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소리 없이 다가왔지만, 농익은 단풍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 단풍을
기다리자니 조바심이 나 가을바람이 서걱대는 곳으로 간다. 충남 보령 오서산
억새 군락지다. 억새 군락 너머, 황금 들녘과 서해안을 물들이는 노을은 덤.
장항선 열차에 몸을 싣고 가을 속으로 성큼 들어갔다.
장항선 열차 타고 억새 물결에 풍덩!
단풍 소식이 들려오는 이맘때 은빛으로 한들거리는 억새도 여행자를 유혹한다. 충남
보령, 홍성, 청양에 걸쳐 있는 오서산은 10월 초부터 억새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경기 포천시 명성산, 강원 정선군 민둥산, 전남 장흥군 천관산, 울산 울주군 사자평
억새길과 더불어 전국 5대 억새 명소로 꼽힌다. 오서산 능선에 순하게 펼쳐진 억새
군락은 보령8경 중 하나다. 멀리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 외연열도의 풍경까지
품었으니 능선에 오른 순간 보령8경 절반의 비경을 한 번에 보는 셈이다.
오서산은 평야가 대부분인 서해안에서 보기 드물게 높은 산(해발 790m)이라
서해 바닷길의 등대산으로 통한다. 발아래 풍경이 유독 장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바다가, 동쪽으로는 홍성과
청양 일대의 들판이 질펀하게 펼쳐진다.
가을 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면 느릿느릿 무궁화호를 타고 오서산
에서 가장 가까운 청소역으로 가길 권한다. 아담한 대합실에는 벤치 하나
달랑 놓였지만 이래봬도 장항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유난히 폐역
이 많은 장항선에서 80여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청소역은 대한민국 근대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플랫폼에 서면 멀리 오서산의 완만한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푸른(靑) 곳(所)'이라는 이름답게 철길 너머 보이는 풍경이 온통
숲이고 하늘이다. 가을볕이 드는 간이역에 잠깐 멈춰 한가로운 정취를 느껴
보는 것도 좋겠다. 청소역 앞에는 등산객을 기다리는 택시가 상시 대기 중이다
. 10~15분이면 오서산 들머리인 성연주차장이나 오서산자연휴양림에 닿는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숲길
오서산 억새 군락지로 가는 들머리는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의 상담주차장,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의 성연주차장, 청라면 장현리의 오서산자연휴양림
등이다. 오서산 정상까지 가장 짧은 시간에 이르는 길은 오서산자연휴양림
코스다. 휴양림에서 하룻밤 머물며 쉬엄쉬엄 오르내리기 좋다. 관리사무소
에서 월정사 방면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 가장 빠르지만 산림문화휴양관 왼편
의 숲체험로에서 월정사로 이어지는 길이 더욱 운치 있다. 숲체험로에서
오서산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단축 코스인 만큼 경사가 제법
가파르니 여유 시간을 두고 오르는 게 좋다. 숲체험로는 완만한 흙길이다
. 서어나무, 고욤나무, 팽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
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아직 초록색이 만연하지만 밤송이와 낙엽이 쌓여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20분쯤 오솔길을 지나 목탁 소리가 가까워질
때쯤 월정사에 닿는다. 작은 암자 곳곳에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월정사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양옆으로 늘어선 소나무 숲이
호젓한 분위기를 뽐낸다. 이따금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가을의 길목을
알린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고 삼거리가 나오면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15분 정도 가파른 길을 올라 숨이 꼴깍 넘어갈 때쯤, 정상까지
700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마지막 관문인 철제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시야가 확 트인다. 맞은편 성주산 줄기 아래 황금 들판이 시원
하게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청양군 화암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을 들녘처럼 풍요로운 바람이 온몸을 관통한다. 나풀거리는
억새도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맛보기다.
가을바람이 머무는 황금빛 억새 능선
능선에 올라 통신중계탑이 보이면 오서산 정상이 코앞이다. 여기서부터
억새가 우거진 능선길이 약 2km 이어진다. 오솔길 양옆으로 키 만큼
자란 억새가 호위하듯 길을 터주고, 매서운 바닷바람에 쉴 새 없이
물결치는 억새 군락이 장관을 연출한다. 10월 초부터 피기 시작하는
억새는 10월 중순부터 더욱 희고 풍성한 꽃을 피워내며 절정에 이른다.
오서산에서 억새 못지않게 유명한 볼거리는 이맘때 황금 들녘 뒤로
저무는 낙조다. 낮 동안 은빛으로 반짝이던 억새는 저녁 무렵 황금빛
으로 물든다. 정상 비석에 새겨진 글귀처럼 "온갖 시름에서 벗어나
황홀경을 맛볼 수 있다"는 풍경이다. 단, 가을철에는 해가 짧아 하산
길이 위험하므로 되도록 빨리 내려가는 편이 좋다.
들판 너머로는 보령방조제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강줄기도 한눈에 보인다
.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 점점이 떠 있는
외연열도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아득한 풍경에 종종 까마귀가 날아들기도
하는데, 오서산이라는 이름은 예부터 까마귀가 많이 서식한 데서 유래했다.
육지와 한참 떨어진 외연도에서 바라보면 산이 검게 보여 오서산이라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 더욱 극적인 풍광을 원한다면 정상에서 1km 정도
능선을 따라 오서정까지 가보길 권한다. 너른 전망
데크가 놓여 있어 휴식을 취하기도 좋다.
자연휴양림으로 돌아간다면 하산길은 정상 근처의 공덕고개 이정표 방면으로
잡으면 된다. 자연휴양림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월정사 방면에 비해
경사가 완만해서 한결 편하게 내려갈 수 있다. 여유가 있다면 오서산자연
휴양림에서 하루 묵어가도 좋겠다. 명대계곡을 끼고 울창한 숲속에 자리해
있어 호젓하게 머물 수 있다. 숲속수련장 뒤편의 대나무숲길과
숲체험길은 아침 산책을 하기 좋다.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