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재유고 제35권 / 묘표(墓表)
숙부 참판 부군 묘표[정사년, 1677, 숙종 3]
선생의 성은 윤씨(尹氏), 휘는 문거(文擧), 자는 여망(汝望)이다. 부친 휘 황(煌)은 대사간의 벼슬을 지냈고 호는 팔송(八松)이며, 모친 정부인(貞夫人)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우계(牛溪) 선생 휘 혼(渾)의 따님이다. 선생은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온화하여 보는 사람마다 옥인(玉人)이라 칭송하였다. 숭정 경오년(1630, 인조 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계유년(1633)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한원(翰苑)의 직책에 천거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주서, 설서를 거쳐 정언으로 승진하니, 때는 병자년(1636) 가을이었다. 계사를 올려 화의론(和議論)의 잘못을 논박하였고, 예조와 병조의 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울에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묘당에서 척화신들을 잡아 보내어 오랑캐에게 사과하려고 하자 팔송 부군이 스스로 일어나 잡혀가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상소를 올려 대신 갈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 어떤 이가 이를 막아 주어 둘 다 면할 수 있었다.
상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다시 병조의 낭관이 되었으며, 정언, 수찬, 교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무인년(1638, 인조 16)에 순검사(巡檢使)의 종사관으로 삼남 지방의 수군을 돌아보았고, 기묘년(1639)에 팔송 부군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은 후에는 금산(錦山)의 산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수찬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 제천 현감(堤川縣監)에 부임하였고, 을유년(1645)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병술년(1646)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선생이 이를 미리 알고서 사람을 시켜 관청에 고발하여,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는데, 사양하였으나 면하지 못하였다.
무자년(1648, 인조 26)에 모친 성 부인(成夫人)의 상을 당하여 부친상 때와 마찬가지로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두 번에 걸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왜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중외에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선생이 서울로 들어가 사은숙배를 하고 임지로 떠났다. 동래에 도착하자 학교를 수리하고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고 충렬사(忠烈祠)를 중건하여 은연중에 그곳을 보장(保障)의 땅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간악한 자들에게 휘둘려 의금부의 취조를 받고 삭탈관직이 되었다.
선생이 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에 지녔던 뜻을 지켜 나갔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가 청렴결백하고 욕심이 없는 인물로 선생을 천거하여 왕명으로 특별 서용되었다. 승지, 호조 참의, 형조 참의, 공조 참의,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갑오년(1654, 효종 5)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자 선생이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죽은 아비 신(臣) 황(煌)이 선대의 조정에서 정묘년(1627, 인조 5)부터 정축년(1637, 인조 15)까지 시종 척화(斥和) 한 가지 주장만을 펴서 무덤으로 들어갈 때까지 바꾸지 않았고 어리석은 신이 망녕되이 아비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혹시라도 조정에 사신으로 갈 사람이 부족하여 신을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으로 의망한다면, 일에 임하여 구차하게 회피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상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이요 그렇다고 그 일을 맡자니 아비가 지켜 온 원칙에 위배가 됩니다.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죽은 아비를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하니, 효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체차되어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또다시 사양하였다. 이해 겨울에 갑자기 말질(末疾)에 걸려 경기의 별서(別墅)에서 호서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한결같이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였는데, 대사간, 이조 참의, 대사성, 부제학에 연이어 제수되었고, 또 왕명으로 내의원에서 약물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기해년(1659, 효종 10)에 효종이 승하하자 선생이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 궐문 밖에서 곡을 하였다. 현종이 즉위하자 사관(史官)을 보내 위유하고 대사헌으로 승진시켰으나 선생이 감당할 수 없어 누차 사양한 끝에 체차되었다. 하지만, 상이 워낙 열심히 만류하는 바람에 곧바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듬해 경자년(1660, 현종 1)에 국상(國喪)의 소상(小祥)이 지난 후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마침내 상소를 남겨 두고 돌아왔다. 그 이후로 더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 시기 동안에 대사헌에 15회, 대사간에 3회, 이조 참판에 5회 제수되었으며, 그 사이사이로 동지경연사와 세자 빈객으로 부르기도 하고 또 연이어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하며 혹 구언(求言)을 하기도 하였으나 선생은 매번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임자년(1672, 현종 13) 10월 28일에 선친의 묘소 아래에 있는 집에서 별세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특별히 이조 판서로 추증하고 초상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과 묘소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일꾼을 지급하였다. 계축년(1673) 2월에 이산현(尼山縣)의 치소 남쪽 갈산(葛山)의 갑향(甲向)의 언덕에 안장하니, 북쪽으로 팔송 부군의 묘소와 10리나 떨어져 있다.
세계(世系)와 선조의 덕행에 대해서는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상세히 실려 있어 생략한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독실하였고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아 내면의 세계에 마음을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보존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고 외물을 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진실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고 조금도 가식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신독(愼獨)과 수약(守約)의 공부를 나이가 들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아 덕이 높아질수록 예는 더욱 공손하였고, 몸을 낮출수록 도는 더욱 높아져 밖에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빛을 발하였다. 덕행과 도량을 하늘로부터 타고났으며, 장중하고 과묵하여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기에 두려운 마음을 갖게도 했지만 진정으로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어진 마음이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평소에 워낙 겸손하여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할 듯이 하였으나 가슴속에 간직한 생각은 누구보다 굳건하여 한번 시작하면 망설임 없이 시행하였다. 조용히 있으면서도 모든 활동들을 제어하였고 총명하면서도 위엄을 지녀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하는 일마다 거침없이 밀고 나갔다. 효우(孝友), 충신(忠信), 정직(正直), 청검(淸儉)의 덕목은 바로 선생이 실제로 실천한 것들이다.
마음과 도량이 넓고 넓어 덕이 자신에게 쌓여 가고 재주가 남들에게 널리 알려져도 일찍이 자만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선행을 좋아하고 의로운 행동을 즐겨 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복식과 거처 등 몸을 보호하는 것들과 명예와 이익 같은 사리사욕, 문장을 짓는 말단적 재주, 외부 사람들로부터 받는 총애와 모욕 등, 이 모든 것에 대해 담담하게 대처하여 마음에 두지 않았다.
팔송 부군의 상을 마친 뒤에 더 이상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중간에 제천(堤川)과 동래 두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한 것은 아마도 나름의 뜻이 있었을 것이다. 효종이 말년에 기어이 다시 나오게 하려 하였고 조야에서 실로 재상감으로 기대를 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한결같은 마음만은 자나 깨나 잊지 않았으며, 시대를 걱정하고 세상을 근심하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때로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선생의 행동거지 가운데 중요한 것이다.
아, 선생은 몸소 덕행을 쌓았으나 공업(功業)을 펼치지 못하였고,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과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올바른 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앞서 고생만 하고 나중의 즐거움을 맛보지는 못했으나 평생 겸손한 태도로 지냈다. 이는 한편으로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운명대로 살아간 것이다. 너무도 슬픈 일이다.
정부인(貞夫人) 평창 이씨(平昌李氏)는 선교랑 전(瑑)의 따님이요, 이조 판서 익평공(翼平公) 계남(季男)의 6대손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여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시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공경으로 섬겼으며, 친척들과 함께 있을 때는 순종과 사랑으로 대하였고 자녀를 기를 때는 사랑과 교육을 병행하였다.
제사를 정성껏 지냈고 누에치기와 길쌈을 부지런히 하였으며 집안에서의 행실이 모두 여칙(女則)에 맞았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태어나 17세에 선생에게 시집왔고 선생보다 20일 앞서 별세하여 같은 무덤에 안장되었다. 아들 셋에 딸 다섯을 두었다. 장남 단(摶)은 행실이 훌륭하였으나 불행히도 상복을 벗은 이듬해에 뒤따라 죽었다.
둘째 아들 원(援)은 요절하였고, 막내아들은 륜(掄)이다. 장녀는 별좌 이순악(李舜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현감 최세경(崔世慶)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별좌 이옹(李顒)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사인 심해(沈楷)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유명흥(兪命興)에게 시집갔다.
장남 단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은교(殷敎)와 주교(周敎)이고,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막내아들 륜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의화(李宜華)에게 시집갔다. 외손으로 아들딸 20여 명이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년 뒤인 정사년(1677, 숙종 3)에 아들 륜이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우고 나에게 그 뒷면의 글을 써 달라고 하였다.
오호라, 선생에게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덕행과 시행되지 않는 공덕이 있어 벼슬아치들은 그 의리에 심복하고 유생들은 그 교화를 칭송하였으며, 심지어 종족과 향당 사람들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백대 뒤에도 필시 그 소문을 듣고 지속적으로 받들고 그리워할 것이니, 소자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한마디 말을 놓을 수 있겠는가. 삼가 그 대략만을 기술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의 의관이 묻힌 자리가 여기임을 알게 하는 바이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최채기 (역) | 2008
-------------------------------------------------------------------------------------------------------------------------------------------------------
[原文]
叔父參判府君墓表 丁巳
先生姓尹氏。諱文擧。字汝望。考諱煌。官大司諫。號八松。妣貞夫人昌寧成氏。牛溪先生諱渾之女。先生以萬曆丙午生。幼沈靜溫潤。見者稱爲玉人。崇禎庚午。中生員。癸酉登第。被翰苑薦。固避不就。由注書,說書。陞正言。時丙子秋也。啓論和議之非。移禮,兵曹佐郞。冬扈駕入南漢山城。廟議欲執送斥和臣以謝虜。八松府君自奮請行。先生上疏乞以身代。適有救者。得俱免。上還都。復兵郞。連拜正言,修撰,校理。並辭戊寅。以巡檢使從事。按行三南舟師。己卯。丁八松府君憂。廬墓三年。服闋。卜居于錦山峽中。以修撰召。不赴。癸未。赴堤川縣監。乙酉。棄歸。丙戌。有潢池之變。先生先知之。使人告官捕殄。以勞陞通政階。辭不能免。戊子。丁成夫人憂。廬墓如前喪。服闋。再除承旨。辭。除東萊府使。時倭情異常。中外憂危。先生入京。謝命赴任。旣至。繕學校。撫兵民。新忠烈祠。隱然爲保障計。未幾。爲奸究所搖。就勘奪職。先生仍復還鄕守初。白江李公敬輿。以廉潔守靜薦先生。命特敍。連拜承旨,戶刑工曹參議,慶州府尹。皆辭。甲午。拜吏曹參議。先生上疏辭。略曰。臣父故臣某。在先朝。自丁卯至丁丑。終始執乎一義。至入地而不化。臣誠愚騃。妄襲父論。今或値朝廷乏使。擬臣於燕价。則臨事苟避。分義不敢。欲遂承當。有違父道。將何面目。復見亡父於地下。此臣所以甘心自廢。而不知反者也。孝宗優容之。遞拜大司諫。又辭。是冬忽得末疾。自畿莊舁歸湖西。自此一以病辭。連拜大司諫,吏曹參議,大司成,副提學。又命內局。賚以藥物。己亥。孝宗昇遐。先生自載入京。哭于闕門外。顯宗嗣位。遣史官慰諭。陞拜大司憲。先生不敢當。三疏辭遞。以上勉留勤至。不敢徑歸。明年庚子。過國練。上疏乞骸。不許。遂留疏而歸。此後不復動矣。拜大憲者十五。大諫者三。吏曹參判者五。間以同知經筵世子賓客召。又連降別諭召之。或乞言焉。先生每拜疏辭謝。壬子十月二十八日。考終于先墓下齋舍。訃聞。特贈吏曹判書。給喪祭需及助墓役夫。以癸丑二月。葬于尼山縣南葛山甲向之原。北距八松府君墓十里而遙。世系先德。具載其神道之碑焉。先生資稟篤實。而受訓家庭。專用心於內。故自存諸中。以至行於身。而接於物者。一以眞誠爲本。無一毫外假之意。愼獨守約之功。老而匪懈。德愈崇而禮愈恭。身益卑而道益尊。輝光發外。有不可掩者。德器天成。凝重寡默。人望而畏之。然仁心懇惻。藹如也。平居退讓。若斷斷無他。而中蘊陽剛。發無疑難。靜而制動。明而有威。事無大小。遇之沛然。孝友忠信。正直淸儉。乃先生之實行也。心量洪曠。雖德積於己。才周於物。而未嘗有矜喜色。好善樂義。唯日孶孶。至於服食居處奉身之物。與夫名利之私。文詞之末寵辱之外至者。擧泊然不以爲意。自八松府君喪畢之後。無復有當世之志。中間有堤川東萊二行。則蓋亦有義也。孝宗末年。必欲強起之。朝野實歸以公輔之望。而先生竟不出。然憂國一念。食息不忘。愍時病俗。畏天悲人。有時通昔不寐。此又先生行止之大致也。噫。先生德行在躬而業未展。經綸充養有道。而壽未躋期頤。有先憂無後樂。而沖挹以終身一係於時。一存乎命。嗚呼痛哉。貞夫人平昌李氏。宣敎郞瑑之女。吏曹判書翼平公季男之六世孫也。性端正安和。事父母孝。事舅姑誠。事君子敬。處族姻順。以愛養子女。慈以敎。愼於祭祀。勤於蠶縷。閫內之行悉合。女則生於丁未十七歲。歸于先生。先先生二十日而卒。同塋而葬。三男五女。男長曰搏。有至行。不幸外除。逾年繼歿。次援夭。季掄。女長適李舜岳。別坐。次崔世慶。縣監。次別坐李顒。次士人沈楷。季兪命興。摶有二子。曰殷敎,周敎。二女皆幼。掄一女。壻曰李宜華。外孫男女二十餘人。先生卒後六年丁巳。掄豎石墓前。使拯識于其陰。嗚呼。先生有不顯之德。有不運之功。搢紳服其義。章甫誦其化。以至宗族鄕黨。莫不愛而敬之。雖百世之後。必將聞風而宗慕之不衰矣。小子何敢置一辭於其間。謹泣記其梗槩。俾後人知先生衣冠之藏在是云。<끝>
ⓒ한국문집총간 |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