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의 생가!
이 곳에 오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시인 정지용 님의 문학기행을 왔다가 현지인의 안내를 통해 설명을 들으면서 이 곳에서 400 미터 떨어진 곳에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 일행은 그 곳으로 가보길 원했고, 그 곳을 관리하는 분께 전화를 드려서 문을 좀 열어달라는 현지인의 친절함에 의해서 우리 일행은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었지만 즐거운 발걸음으로 육영수 여사의 생가터를 방문할 수 있었다.
정지용 시인이 좋아서 퇴직 후 스스로 원해 정지용 생가의 안내역할을 하고 있다는 성함도 모르는 그 분은 육영수 생가터에도 따라오셔서 그 곳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오늘은 현충일.
어제 학교에서 계기교육의 하나로 현충일 날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조기게양을 해야하는 이유와 예를 들면서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었는데 오늘 이 곳을 예정에도 없이 방문하게 되니 덤으로 얻은 선물 같아서 참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 그 분은 나의 우상이기도 했다.
우아한 자태와 목련꽃 미소, 단아하고 고운 모습이 즐겨 입으시던 한복과 잘 어울리시던 분.
초등학교 때 즐겨보던 "어깨동무"와 작게 딸려나왔던 부록까지도 글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것도 친구에게 빌려서 밤새워 읽었었는데, 5학년때 크리스마스날 선물로 아버지가 "어깨동무"를 처음으로 사오셔서 내게 주시던 날의 흥분과 감동은 아직도 고소란히 남아서 가끔 들쳐내어 행복해 하던 책을 발간하신 분이시기도 한 것을......
육영수 여사가 하신 말씀 중,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제목도 없는 아래의 귀절은 어린 나에게 무한한 꿈이 되어 주곤 하였다.
................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
언젠가 나의 취미 중 하나가 하늘쳐다보기라고 했는데 아마도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는 이 말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난 이 말을 항상 떠올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 분이 다녔던 죽향초등학교 화단에는 위의 내용이 휘호비로 세워져 있었다.
일행들과 주춧돌만 남아있는 집터 위에서 각자 준비해 온 점심을 나눠 먹으면서도 우리의 화제는 육영수 여사에 관한 것이었다.
한 때 세 정승이 살았다는 99칸짜리의 위풍당당한 집이건만 지금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모습으로 대문을 들어서자 말자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먼저 반겼다. 우거진 숲과 잡초들 그리고 연못이 있었다는 뒤쪽은 너무 엄습한 기운마저 감돌아서 얼시년스럽기조차 한 생가터였다.
철거되기 몇 년전에 개보수를 현대건설에서 나와서 하였단다. 하지만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의 연이은 불행한 죽음 이후에 까닭없이 집들이 하나씩 하나씩 허물어지더라는 말을 들으며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던 나의 개인적인 생각과 동일시 되는 부분이 생각났다. 그것은
"집의 기운과 사람의 기운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막연한 생각인데 이 곳에서 또 적용된 듯하여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의 친정의 옛집은 뒤로는 단석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작은 집이었다. 돌담 아래 정답게 모여있던 장독대와 우물, 우물가의 앵두나무, 동쪽 담 끝에 서 있던 오얏나무 사이에는 조그마한 텃밭과 꽃밭이 경계선도 없이 섞여서 꽃도 피우고 오이며 가지도 열렸었는데 그 곳을 가꾸는 이는 어머니셨다.
꽃을 좋아하신 부모님들께서는 작약, 국화,장미,채송화며 봉숭아.난초,족두리꽃,봄이면 노랗게 담장 위로 아름답게 피던 황매화, 가을이면 빨갛고 작은 열매가 줄줄이 달렸던 구기자, 하얀 꽃을 피우던 옥잠화, 수돗가의 잎이 큰 토란까지도 꽃과 함께 어울려서 아름답던 꽃밭이 있었는데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돌보는 이가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국화꽃은 영문도 모른 채 말라죽고 말더니 그것을 필두로 꽃밭은 서서히 풀밭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담장 밖의 다양한 색깔로 꽃을 피워 집 안쪽을 기웃거리던 키 큰 접시꽃마저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몇 년 후에 폭풍의 영향으로 흙집에 물이 차고 말아서 더 이상 그 집은 집의 구실을 못한 채 방치되고 말았는데 그 때 나의 막연한 증명되지 않은 생각이 바로 집터도 어떤 영향있는 사람과의 운명과 함께 한다고 느낀 것이었다. 바로 우리 집은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 그 기운이 쇠잔하여 그렇게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늘 머리 속에 남아있었는데 오늘 이 곳에서도 그 생각이 증명된 것 같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함께 간 선배 한 분은 그러셨다.
이 곳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시고는 자고로 집에 있는 나무들은 집보다 키가 크면 안된단다. 정원수로 가꾸면서 적당히 키워야지 나무들이 너무 커 버리면 그 기운이 세서 상대적으로 집의 수명이 오래 가지 않는 것이란다. 듣고 보니 그 또한 일리있는말인지라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질 뭔가.
흥망성쇠의 기운이 사람과 집터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정말 알 수는 없지만, 오늘 이 곳을 방문한 것은 나에겐 우연히 주어진 행운이었고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 참고 글 ***
1. 육영수 여사의 생가
시인 정지용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다.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 육영수 여사의 생가터는 정적만이 감돈다. 2.000여 평으 대지에 한때를 풍미했던 고택은 허물어져 방치되어 있다. 부친 육종관은 5.000석 토호로 육씨 집성촌이 있는 옥천군 청산면에 살다가 1923년 이곳 교동리 99칸 집을 사서 이사했다. 이 집은 조선말 영의정을 지낸 송대감이 1900년 전통 목조 한옥으로 건축해 살던 집으로 1913년 군부대신 민영기 대감이 인수했고, 10년 후 육종관씨가 이 집을 사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천군은 2007년까지 90억원을 들여 충북도 지방기념물 제123호(2002년 4월 25일 지정)인 육 여사 생가 터에 건물을 복원키로 했다. 군은 고증을 통해 이 곳에 있던 안채와 사랑채 등 건물 7채와 연못, 정자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한 뒤 주변에 기념관도 조성할 계획이다. 1800년대 전통 한옥인 육 여사 생가는 소유주인 부친 육종관(1965년 사망)씨가 사망한 후 후손들의 상속분쟁에 휘말려 방치되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 99년 완전 철거됐다.
2. 육영수 (陸英修 1925∼1974)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부인.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1942년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50년 부산에 피란갔을 때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하였다. 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각종 사회·육영 사업에 힘써 양지회(陽地會)를 결성하고 고아와 노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남산에 어린이회관, 능동(陵洞)·구의동(九宜洞)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였고 어린이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였다. 또한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복지사업에 앞장섰고, 적십자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자연보존협회 총재 등을 지냈다. 74년 8월 15일 광복절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분들의 가족을 엄청 사랑합니다. 구 박 대통령의 가족들을 지금도 그 한분의 펜으로 항상 같이 하고 있습니다. 선아님이 다녀오신 육영수 여사님의 자택을 보면서 아직 가 보지못한 나에게 아주 마음깊이 닥아 왔습니다. 감사 합니다...ㅇ유월에 시작 하는 첫 월요일 좋은 한주가 되이소...^^*
( 왜 떠나는 지 영문도 모르면서 육여사와 먼 길, 길동무하며 떠났다.) 그 날...육영수 여사님이 하늘로 가시던 날 , 육영수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시던 날, 기념식장에 참가했다가 경호원이 문세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숨진 장봉화양이 당시 나이 16세로 함께 하늘나라로 갔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답니다.
첫댓글 인생무상...................
그분들의 가족을 엄청 사랑합니다. 구 박 대통령의 가족들을 지금도 그 한분의 펜으로 항상 같이 하고 있습니다. 선아님이 다녀오신 육영수 여사님의 자택을 보면서 아직 가 보지못한 나에게 아주 마음깊이 닥아 왔습니다. 감사 합니다...ㅇ유월에 시작 하는 첫 월요일 좋은 한주가 되이소...^^*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립니다.왠지 숙연해지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었는데,묘한 감정이 흐르는군요.빗길을 달리는 차소리는 더욱 시끄럽기만 하고....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은.
2004.5.1.상현달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정류장에서..... 하늘쳐다보기가 선아샘의 취미라고 빠른 지하철 안 타고 버스 기다리면서 ......뭐든지 빨리빨리 그러면서 애들에게만 여유를 가지게 했던 내 자신을 한 번 돌아 보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 왜 떠나는 지 영문도 모르면서 육여사와 먼 길, 길동무하며 떠났다.) 그 날...육영수 여사님이 하늘로 가시던 날 , 육영수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시던 날, 기념식장에 참가했다가 경호원이 문세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숨진 장봉화양이 당시 나이 16세로 함께 하늘나라로 갔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