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도착한 오바마는 서류에 오바마 라고 서명 했다 이것을 보고 직원은 오바마 박사 집안이냐면서 아버지를 뵌적이 있으며
존경받을 인물로 그의 죽음을 애도 한다는 말에 오바마는 처음으로 자기 이름에 값어치를 느끼며 편안 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름이 그의 뿌리 였고 이름이 그의 소속을 말해 주는구나 생각하니 오랫동안 길을 헤매다 드디어 목적지를 찿아낸 기분 이었다
공항에 고모와 아우마 누나가 나와 있었다 집에 도착 하니 아버지의 첫째 부인 은 " 내 아들이 집에 와 주었구나 ! " 라고 했고
이복형 로이등 형제들과 친척들도 그를 많이 그리워 했다며 상상 하던것 보다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오바마와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키스뮤로 걌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묻혀 있는 그곳에는 할머니가 계셨고 삼촌들도 살고 계셨다 아버지의
흔적을 찿기위해 할아버지와 아버지 유품을 찿아 보던중 " 오바마는 조국의 발전에 헌신 하겠다는 열정을 품고 있슴니다 최소한
1년 만이라도 기회를 주어야 마땅 하다고 생각 함니다 " 라는 글을 보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유산으로 생각되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와 불만, 부끄러움 같은것들이 눈물에 씻겨 가는것 같았다 그제야 이해 할수 있을것 같았다 세계
최고의 교육을 받은 아버지가 왜 아내와 어린 아들을 뒤로 하고 케냐로 돌아갈수 밖에 없었는지, 왜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면서 케냐 정부와 맞섰는지? 아버지는 모두 함께 잘사는 케냐 조국을 그리면서 자신의 손으로 그 꿈을 이루려 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는 뜻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모든게 정리 되는듯 마음의 평정이 찿아 왔다 아우마 누나가 조심 스럽게"케냐를 여행하고 가족들을 만나니 어떠냐 ? " 고 묻자 " 의미가 많았다 가슴 깊숙이 품고 있던 의문들이
많이 풀렸고 또 그만큼의 궁금증이 든다 " 했다 오바마는 미국으로 돌아가 해야할 일들에 대한 자신감과 사명감이 생겼다 케냐에서 돌아온 오바마는 법을 공부 하기로 결심 했다 입법과정, 기업합병,기업과 은행의 밀착 방식, 부동산, 벤처 사업가 들의 성공
또는 실패의 요인, 권력의 속성 등을 알고 싶어 했다 예일 대학 스탠포드 하바드 등에 원서를 냈고 그들 학교에서 입학 허가서를
받고 그중 하바드 대학교를 선택 했다 스물일곱살에 하바드 로스쿨에 입학 했다 그는 하바드 로 리뷰의 촉망 받는 40인중 한명이
되었고 최초의 흑인 편집장이 되었다 로스쿨은 2년제 였다 뉴욕 타임즈는 " 하바드 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흑인 편집장이며 이는
104년만의 쾌거 " 라며 그의 위상을 예사롭지 않게 주목 했고 이 사실은 국제적 화제가 되었다 펀집징이 된다는 것은 미국 사회의 최고 주류 집단에 속하는 동시에 그가 사는곳 어디서나 사회적 존경이 보장된 개인의 영광이며 스팩이 되었다 당선뒤 " 제가 당선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진보를 보여 주는것 임니다 자신감이 생김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모든 흑인에게 똑 같이 일어 나는건
아님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기억 해야 함니다 저와 같은 수백, 수천명의 흑인 학생들이 같은 재능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그들
에게 똑 같은 기회가 주어 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 임니다 " 라고 말해 기쁘면서도 곳곳에 남아 있는 인종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다양한 성향을 가진 편집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분열과 대립을 조정하는 일등이다
하바드 로 리뷰의 편집장은 연방법원에서 1년 동안 일해야 하고 연방 대법원의 일원으로도 활약 해야 했다 1991년 수석으로 졸업 했다 뉴욕의 매체들이 앞 다퉈 서른살이 체 안된 오바마에게 자서전을 출간 하자고 했다 세간의 이목을 끈 출발점 이었다
오바마는 편집장이 되기전 그러니까 로스쿨 1년을 보내고 여름에 시카고에 있는 대형 법무법인 "시들리 & 오스틴 " 에서 준
변호사로 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였다 그때 도움을 주고 받을 파트너를 소개 받았다 미쉘 로빈슨 이라는 젊은
여자 변호사 였다 3살 어리지만 하바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의 부인이다 오바마는 그녀의 첫
인상을 " 그녀는 키가 크고 멋진데다 다정하고 사랑 스러웠다 특히 전문가 다운 태도가 그녀의 맞춤 정장 불라우스와 잘 어울
렸다 " 고 했다 그녀는 시키고 남쪽 에서 성장 했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연예 오락산업 관련법을 전공했고 법무법인에서 지적
재산권을 담당하고 았었다 교제 한지 6개월 무렵 아버지가 별세하는 바람에 오바마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졸업후
1992년 시카고 에서 결혼 했다 이후 시카고 에서 투표자 10만명 이상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 했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민주당 주요 당원들과 시카고 에서 성공한 흑인 사업가 들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대형
법무법인에서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Love Call을 보내 왔지만 뜻 하는바 있어 민권과 저소득층 가정의 변호를 주로 맡는 " 마이너 반힐 & 갤러드 " 회사를 택 했다 세상에서 가치있는 일을 하는 유익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아버지의 못다이룬 꿈이라고 생각 했다 시카고 대학 로스쿨 에서 선임 강사로 1년간 헌법을 강의 하기도 했다 이때 " 헌법을 가르칠때 가장 멋진 점은 다루기 힘든 모든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는 검니다 낙태, 동성연애자의 권리 차별 철폐, 같은것 말이죠 그리고 양쪽 모두를 설득 할수 있어야 함니다 보수 성향의 대법원 판사뿐 아니라 상대방도 설득 할수 있어야 하죠 이건 정치에 도움이 됨니다 " 라고 했다 1996년 그의 나이 35세에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공석에 출마를 권유 받았다 유세중 많은 사람의 냉소적인 반응에 " 그런
회의감이 드는것도 이해 하지만 정치에는 다른 전통도 있슴니다 건국 당시부터 민권 운동에 이르는 동안 이어져 온 전통 말임니다 그 전통은 우리가 서로 이해를 주고 받는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분열 시키는 힘보다 하나로 결집 시키는 힘이 더 강함니다 이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 많다면 모든 문재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상당한 성과를 거둘수는 있슴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는 이처럼 단순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슴니다 " 이러한 유세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 일리노이주 민주당 상원으로 당선되었다 의원활동8년( 1997-2004) 동안 사법 지방자치 복지위원회 에서 근무 하면서 복지 관련 법률제정, 유아기 교육프로그램 확장, 소득에 따른 세금공제 관련 법등 으로 성과가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2003년 범죄자 취조 과정에서 비디오 녹화 필수화 법안을 통과 키켜 인간이면 누구나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 받아야 된다는 의지 표명을 보였다 당시 분위기 에서 혁신적
법안 이였기 때문에 주지사 까지 반대 입장을 보였지만 " 이법안이 수사 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물론 다시 변경 조치 해야 함니다 중요한 것은 억울한 범죄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것, 또한 죄를 짓고도 교묘히 빠저 나가는 경우가 없게 하는것 임니다 심문
녹화는 결백한 사람을 구할뿐 아니라 유죄를 선고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것 임니다 법안의 기본 목적은 자백이 강제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인식 시키기 위한 것 임니다 " 라고 했다 소속 정당의 기본 방침을 넘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양심 있는 이들에게 공감 할수 있는 법율임을 주장해서 초기 민주당 열세 입장에서 고전도 했지만 많은 법안은 공화당의 협조를 얻어 내는데 성공했다 임신중절 합법화 가족계획 총기사용 규제 등 예민하여 다른 의원들이 꺼려
하는 서민들에 관한것을 열정 넘치게 추진하며 핵심 인물로 부각 되었다 하지만 좌절도 있었다 2000년 민주당 하원의원 경선에서 패배한것( 상원으로 활동 하면서 미연방 하원의원이 되는것) 이다 이유는 상대가 워낙 거물급 경쟁력을 가진자 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싯점에 하와이 에서 가족 휴가를 즐겼다는 것이다 60 : 30 으로 패 했지만 이를 경험으로 자신의 반성과 성찰에 힘입어 얻은것 역시 적지 않았다 그해 오바마는 미 연방 상원 의원에 출마 했다 쟁쟁한 후보들이 많아 당선 예상순위 는
3,4위 였다 이때 이라크 침공을 두러싼 말들이 많았는데 이를 막아줄 연설을 부탁 받았다 부시 행정부에 정면 도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 확실한 명분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지 없이 이라크를 침공 한다면 중동지역 화약고에 불을 지르는 어리섞은 전쟁이 될것이며 성공적 이라 해도 미군의 주둔 비용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고 적대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 할것 " 이라는 요지의 연설로 인지도를 높혔다 그러나 문제는 선거 자금 이었다 지난 연방 하원출마로 인한 빛도 청산 하지 못한 상태에서 큰 벽을 너어야 했지만 포기 하지 않고 시카고의 재력가와 하바드 동문을 통하여 자금을 모았다 또한 교회 여성들을 상대로 자신의 이미지를 심어 나갔다 선거 결과는 52 % 이상의 지지율로 승리 했다 승리후 " 우리는 돈이 없었슴니다 조직도 없었슴니다 버락 오바마 라는 우수꽝 스런 이름을 갖인 남부출신 말라갱이 사나이가 이길거라 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슴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자리에 서 있슴니다 교외와 도시 남부와 북부 흑인과 백인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인 일리노이주 전역의 민주 당원과 소리 침니다 우리는 할수 있다 ! 우리는 할수 있다 ! 만약 오바마가 본선에서 승리 한다면 민주당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 지고 동시에 민주당내 유일한 흑인 상원 의원이 탄생하는 일이기도 하는 역사적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