜링, 괴타 빈베리, 엘리자
베트 쇠스트로, 니콜라이 겟다, 잉그바르 빅셀, 베리트 린트
홀름등이 그들이며 스웨덴의 명가수들 또한 로얄 오페라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호칸 하게고드, 마리안 호간더, 라일라 안데르손 팔메, 브릿
마리 아룬, 브르기타 스벤더, 아니타 죌트, 시브 벤베리,
스테판 달베리, 카타리나 달라이만, 토마스 수네괴트 등 솔로
연주자들이 이 무대를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