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연못을 돌며
정군수 / 전주문인협회 회장
덕진연못에 갔다. 비가 오는데도 휴일이라서 그러는지 연못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어린이, 학생, 연인들, 노인들 할 것 없이 색색의 우산을 받쳐 들고 밀고 밀리며 흔들리는 구름다리와 연화교를 건너고 있었다. 연꽃과 우산꽃으로 덕진연못은 빗속에서 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나도 우산속의 행렬이 되어 연못을 돌았다.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옆 사람의 옷을 적셔도, 어깨와 몸을 부딪쳐도, 뻥튀기 장수와 번데기 장수가 길을 막아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흙탕물이 바짓가랑이에 튀겨도 눈을 흘기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부대끼면서도 마음이 여유로운 것은 덕진연못을 넉넉하게 만든 물과 자애로움이 넘치는 연꽃 때문이리라. 오랜만에 맛보는 해방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내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을, 같은 길을 이렇게 편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덕진연못에 와서 나는 정말 무질서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시선만 부딪쳐도 거북해지는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옹색한 마음으로 나를 가두고 살았는가를 발견하였다. 동반자라는 의식이 인생을 얼마나 여유롭게 하는가를 알았다.
연못에는 이제 막 태어난 간난아이 손만한 작은 봉오리에서부터 동자스님의 합장한 손 같은, 성자의 웃음 같은 꽃들이 층층이 키를 세우며 자라고 있었다. 벌써 꽃잎이 다 떨어져서 행여 놓칠세라 주먹을 불끈 쥐고 연실을 익혀가는 것도 있었다. 연못을 돌 때 서로가 무언의 배려로 감싸고 이해했던 것처럼 연꽃들도 서로를 껴안고 자라고 있었다. 크거나 작거나 구애됨이 없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연못에서 또 하나의 우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비가 와도 연꽃 향기는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수천 마리의 새가 군무를 하듯 연꽃은 하늘을 향하여 날개를 펴고 있었다. 나는 한 바퀴를 더 돌고서야 겨우 연화정 난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연잎에 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늘에서 내려오다 연잎에 떨어져서야 비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 연못 가득 좁쌀 같은 생명의 소리를 퉁기며 내리고 있었다.
또르르 또르르 빗방울은 굴러 연잎 가운데로 모이고 있었다. 빗물이 고여 무거워지면 연잎은 몸을 숙여 비워내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연잎도, 덕진연못 연잎이 모두 자기를 비워내고 있었다. 비우고 나서 가벼워진 연잎은 또 빗물을 받고 있었다. 비우지 않고서는 다시 채울 수 없음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무엇을 비울 것이 있단 말인가? 비울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내 안에 무엇을 감추고 살았는지도 모를 만큼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무지가 부끄러웠다.
연잎은 빗물을 다 비워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몇 방울의 물이 남아 있었다. 차마 다 비워내지 못하고 남겨둔 것은 내 진실까지는 버리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진실을 버리면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면 세상에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비움과 남김의 역설을 나에게 물으며 덕진연못을 나올 때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오는 사람보다 들어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전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듯 색색의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이 연꽃을 보려고 모여들고 있었다.
첫댓글 덕진 연못에서 연꽃들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우루루 우루루 연꽃들은 함초롬이 비를 맞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동자승 처럼 빛나는 머리를 쳐들고 고운 두 손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진흙탕에서 자랐를지라도 마음만은 하늘을 닮아 기도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비가 와도 연꽃 향기는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기도하는 사람의 향기는 다른 사람의 가슴에 스며들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수 천 마리의 새처럼 연꽃은 군무를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감사합니다.
미련없이 비워내는,비워도 비워도 차오르는 그 향기는 언제나 내게 추억을 그리움을 ...전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 덕진연못을 돌며-전북중앙신문 칼럼(2008. 8.1) " --- 직업상 매일 아침이면 모든 신문을 훌터보곤하는데 전주시정을 중심으로 보기때문에 선생님의 귀한 글을 놓칠 뻔했음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연꽃은 군자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연꽃을 보거나 글을 읽게 되면 무의식중에 바른자세가 되더군요. 교수님의 연꽃에 느슨해진 자세를 다시고쳐봅니다. 감사합니다.
덕진 연못에 3일째 가서 그 어떤 작업을 한다고 서성이면서 혹 우리 회원님 한 분 안오시나 궁금했는데 교수님의 칼럼 글이 날러 왔군요. 체움과 비움의 미학 그러면서 진실까지는 남겨 두어야 한다는 말씀을 오래 가슴속에 간직하겠습니다. 더운 날 좋아하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 대접하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항상 교수님 곁에서 교수님의 넓은 가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산을 받쳐주는 연잎처럼. 수천 마리의 철새가 군무의 나래를 펼치듯 하늘을 향한 연꽃을 오늘도 보고 왔습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전북중앙 8월1일(금요일)자 7면 상단에 게재되어 있음을 오늘 확인하였습니다. 좋은 글 다시 한번 음미해보았습니다. 떼쓰듯이 울어대던 왕매미도 잠시 오수를 달래는 오후 두시 때를 막 벗어나는 시간입니다. 남은 시간도 보람되십시오.
가만 가만 연방죽을 걸어가는 분위기를 연출 하면서도, 저 내면의 깊이까지 들여마신 숨을 단숨에 머리 끝까지 솟구치게 하는 감동을 이끌내시는 교수님만의 글. 시는 시대로 수필은 수필대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덕진연못에 마음을 주셨나봅니다.. 작년 이만 때도 유사한 제목의 글을 쓰신 것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