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교(鄭以僑`1449~1498)의 봉계 입향 후 김천 영일 정씨(迎日 鄭氏) 문중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정이교와 그의 아들들이 당대에 모두 과거에 급제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이후 정씨 문중은 가솔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인 서당(書堂)을 세운다. 영일 정씨 문중 서당은 1540년(중종 35년) 현 봉계초등학교 앞에 세워졌던 도장(道藏) 서당이 그 원류다. 도장 서당은 100년 후 인종 조에 평전으로 옮겼다가 1757년(영조 33년) 현 위치로 옮겨 봉암(鳳巖) 서당이라 했다.
영일 정씨 문중에서 많은 선비를 배출해 문명을 떨친 것은 이 문중 서당이 큰 몫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영일 정씨 입향조 정이교와 봉암 서당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을 떨친 사노숙, 왜군에 맞서 목숨으로 정절을 지킨 정유한의 처 영천 이씨 등 정씨 문중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 보자.
◆유자(儒者)의 본분을 지킨 정이교
정이교는 1468년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고 147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해 문명(文名)을 얻었다. 1486년 이조정랑으로 중시(重試)문과에 또다시 급제해 통정대부 사헌부장령(정4품), 홍문관 교리(정5품) 등을 역임했다.
정이교는 연산군 시절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와 관련해 직언하다가 임금의 미움을 샀다. 연산군은 궁궐 내에 폐비 윤씨의 사당을 설치해 신주를 모시겠다는 어명을 내렸다. 많은 벼슬아치가 임금의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정이교는 폐비를 위해 궁궐 내에 사당을 세우는 것은 유교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사당과 신주를 모시는 일을 철회해 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이교의 이런 발언은 사헌부 지평을 지낸 신복의가 어명을 거역하는 정이교를 경직(京職)에서 제외하고 외직(外職)인 함흥 군수를 제수해야 한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이런 논란 속에 1498년(연산군 4년)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유자광(柳子光`1439~1512)의 무고로 많은 선비가 참살되자 정이교는 이를 참지 못하고 다시 연산군에게 직언했다.
"한쪽 말만 듣고 함부로 인재를 제거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정이교의 극간(極諫)은 연산군의 분노를 샀고, 결국 정이교는 1498년 8월 함흥 군수로 좌천됐고 그해 12월 함흥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정이교의 선비 정신은 평소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년),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 이원례 등 경상도 내 김종직 학통 동료들과의 학문 교류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진주 촉석루에서 금란계(金蘭契)를 맺었다. 금란계 수계 현판은 지금도 촉석루에 걸려 있다.
사화의 바람이 불어닥쳐도 두려워 않고 목숨을 건 직간을 서슴지 않은 정이교를 두고 후대는 "유자의 본분을 지켰다"고 평했다.
정이교의 장남 정공징은 한성부서윤을, 차남 정공건은 사복시첨정을, 3남 정공필은 무과 급제 후 통정대부로 영암 군수를, 4남인 정공청은 영산 현감을, 5남 정인후는 찰방 벼슬을 각 역임했다.
◆정씨 문중을 크게 일으킨 사노숙(四老宿)
봉암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중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던 정내신(鄭?臣`?~1580)의 아들 4형제는 모두 문명을 크게 떨쳤다.
이들 형제와 학문을 교류한 주변에서는 정씨 문중의 4형제를 일컬어 사노숙이라 칭했다.
정내신의 장자 정유번(鄭維藩`1562~1639)은 1601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05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정유번은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 선조의 후사로 광해군을 옹립하려 하자 “왕통은 적손이어야 한다”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좌천돼 외직을 지냈다. 인조반정 후 그의 주장이 정당함이 입증돼 1613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정유번의 이런 강직한 성격은 병자호란 후 오랑캐의 연호를 쓰게 된 것을 치욕으로 여겨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기개로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문집으로 유옹집이 전한다.
사노숙의 둘째 정유한(鄭維翰`1568~1640)으로 효와 충을 실천한 선비였다. 그는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한겨울에 빈소 옆을 떠나지 않아 열 손가락에 모두 동상을 입었다. 당시 인근에서는 13세의 효자라 칭했다.
임진왜란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정유한은 동래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처자를 두고 거꾸로 어머니를 모시러 적진으로 내려온 일화가 전한다. 어머니를 공자동으로 피난시킨 정유한은 봉암 서당을 본거지로 25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개령에 진을 친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기 위한 원정을 도왔다. 당시 정유한은 관군과 힘을 합해 적을 입석 판교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정유한은 전쟁이 끝난 1599년에도 굶주린 백성을 돕고자 곡식을 황간진으로 보내고 자비로 일꾼과 말을 구해 용산대창에 군량미를 수송하기도 했다.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해 난을 평정하는 데 나서기도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문경의 군량 공급에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110일간의 일기인 고금사적(古今事蹟)이 있다. 또한 정유재란 때 정유한은 처(영천 이씨)가 왜군에게 붙잡혀 정절을 지키려다 은장
도로 자결하는 비운은 맞기도 했다.
셋째는 정유성(鄭維城`1569~1645)으로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학통을 이었다. 스승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지지하는 비변책을 상주했으나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운을 어쩌랴"고 통탄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정유재란 후에는 형 정유한과 함께 군량미를 마련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이런 활동을 두고 세간에서는 비변신통승의랑(備邊神通承議郞)이라 일컬었다.
사노숙의 막내는 정유원이다. 정유원은 당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으나 형들과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 이들 4형제는 봉암 서당을 근거로 학문을 닦아 주변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목숨으로 정절을 지킨 영천 이씨
"섬나라 도적이 감히 군자국의 유부녀를 희롱하려 하느냐!"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준엄하게 꾸짖는 부녀자의 기상에 그녀를 희롱하던 왜군들은 멈칫했다. 그 서릿발 같은 질책에 주눅이 든 것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남편 정유한은 선전관으로 출정했고 부인 영천 이씨는 왜군이 명나라 군사에 쫓겨 충청북도 괴산 방면에서 김산군 방향으로 내려온다는 말에 동서와 함께 흑운산으로 피란을 가다 왜군과 맞닥뜨렸다.
왜군은 젊은 부인을 보자 납치해 욕을 보이려 했다. 사력을 다해 항거하던 영천 이씨는 이들에게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희롱하던 왜군들을 향해 분노의 일갈을 내뱉은 영천 이씨는 은장도를 꺼냈다. 그리고는 왜군의 손이 닿은 젖가슴을 연거푸 칼로 찔렀다. 영천 이씨가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당황한 왜군들은 일본도로 영천 이씨의 시신을 난도질해 발로 밟고 시신을 사방에 흩어버렸다.
이 참상을 마을 사람 조홍이 숨어 목격하고 동민들에게 알렸다. 당시 영천 이씨의 나이는 28세였다.
이런 영천 이씨의 기개는 곧 조정에 알려졌고 유림의 상소를 받은 조정은 1633년(인조 11년) 정려를 내렸다.
이후 현 봉계초등학교 뒤쪽에 영천 이씨의 정려비와 정려각이 세워졌다. 정려각 앞에는 우물을 파 이 우물을 이용하는 마을 부녀자들이 영천 이씨의 정절을 본받게 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이 우물을 현지 주민들은 '빗찌걸 샘'이라고 부르는데, '비(碑)+집(閣)+거리(道)+샘'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공동기획 김천시 (김천시 마크 넣어주세요)
<참고문헌>
김천시사
김천 종가문화의 전승과 현장(민속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자문>
정금기 영일 정씨 교리공파 대종회장
정창화 영일 정씨 교리공파 사무총장
정환민 영일 정씨 교리공파 13세손
정영갑 영일 정씨 교리공파 16세손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영일 정씨 문중의 문화재
▶봉암서당(鳳巖書堂)
김천 영일 정씨 문중의 배움터인 봉암서당은 봉계마을(현 봉산면 예지1리) 가운데 있다. 봉암서당의 대문과 작은 문은 각각 인파문(仁播門)과 의수문(義收門)이라 불리는 데 이는 영일 정씨 교리공파의 종훈 중 인파의수(仁播義收)라는 마지막 구절을 가져와 사용한 것.
인파란 '어진 것을 심는다'란 의미이며, 의수는 '의롭게 거둔다'는 의미다. 1천652.9㎡(약 500평) 부지에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마루의 천장에 '숭정 기원 후 3정축 2월초 2일 상량'(崇禎 紀元 後三丁丑二月初二日上樑)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1757년에 각곡으로 이전했을 때의 것을 그대로 1895년 중수 때 쓴 것으로 보인다.
2011년 정씨 문중에서 서까래를 교체하고 기둥 등은 그대로 사용해 원형대로 중수했다.
▶영천 이씨 정려비(永川李氏 旌閭碑)
정유재란 때 왜군의 능욕을 피해 절개를 지키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유한의 처 영천 이씨를 기리는 정려비는 2000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87호로 지정됐다. 28세의 나이로 자결한 이 씨 부인(1570∼1597)에게 나라에서 내린 정려비는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비신(碑身)과 좌대(座臺)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 앞면에는 3행으로 '절부 정유한 처 유인 영천 이씨 지려 숭정칠년갑술삼월일'(節婦鄭維翰妻孺人永川李氏之閭崇禎七年甲戌三月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정려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옆면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박공널을 달았고 자연석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웠다. 신현일 기자
종소(從韶) -- 이휘(以揮) 牧使
이교(以僑) 校理(정5품) 육군대장 昇和 門
이심(以諶) 持平(정5품)
첫댓글 사성공(휘 종소)의 둘째 아드님이신 교리공(휘 이교)의 세거지인 봉계마을의 봉암서원 이야기 등 좋은 자료를 찾았구나!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