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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장 소 |
높 이 |
시 대 |
비 고 |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 |
시내 법흥동 |
17m |
통일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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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법림사지 5층전탑 |
시내 동부동 |
8.35m |
통일신라 |
안동 동부동 5층전탑 |
안동 조탑동 5층전탑 |
일직면 조탑동 |
8.65 |
통일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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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화인사지 다층전탑 |
풍천면 금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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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탑, 초층만 잔존 |
칠곡 송림사 5층전탑 |
칠곡군 동명면 |
16.13m |
통일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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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
9.4m |
고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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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기 힘들고 재료마련도 국내에서 손쉽지 않아 외면당했던 전탑이 왜 유독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에서는 이토록 환영을 받았던 것일까? 그 까닭에 대해서는 다음의 가설이 있다.
첫째,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으리라는 것이다. 부석사, 봉정사를 비롯한 화엄 종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 유학했던 의상이 이곳에 화엄 사찰을 세우고 신진 유학승들이 모여들어 화엄종을 열게 되면서 당시 중국에서 유행했던 전탑 형식을 함께 도입하여 집중적으로 탑을 조성했으리라는 가설이다.
둘째, 소재성에 근거하여 볼 때,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사정과 달리 이 지역은 훌륭한 화강암 석재는커녕 벽돌이외의 탑 재료를 구하기조차 어려워 전탑을 세웠으리라는 추측이다. 안동은 두 개의 단층선이 지나가는 지질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백악기를 전후한 이 대규모 변형작용을 거치면서 암석에 많은 균열이 생겨 보통 화강암에 비해 안동의 그것은 파쇄 현상이 훨씬 심하다. 이런 소재로는 석조물을 조성하기 곤란하였으므로 낙동강을 낀 퇴적암 지대의 양질 점토와 강모래를 이용한 벽돌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가설들은 나름의 의문점을 안고 있어 안동지역에 전탑이 밀집된 이유를 명확히 밝혀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 모전석탑이란?
모전석탑이란 전탑을 모방하여 벽돌 모양의 조그마한 석재로 건조된 탑을 말한다. 모전석탑도 전탑과 마찬가지로 석재로 벽돌형을 다듬어서 모전석을 생산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크게 유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석탑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으로서 한국 석탑의 하나의 이색적인 양식으로 남게 되었다. 이 모전석탑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전탑계 모전석탑으로 석재를 벽돌형으로 잘라서 축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석탑계 모전석탑으로 일반 석탑과 같이 석괴(石塊)를 층층으로 쌓되 기단과 낙수면에서 신라 전탑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전자의 대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고 후자의 것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동의 5층석탑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식의 특징을 꼽자면 먼저, 전탑계 모전석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조그맣게 잘라 탑신과 옥개 등 탑의 전체를 축조하였으며 옥개석의 층급은 전형적인 석탑에 비하여 많고 감실을 설치한 것이다. 이와 달리 석탑계 모전석탑은 옥개석의 낙수면이 층단을 이룬 점에서 전탑의 형식을 보이나 탑신은 한국 석탑의 전형적인 수법을 쓰고 있다는 것과 옥개석의 층급수가 전탑에 비하여 적다는 특징이 있다. 이 두 가지 형식에서 공통으로 지적되는 것은 기단이 단층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전탑의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회교육학부 02학번 류민지
속칭 제비원 미륵으로 불려지는 이천동 석불상은 안동시 북쪽 이천동 태화산 기슭의 산록 ‘제비원'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 입상이다. 제비원 석불은 몸을 바위에 선각으로 새긴 데 비해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해 얹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머리의 육계가 큼직하고, 윤곽이 뚜렷하여 매우 개성 있는 모양을 하고 있고, 입은 꾹 다물었고, 눈에 힘을 잔뜩 준 모습이 매우 권위적이고 힘이 있어 보인다. 뚜렷한 얼굴부분과는 달리 큰 바위 위에 새긴 몸체의 선은 비바람에 많이 씻겨서인지 그다지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법의는 두 어깨를 다 감싼 통견의를 표현하여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이 오른쪽 어깨에서 직선으로 뻗어 내린 옷주름과 교차하고 있다. 한 손은 가슴께에, 다른 한 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엄지와 장지를 맞대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각기 사람이 타고난 근기에 따라 천축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중품하생인의 손 모양은 중품의 근기를 타고난 사람을 하생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발쪽의 대좌 부분은 홑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음각으로 새겼다. 이런 거대한 마애불이 많이 새겨진 것은 주로 고려시대의 일이어서 이 제비원의 석불도 대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영가지」에는 높이가 10여장에 이르는 이 부처가 634년에 만들어졌으며 여섯 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국통일 이전에 조성된 것인데,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석불 위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있다. 미륵불의 거대함에 비해 아담한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석탑은 단층기단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이고 있다. 석불과 함께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여겨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석불상이 위치한 제비원은 “성주의 본향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라고 시작되는 성주풀이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전설
▹안동이 고창이라고 불리던 신라 때, 이 돌부처가 있는 곳에 지금의 여관인 원(院)이 있었다고 한다. 제비원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연(燕)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이 처녀는 얼굴과 마음씨가 고와서 이웃의 총각들이 그녀를 사모하였다. 이웃마을에는 부자이지만 마음씨가 나쁜 김씨 성의 부자가 살았는데, 그 집 총각 또한 연이를 사모하였다. 그러다 그는 비명에 죽어서 저승에 가게 되었는데, 염라대왕은 총각이 살아생전에 악덕을 많이 쌓았으므로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이지만, 건넛마을의 연이는 착한 일을 하여 선행의 창고가 가득 쌓여 있으니 좀 꿔서 쓰면 다시 살아 돌아갈 수가 .있다고 하였다. 저승에서 연이의 재물을 빌려 쓰고 살아난 총각은 이승에 돌아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주었다. 큰 재물을 얻게 된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다. 큰 법당을 짓느라 5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마지막 날 기와를 덮던 와공이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높은 지붕에서 떨어진 와공은 몸이 마치 기왓장처럼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 순간 와공의 혼이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를 제비원 또는 연미원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이는 서른여덟이 되던 해 동짓달 스무 사흗날에 죽었는데, 그 날 저녁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연이의 혼이 이 돌부처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였고, 공덕을 쌓은 연이가 부처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부처를 미륵불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다.
▹제비원 미륵불의 머리 부분은 지금부터 350여 년 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한다. 거기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에 청병의 명나라에서 온 이여송은 난이 평정되자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훌륭한 인물이 날 자리를 골라 혈(穴)을 끊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큰 미륵불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필경 저 미륵불 때문에 말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여 송은 차고 있던 칼로 미륵불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제야 말발굽이 떨어져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칼로 벤 까닭에 미륵불의 목부분에는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있고, 왼쪽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 당시에 떨어진 목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 모양으로 볼록볼록 나오게 다듬어 놓았다. 지금 보면 이은 자리는 마치 염주를 목에 걸어 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전설에는 법당과 석불을 도선 국사가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도선이 지녔다는 신통력에 기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역사교육전공 01학번 최선미
조선 유학의 대표적 성현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을 모시는 도산서원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대로 천원짜리 지폐 뒷면에 인쇄되어 있는 그곳이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천원권 지폐를 보면 뒷면은 도산서원 전경이고, 앞면에는 선생의 초상화며, 그 옆에는 투호가 도안되어 있다. 이황 선생은 학파의 구분을 넘어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을 보여 준 분이시기에 도산서원은 영남지방뿐 아니라 전국적인 명소로 인정받는 곳이다.
"도산"이란 지명 유래는 옛날에 도산서원이 있는 이 산 속에서 옹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옹기 굽는 산이라 해서 질그릇 도(陶)자, 뫼 산(山)자를 써서 도산이라 부른다. 서원 주위는 그리 높거나 크지도 않은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산수의 맑고 아름다움을 보아 학문을 닦기에는 아주 적당한 장소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도산서원은 원래 이황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도산서당이 그 시초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황 선생은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자신이 거처할 도산서당과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지었다. 이황은 1561년에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묻혔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4년만인 선조 7년(1574)에 제자와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숭모하여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세웠으며, 선조가 현판을 내려줌으로서 왕실과 유림의 존중을 받는 곳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후 도산서원은 많은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며, 이황 등을 받드는 곳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 도산서원의 위상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존속됐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또한 조선시대의 서원으로서는 드물게 근대에 들어와서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두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서원 앞 우물이 있는 넓은 마당을 거쳐 문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그리고 그 아래 별채인 역락서재, 이 세 건물이 한 구역인데 이것들이 이황이 살아 계 실 때 있던 건물들이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 난 경사진 길을 잘 다듬어진 계단을 딛고 올라가면 진도문이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인데 이황 사후에 만들어진 많은 건물들이 있다.
맨 위층부터 살펴보면 이황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상덕사가 있고, 그 아래에 강당인 전교당이 있으며, 전교당 앞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고 있다. 동재 뒷편에 장판각이 있고, 동서 양재 아래로는 진도문을 사이에 두고 동서 광명실이 있다. 또 상덕사와 전교당 사이에 난 작은 문을 통해 서쪽으로 나가면 전사청이 있고, 그 아래로는 상하 2개의 고직사가 있다. 전교당에 걸려 있는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은 선조가 명하여 한석봉이 직접 글씨를 쓴 것이며 장판각에는 이황 선생의 대표적 저서인 <도산십이곡>, <언행록> 등의 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선생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옥진각에는 지팡이, 매화 등, 벼루, 투호, 지구의, 기타 책자 등 선생이 생존에 사용하던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후학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산서원은 원래 주변경관이 수려한데다 최근엔 안동댐 물이 바로 아래까지 들어차 더욱 장관을 이루고 있다.
▲ 시사단
▲도산서원의 배치도
도산서원 맞은편에 안동호를 배경으로 자리한 곳이 바로 시사단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평소 선생의 높은 덕을 추앙해 오던 정조 임금이 1792년에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도산별시'라는 특별과거를 치르게 한 곳이다.
♡ 서원의 기능
서원의 기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존현(尊賢 : 선현을 추모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양사(養士 : 선비를 양성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산서원의 건물을 구분하면, 전교당과 동서 양재, 장판각, 광명실 등은 강학의 공간이고, 상덕사를 중심으로 한 전사청 등은 존현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사당인 상덕사는 전교당 뒷편의 한층 높고 그윽한 곳에 따로 출입문인 삼문을 두고 별도로 담장이 둘러진 안에 있다. 서원의 현실적 공간은 전교당이 중심이지만, 정신적 공간은 상덕사인 것이다. 도산서원은 일반적인 서원의 전형적 구조인 전당후묘(前堂後廟)의 양식이다.
♡ 퇴계 이황
이황은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시대의 유학자로서 학덕과 인망에 있어서 전․후대에 견줄 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 조선 중기 시대적 요청에 따라 주자학을 한국적 양상으로 완성해 낸 사람이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지만, 먼 시골 출신인 그는 벼슬살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벼슬보다는 학문 연마에, 또 현실적 출세보다는 마음의 수양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1549년 11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인근 지역의 젊은 선비들이 그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이로부터 학문 탐구와 함께 제자를 길러 내는 학구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황이 제자들과 강학한 책들은 『논어』,『중용』,『주역』등 고전과 『주자전서』,『심경』,『성리대전』등 주자학 서적이었다. 이황은 그를 찾아오는 제자들과 대화를 하거나, 또는 멀리 있는 동학들과 편지를 통하여 토론하며 학구적 생활에 몰입하였다. 그러나 은거 생활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이황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퍼져 조정에서도 몇 번에 부름이 있었지만 이황의 학문은 관료가 되어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의 학문은 마음의 수양을 통하여 자신의 몸가짐과 생활 태도를 올바르고 경건하게 가지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그는 평생토록 유교의 경전들을 섭렵하며 탐구하였다. 주자학의 이론을 탐구하여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의 구조와 인간적 삶의 법칙, 그 도덕적 원리 등을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이황은 도산서당에서 칠십 평생의 마지막을 지냈다. 그가 후인들에게 기억이 되는 이유는 2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 속에 담긴 사상이 주는 교훈에도 있지만, 그의 삶을 통하여 이룩한 높은 정신적 절조와 그것의 지속적 실천에 있었다. 그가 평생 탐구한 철학적 주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것은 마음에 관한 학문(심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질은 주자학에서 말한 바 세계의 근원적 본질인 '리'와 동일한 것이라고 규정했고, 본질에 근거하여 모든 현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듯, 마음도 그 본질인 덕성에 근거하여 드러날 때, 도덕적 실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존재 근거로서 본질적인 마음을 자각하는 것이 그가 했던 공부였다. 그가 살고자 하였던 인생은 이러한 자각을 현실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 실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이 마음속에서 경(敬)을 자각하고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 속에서 은거 생활을 한 것도 자연의 본모습인 '리'와 함께 덕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회교육학부 02학번 황수진
▲봉정사 만세루
“현존하는 목조 건물은 고려 후기의 것들이다. 이 시기에는 이전부터 유행하던 주심포 양식에다 다포양식이 새로이 도입되었다.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하 생략)” 앞의 글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上)에 나온 부분이에요. 어때요? 고등학생 시절 입으로 봉정사 극락전~~하면서 외우던 기억이 떠오르죠? 극락전은 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사찰 당우(堂宇)라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뒷부분에서 다루도록 해요...
◎ 봉정사는요...
점차 번잡해 가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조용한 한국 산중 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신앙인에게는 더없이 좋은 수련의 장소이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보물 제55인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 최근에는 영국의 여왕이 다녀가기도 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 봉정사 대웅전 (鳳停寺 大雄殿)
봉정사의 본당 건물인 대웅전의 규모는 단층 목조 건물로 팔작지붕에 다포양식(多包樣式)이다. 자연석의 막돌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단청(丹靑)은 조선 초기 기법과 색채가 그대로 잘 보전되어 있어 고색창연하다. 그 예가 많지 않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가구수법을 잘 보여주는 유구(遺構)라 할 수 있다.
◎ 봉정사 극락전 (鳳停寺 極樂殿)
극락전은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유명하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에 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식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가운데만 문을 내고 양쪽에는 통풍과 채광이 되는 살창을 단 것은 최근에 복원하면서 조선시대 때 건물의 모습이 변형된 것을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기둥 위에 놓은 기둥머리가 굽면이 곡면이며 굽받침이 없는 점, 그 위에 놓인 첨차가 끝이 수직으로 강하게 끓어지고 밑면이 두 번 굽은 S자 모양으로 파인데다가 첨차 위에 놓은 소로도 모두 굽면이 곡면인 점 등이 다른 건물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오래된 방식이다.
또 안쪽은 대들보 위에 복화반(엎어놓은 꽃 모양)을 놓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중도리를 받치고, 중도리 위에 같은 방법을 반복하여 마루도리를 받게 했다. 이런 면이 고구려 고분벽화와 비슷해 고구려계 건축이라 본다.
극락전에는 후불벽을 치고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셔놓았다. 내부치장은 간소한 편이다. 한편 극락전은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데 그건 1972년에 해체, 수리를 하였기 때문이다.
극락전 마당에는 까만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높이는 3.35m로 석가탑의 전형을 따랐다. 상륜부가 충실하게 보존되어 있다.
◎ 봉정사 고금당 (鳳停寺 古今堂)
* 왜 고금당일까요?
화엄강당과 함께 양쪽에서 극락전을 시립하듯 서 있는 고금당은 이름의 뜻이 ‘옛 금당’이어서 재미있다. 금당은 삼국시대에는 절의 가장 중요한 건물로 불상을 봉안한 건물을 이르는 명칭이다. 만약 이 건물의 전신이 금당이었다면 본래 극락전이나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인 봉정사 초창기에 수도였던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 암자가 있던 자리에 금당이 지어졌고 그 금당은 절의 구조와 중심이 대웅전으로 옮겨지면서 고금당이란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다.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어요...^^)
* 구조 및 나머지
맞배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치고는 지붕이 크고 처마가 매우 깊다. 주심포식 집이지만 조선 중기의 주심포식이 결구가 단단한 익공식으로 발전해 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 봉정사 화엄강당 (鳳停寺 華嚴講堂)
규모에 견주어 기둥이 짧고 지붕이 무거워 보이는 것은 화엄강당 지붕이 대웅전 지붕 아래에 맞물려 들어가야 했기 때문인 듯하다. 옆면의 가운데 기둥 위쪽에 살창이 나 있다. 대개가 가운데 기둥은 용마루까지 솟아 지붕을 받치는데 이는 대들보 높이에서 멈추고 가로로 긴 부재가 얹혀 있다. 채광창인데 강당으로 쓰였을 것이다.
◎ 영산 회상도
봉정사 대웅전에서 현존하는 국내최고의 후불벽화 (後佛壁畵 : 불상 뒤 벽체에 그린 그림)인 ‘미륵하생도(微勒下生圖)'가 발견 됐다.
23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봉정사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지붕아래 종보받침에서 ‘1428년(조선 세종 10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 와 ‘1435년(세종17년)에 대웅전을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힌 묵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 영산암 (靈山庵)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촬영한 장소이다. 대부분 이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데 그건 스님들의 참선도장인지라 누가 일러주지 않고, 요사인 무량해회를 둘러보면 저만치 떨어진 곳에 싸리나무로 담장을 치고 사립문을 쳐 놓아 급하게 하산하기 때문이다. 영산암은 사립문을 지나 요사채(고금당) 뒤쪽 산자락에 자리고 있다.
◎ 만세루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서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내어 비게 한 다음 그 속을 막대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불구이다. 염불과 독경이나 예배할 때 쓰이는 것으로 물속에 사는 고기들을 구원하고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리는 것이다. 불사에 쓰이는 이 기구를 목어라고 이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 덕이 높은 고승의 제자 하나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속된 생활을 하다가 그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 날 스승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물고기가 나타나 전생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등에 달린 나무를 없애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 물고기는 다름 아닌 말썽을 부린 제자가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승은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등에 난 나무를 없애주었다. 그날 밤 제자는 스승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업보를 벗겨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고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깎아 물고기 형상을 만들고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는 수행자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게 될 것인동시에 물에 사는 물고기들을 구원하는 소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승은 제자의 말대로 목어를 만들고 여러 행사에 두루 쓰이는 법고로 삼았다.」고 한다.
* 법고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구원하고 해탈하라고 치는 북이다
역사교육전공 01학번 마미혜
“타고 온자가 문명인이냐 걸어온자가 문명인이냐...”
휘돌아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병산(甁山)은, 『영가지』의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는 뜻일 게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크게 S자를 그리며 하회를 감싸 안아 흐르는데, 그 물길이 감싸는 중심에 있는 화산 자락의 양쪽 끝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병산 서원으로 가려면 하회 가는 길에서부터 왼쪽으로 갈라진 샛길로 들어서야 한다. 왼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풍산 들 한자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산굽이를 끼고 돌면서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느티나무가 의젓하게 버텨선 효자마을 입구를 거쳐 몇 굽이를 돌아가면 너른 시야가 펼쳐지면서, 낙동강변의 모래사장이 멀리 바라보이는 위치에 병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 연혁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은 서원 설립의 역사에서 보면, 초창기인 16세기 초반도 아니고 남창기인 18세기 이후도 아닌 17세기 초반에 지어졌다. 서원이라는 사설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후에 건립된 서원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병산 서원의 배치나 구성은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서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 병산서원의 건물
* 복례문(復禮門)
만대루 동쪽에 있던 대문으로 강당 중수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문의 명칭은 “예를 다시 갖춘다"는 뜻으로 출입할 때 마음가짐을 재고한다는 의미가 있다. 문짝은 안으로 닫게 되는데 현대 건축의 대문(밖으로 여닫이)과 다르다. 안여닫이는 방범 등의 기능보다는 진입성이 강조된다 하겠다. 전체적으로 3칸의 작은 규모지만 높이를 높임으로써 뒤쪽 만대루의 수평적 전개를 이룬다.
* 만대루(晩對樓)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晩對樓)는 두보의 시 한 귀절인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에서 따온 것이다.
규범화된 서원 건축에서 변화를 주는 것이 누각의 존재다. 특히 만대루는 이 서원의 경관과 공간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의 낙동강은 넓게 펼쳐진 백사장을 끼고 유유히 흐른다. 병산과 주변의 산세도 수평적으로 넓게 전개된다. 서원 주변의 경관은 어느 한곳만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넓게 전개되는 경관이다. 따라서 누각에서도 어느 한 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두루 바라볼 수 있도록 일체 벽을 치지 않았다. 7칸으로 유래없이 긴 건물은 동서재로 구성되는 중점을 감싸버리며 외부에서의 대표적 장면을 구성한다. 앞산도 강물도 기다랗다. 따라서 누각도 기다랗다. 자연과 인공의 합일,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성리학적 개념의 표현이다. 이 누각이 높지 않은 점은 강당과 안마당에서의 시야를 고려한 것이다. 누각의 이름에 걸맞게 두 개 층으로 구성된 만대루는 두 층이 대조적인 조영의지를 갖고 있다. 아래층은 철저하게 비인공적인 반면 위층은 정제된 인공성이 돋보인다. 서로의 기능도 대조적이어서 아래층은 출입용 통로라는 물리적 기능을 갖는데 비해, 위층은 차경효과를 위한 시각적 기능을 충족시킨다. 따라서 위층의 인공적 조영의지는 자연과의 대비를 위함이라 볼 수 있다.
▲만대루-한가한 오후
*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동재와 맞은편의 서재는 기능과 형태, 규모면에서 같은 꼴이다. 동서재는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흔히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당시의 원규, 학규 등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는 기숙사의 의미보다 독서실의 의미가 컸던 것 같다. 항시적인 강의가 없고 개인적 도서 위주의 교과과정을 가졌기 때문에 피교육자들은 각자의 서재에서의 독서와 사색이 주된 일과였다. 또한 모든 학생들이 기숙을 했던 것은 아니고, 인근 마을 출신들은 각자의 집에서 공부를 하다 강회가 있을 때에만 서원에 출석하기도 했다. 서재의 장서실은 만대루의 장서실을 철거한 후인 최근에 개조한 것이다. 원래는 작은 온돌방이었고 동재와 완전히 대칭을 이루었다. 동재와 서재가 대칭을 이룬 것은 유학적 형식논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같은 종교 건축이라도 사찰의 좌우 요사채는 완전한 대칭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것은 성리학적 개념인 예와 관계가 깊다. 이러한 형식론적 대칭구성은 물리적인 기능에서 많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향에서 그러한데 이러한 점에서 유교의 건축은 철저히 관념적이며 의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서원내의 건물 중 동서재는 가장 오래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입교당(入敎堂)
이 건물의 용도는 강당이다. 서원 건축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며, 규모도 가장 크고 구조도 가장 견실하게 된다. 향교건축이 사당인 대성전을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에 두는 것에 비해 대조적이다. 입교당은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동쪽 끝칸에 명성재를 서쪽 끝칸에 경의재를 설치했다. 이 건물과 두방의 명칭은 성리학적 개념을 따라 작명되었다. 명성재는 원장실이며 경의재는 부원장, 혹은 총무인 유사급이 사용하는 방이다. 교육기능은 대청에서 수용된다. 가장 중요한 건물답게 1.5m의 높은 기단위에 자리잡았으며 지극히 논리적으로 구성됐다. 양끝 방 앞의 기단에는 큼지막한 아궁이가 뚫려있다. 반면 대청 앞 기단에는 2개의 큰 계단이 돌출돼 있다. 모든 창호의 위치와 크기를 결정하는 과정도 지극히 논리적이어서 이 건물의 창들을 통해 서원 안의 모든 부분을 바라볼 수 있고 넓게는 병산마을 전역과 앞 병산 낙동강까지 외부 자연을 볼 수 있다. 특히 명성재는 동재와 주소를 경의재는 서재를 감독할 수 있도록 고려되었다.
* 신문(神門)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3칸의 지붕을 하나로 덮은 평삼문 형식이나, 문짝은 가운데 것이 양쪽 것 보다 조금 더 크다. 세 문중 위계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이문은 오직 혼령만이 출입하는 문이며, 양쪽 문 중 위계가 높은 동쪽문으로는 상위자가 서쪽문으로는 하위자가 출입한다. 가묘의 경우 동쪽으로는 장남 장손이 서쪽으로는 나머지 자손들이 출입하도록 주자가례에 규정돼 있다. 그래서 가운데 문의 지붕을 높여 소슬 삼문으로 하던가 아니면 이 신문과 같이 평삼문으로 하되 가운데 문을 약간 더 크게 하여 차별을 둔다.
* 존덕사(尊德祠)
서원 기능 중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향사이므로 서원 건물 중 그대로 사용되는 것은 사당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건물과는 달리 사당 안에 행사용의 시설물들이 있다. 서원 건축 중 유일하게 단청이 허용되는 것이 사당과 신문이다. 단청을 함으로써 혼령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건물을 보호하려는 의도지만 유교적 관념은 지나친 화려함은 배제하였다.
* 전사청(典祀廳)
춘추 향사 때 제물을 장만하고 보관하는 곳이다. 집안에서 제사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높은 지대에 위치했다. 특히 온돌방은 앞의 주소 대청의 뒷 창을 통해 주수의 안마당에서 일어나는 제수 마련의 행위를 바로 볼 수 있고, 이에 맞추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 장판각(藏板閣)
장서실은 책자를 보관하는 곳이고 장판각은 판본을 보관하는 곳이다. 장서실이 도서관의 기능을 갖는 곳이라면 장판각은 출판사의 기능과 유사하다. 실제로 서원에서 책자를 출간한 사실이 많아 유수한 서원에는 장판각들이 설치됐다. 국가적 차원의 출판사업이 아니면 대개의 출판은 목판본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목판의 나무는 썩기 쉬워서 습기 방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따라서 거개의 장판각을 지면에서 높이 띄운 누각의 형식을 취하기 쉽다.
* 주소(廚所)
서원에 필요한 노역과 관리를 위해 관리인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외형은 안동 일대의 상류주택과 같지만 내용은 서원 봉사라는 기능에 맞게 큰 차이가 있다. 정상적인 가족이 살지 않으므로 사랑채가 없고 안마당은 부엌을 위한 작업마당과 같다. 특히 장독대까지 안마당으로 들어와 이 집의 용도를 확연히 보여준다. 방은 3개만 있고 오히려 2개의 부엌, 창고와 헛간 등 작업 공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현재의 평면 구성은 과거와 약간의 변화가 있다.
* 기타
주소와 통하는 일각문은 좁고 낮아 관리용 출입구임을 나타낸다. 특히 주소 부엌과 바로 통할 수 있는 위치여서 더욱 기능적이다. 석물은 사당 마당에만 있다. 2개의 정료대와 1개의 관세대가 있다. 정료대는 어두운 새벽에 제사를 행하므로 마당에 조명을 하기 위한 장치이다. 관세대는 향사 시작 전에 헌관이 손을 씻는 곳이다.
♡ 서애 류성룡 ♡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이견(而見), 호가 서애(西涯)로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하회 류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받들어진다.
21세 때는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을 때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명민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병조,형조의 일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류성룡은 정치가로, 경제․군사 전략가로 생애 대부분을 활약했지만,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큼 영남 사림에서의 위치도 공고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하게 하기도 했다.
1590년 황윤길․김성일 등과 함께 통신사로 왜국의 정세를 살피고 온 뒤로 거의 말년까지 정란에 휩싸인 나라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 전심전력하였다. 말년에는 북인으로부터 주화론자라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는 정치적 고난을 겪기도 했다. 파직된 뒤에 향리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영모록』,『지행설』등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