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사람들은 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면서 큰소리를 치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큰소리는커녕 찍소리도 못하게 됐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겪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말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라는 책을 보면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전투 부상으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발생한 세균에 희생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밀집된 곳을 좋아하는데, 우리는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점점 더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으니, 균들은 늘 사람들 곁에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하지만 적(?)을 파악하고자 해도 정작 그들은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미물이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열심히 사는 것은 기본이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다양한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살아야 하니, 내 안에 어떤 능력을 길러야 이 시대를 살아 낼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운동해서 몸 온도를 높이고 면역력을 증가시키는 일뿐인 듯하다.
요즘 사회적 관계가 줄면서 컴퓨터를 통해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을 보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최근 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바다에 사는 문어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남아프리카의 바닷속을 찍다가 우연히 문어를 만나서 친구가 되는 그 모든 과정을 담은 것인데 제목은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이다.
내가 문어를 처음 본 것은 몇 해 전 정월 전남 완도의 전복 가두리양식장에서다. 그때 양식장에서 전복을 가두어 둔 틀을 들어올렸는데 전복의 주 먹이는 놀랍게도 다시마였다. 비싼 전복을 먹을 필요 없이 다시마만 먹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켜켜이 쌓인 다시마 틈 사이로 문어가 전복을 먹고 있었다. 현지인 말에 따르면 완도에서는 전복보다 문어를 더 귀한 음식으로 친다고 했다.
문어는 단백질이 풍부해서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계절 별미인데 안동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문어를 제사상에 올린다.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 문어를 제사상에 올리는 이유가 있다. 문어의 문자가 글월 ‘문’(文)이어서 왠지 해물 중에서도 똑똑할 것 같아서 올린다는 것이다. 문어는 실제로 똑똑한 해물일까? 2020년에 나온 그 문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니 확실히 문어는 지능이 좀 높은 것 같다.
다큐멘터리 속 문어는 평화로운 바다에서는 유유자적하게 물살을 가른다. 내가 생각하던 문어는 딱 여기까지만이었다. 그 다음부터 문어는 다양한 개인기를 보여 준다. 바위 아래에 숨어 두 눈만 내놓고 바깥 세계를 살피더니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지 몸 전체를 영지버섯처럼 만들고, 두 발로 바쁜 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위급한 상황이 생겼는지 몸을 동그랗게 만들어 바다풀 속으로 숨기도 했다.
상어가 공격해 오자 상어를 피해 바위 속에 숨어 있다가 다리 하나를 뜯기자 이내 반격에 나선다. 문어의 빨판에 각종 다양한 조개껍질을 고정해 자신을 조개껍데기 모양의 둥근 물체로 만들어 놓으니, 상어가 문어를 한입에 넣으려 해도 넣을 방법이 없다. 상어가 문어를 포기하는 순간 문어는 상어의 등에 올라타 상어 등에 빨판을 고정해 오히려 상어를 공격한다.
문어의 눈에 게가 보인다. 문어는 차렷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눈으로만 게의 움직임을 살피더니, 게가 가는 방향을 확인한 후 전속력으로 게를 향해 돌진했다. 잡히지 않으려고 전속력으로 도망가는 게와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문어의 한판 대결이 벌어진다. 문어가 몸을 넓게 펴서 도망가는 게를 뒤에서 바로 보쌈을 해 버리니 게로서는 집게발 한번 써 보지도 못한 채 항복하고 만다.
문어가 노리는 먹이는 게뿐만이 아니다. 게보다 몇 배나 더 큰 바닷가재도 문어를 만나는 순간, 문어의 성찬이 되고 만다. 문어 다큐멘터리를 열 번 스무 번 다시 보기를 계속하면서 이름값 하는 대서(大暑) 더위를 떨쳐 낸다. 그러면서 나는 내 안에 어떤 역량을 쌓아야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 낼 수 있을지 생각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