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감동시킨 재즈 디바, 나윤선
(KBS 월드넷 글로벌 코리안 세계를 가다.) |
2006-11-29 | |
| |
|
|
|
|
| 재즈 디바 나윤선
나윤선의 목소리는 참으로 매혹적이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무엇인가 묵직하게 꽉 차있는 신비로운 느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나윤선은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진 한국의 대표적인 재즈보컬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지역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녀에게 재즈는 운명이었다.
운명이란 힘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재능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기 시작해 유럽이 그녀에게 주목하고 그녀는 이내 재즈의 깊은 매력에 빠져들었다. 재즈계의 디바, 나윤선은 강한 개성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세계를 감탄시켰다.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장장 3개월 간의 아시아-호주 투어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고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그 가능성을 확인받은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지난 11월 16일부터 10일까지 4일 동안 서울에서 공연을 했다. 이미 유럽의 수많은 페스티벌 무대에 섰고 아시아를 순회하며 굵직한 공연을 가져왔지만 한국에서의 공연을 준비하는 느낌은 그녀에게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가 선보인 공연의 제목은 ‘메종 드 윤선’으로 프랑스어인 ‘메종’은 ‘집’이라는 뜻으로 윤선의 집, 즉 윤선만의 공간이 이번 무대의 컨셉이다. 나윤선은 ‘그녀만의 공간’을 만들어 손님을 초대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재즈로의 입문
나윤선이 깊게 뽑아내는 음색을 듣다보면 지금 그녀에게 있어 재즈 보컬리스트만큼 딱 들어맞는 호칭도 없다. 하지만 노래를 시작하기 이전의 그녀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걷고 있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나윤선은 졸업 후 곧바로 한 의류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입사했다. 하지만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입사한지 1년도 되기 전에 회사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나윤선은 성악과 교수인 아버지와 뮤지컬 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듣고 자라 주위에서 인정하는 타고난 노래실력에도 불구하고 음악만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음악이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 나윤선의 대학 동기인 김정렬씨는 그녀에게 음악을 하길 끊임없이 권유했고, 그에 나윤선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본성은 이성을 이기지 못했고, 나윤선은 그렇게 음악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1994년 나윤선은 국내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락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오디션에 응모했다가 주인공 ‘선녀’로 발탁되는 행운을 안았다. 당시 그녀와 함께 연기했던 선배들로는 영화배우 설경구, 방은진씨 등이 있는데 그녀는 그들과 함께 연기하고 노래를 부르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예술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연이어 두 편의 뮤지컬을 하면서 그녀가 공연 무대에 익숙해질 무렵, 일본의 유명한 대형 뮤지컬 극단 ‘시키’가 나윤선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아닌 노래하는 가수이고 싶어서 스카웃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
|
|
|
프랑스 유학
1995년 당시 27살이던 그녀는 무작정 프랑스로 날아갔다. 20대 중후반으로 얼마든지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그녀는 낯선 곳으로, 미래에 대한 아무 담보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막연함과 두려움이 앞설 수도 있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프랑스 행을 결심했다.
프랑스 파리의 뒷골목에는 부드러운 재즈 선율이 흐르는데 재즈 매니아들이 즐겨 찾는다는 재즈바 ‘Duc des Lombaeds(뒥 데 롱바드)’ 클럽은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을 온 후 낯선 외국인들 앞에서 노래를 했던 의미있는 장소이다.
프랑스에서는 재즈바의 인기가 상당하다. 보통 재즈의 고장이라고 하면 흔히 미국을 떠올리기 쉽고, 재즈라는 단어만 들어도 뉴욕의 담배 연기 자욱한 클럽에서 재즈를 연주하는 흑인들이 자연스럽게 그려지지만, 사실 프랑스야말로 본고장에 버금가는 재즈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1년에 200일 이상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뮤지션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무궁무진한 나라다. 인종 차별도 미국보다는 훨씬 덜하기 때문에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프랑스로 대거 몰려와 이곳에서 재즈의 뿌리를 다시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는 재즈가 자유롭게 살아 숨쉬는 나라로 그녀는 프랑스에게 제대로 공부해서 노래하고 싶었다.
클래식보다는 샹송에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유럽 최초의 재즈학교로 명성이 자자한 CIM에 입학했다. CIM은 프랑스에서 최초로 생긴 음악 전문학교로 1976년에 설립됐다. CIM은 다양한 음악장르 중에서도 재즈 전문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실기에 중점을 둔 수업방식으로 재즈 가수와 음악인을 배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나윤선은 이곳에서 재즈 보컬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CIM에서 공부를 시작한 나윤선은 성실한 학생이었다. 27살에 발견한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마음먹은 그녀는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노력을 적절히 조화시켜가며 그녀 안에 재즈를 담고 소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윤선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할 때 CIM은 그녀에게 특별한 제의를 해왔다. CIM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재즈를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로 나윤선은 2000년 CIM 최초의 여자 동양인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윤선 나 퀸텟
CIM에서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음악 밴드를 구성하는 게 활성화되어 있는데 학교측에서 늘 개방해주는 연습실에는 밴드의 공연 연습이 끊이지 않는다. 오중창 또는 오중주를 의미하는 ‘퀸텟’은 보컬을 포함해 기타, 드럼, 건반 등 다섯 명으로 이뤄진 음악 밴드이다. 나윤선 역시 CIM에 재학할 당시 퀸텟을 만들었고 ‘윤선 나 퀸텟’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윤선 나 퀸텟’은 1996년 결성되어 파리를 근거지로 유럽과 한국에서 활동해왔다. ‘윤선 나 퀸텟’은 보컬인 나윤선을 리더로 해서 드럼에 Laurent Robin(로랑 로빈), 베이스 기타의 Yoni Zelnik(요니 젤닉), 비브라폰의 David Neerman(다비드 니어만), 그리고 피아노의 Benjamin Moussay(벵자멩 무세)로 이뤄져 있다.
재미삼아 만들어진 퀸텟은 우리가 상상하는 끈적한 재즈 느낌과는 다르게 두텁고 진한 소리 대신 수채화처럼 가볍고 투명한 연주를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영국 출신의 다비드 니어만의 곡은 팝 냄새가 물씬 풍겼고, 이스라엘에서 온 요니 젤닉은 히브리어 가사와 전통 선율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윤선은 한국의 소리를 담아 이들이 함께 하는 음악은 이국적인 향기를 뿜어냈다.
|
|
|
|
앙티브 주앙 레 뺑 페스티벌
‘윤선 나 퀸텟’은 이처럼 독특한 음악 색깔을 가지고 2005년 ‘앙티브 주앙 레 뺑 페스티벌'무대에 섰다. ‘앙티브 주앙 레 뺑 페스티벌'은 46년 전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유럽에서는 최고로 역사가 깊은 유명한 재즈 콩쿨 대회이다.
이 대회에서 수상을 하면 수많은 공연 단체로부터 초청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 정규방송에도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그야말로 인정받는 재즈 가수로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퀸텟 멤버들과 함께 과감히 콩쿨에 도전한 나윤선은 그녀 특유의 맑고 고운 창법과 독특한 음색으로 2005년 ‘앙티브 주앙 레 뺑 페스티벌'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나윤선은 대상을 받으면서 재즈 가수로서 이름을 더 널리 알리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미 2001년부터 첫 데뷔작 ‘Reflet(르플레)’발표 이후 국내외 재즈 팬들은 물론 모든 음악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듬해에는 2집 ‘Light For The People'은 퀸텟의 창작 정신을 담아 프랑스 현지에서 제작되어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창작곡으로 꾸며진 4집 ‘So I am'이 큰 인기를 끌며 프랑스 재즈 앨범차트 5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유럽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잡지 <르몽드>지는 장문의 기사를 통해 “환희가 사라진 음악세계에 나타난 매력적인 돌연변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아시아-호주 투어 콘서트
나윤선은 4집의 성공을 등에 업고 5집까지 발표하면서 멈추지 않는 재즈 여행을 계속했지만 유럽에서 뿐 아니라 더 넓은 곳에서 많은 관객과 함께 재즈를 호흡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녀가 계획한 것은 아시아-호주 투어 콘서트였다.
2006년 2월 말 일본 투어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호주, 중국, 대만 등 총 7개국 17개 도시에서 진행한 <나윤선 퀸텟 아시아-호주 투어 콘서트 2006>은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가로새기면서 그녀의 월드 리더급 아티스트로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해 부족함 없는 무대를 관객에게 선사했고 가는 곳마다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
|
|
|
메종 드 윤선
11월 16일 서울 용산 국립극장, 용에서 ‘메종 드 윤선’ 공연은 티켓 판매를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아 금새 매진되었다. 하직 한국에서는 유럽에서 만큼의 유명세를 얻지 못한 것 같았는데 공연 때마다 많은 대중을 몰고 다니는 그녀를 보면 분명 ‘비주류’ 재즈 가수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공연 무대는 그다지 크지 않은 공간에 보랏빛의 푹신한 소파와 그 곁에 긴 옷걸이가 놓여있고 옷걸이에는 코트 한 벌도 걸려있다. 한켠에 놓인 탁자 위에는 자그마한 액자들과 방금 떠놓은 듯한 물 한잔이 있다. 공연 제목처럼 아늑한 윤선의 방에 초대된 편안한 느낌이다.
그녀는 공연에서 샹송 ‘물가의 나의 집’과 ‘아리랑’을 불렀다. 나윤선의 맑은 목소리와 편안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선율은 관객들의 가슴에 집처럼 안락하고 포근한 느낌을 선물했다. 아리랑은 그녀의 음색으로 새롭게 태어났는데 프랑스에서 재즈를 시작하고 유럽에서 활동을 한 그녀지만 세계를 감동시킨 음색 안에는 한국의 피가 분명 흐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시작된 싸인회에서 그녀에게 싸인을 받기 위해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 중에서도 무리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선물 하나씩을 들고 서 있던 그들은 인터넷에서 모인 나윤선의 팬클럽 회원들이었다. 1명, 2명 모여 만든 팬클럽이 여러 군데 집을 지으면서 현재는 3천 명이 넘는 대가족을 형성하고 있다. 팬 싸인회를 마친 그녀는 팬클럽 회원들 곁으로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윤선은 그동안 자신만의 재즈를 실험한다고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어려운 재즈를 불렀다는 사실에 팬들에게 미안했다.
꿈
나윤선은 이제는 낯선 외국인들 앞에서만이 아닌 우리 국민들 앞에서, 듣기 어려움 난해한 음악이 아닌 친숙하고 듣기 쉬운 음악을 통해 다가서고 싶어한다. 또 한차례의 공연이 끝났지만 그녀의 재즈여행은 이제 궤도에 올랐다. 유럽을 밝고 태평양을 넘어 지구 한바퀴를 돌아 전 세계의 팬들과 마주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꿈이자 소망이다.
맑고 투명한 재즈를 세계 팬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언제나 노래하는 그녀는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보컬리스트로서,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늘 갈망하는 진정한 아티스트로서 그녀가 국경 없는 감동의 목소리를 전 세계에 들려줄 날도 머지 않았다.
| |
첫댓글 미셸 교장 성생님 오랜만이네요! 담에 프랑스 가면 CIM 꼭 가봐야지! 오성형도 휴가내서 프랑스 한번 다녀 오세요! 나윤선샘 계실때요.
고맙습니다. 가고도 싶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