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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이제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본문 : 호세아 6장 1절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호세아 6장 1절, 새번역>
우리는 자주 접하거나, 아니면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번역을 기초로 성경을 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번역본은 아직까지 '개역개정판'입니다. 조금씩 '새번역'을 보거나 '메시지성경'을 보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아직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호세아 6장 1절 말씀은 개역개정판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더 넓고 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새번역과 공동번역, 메시지성경을 비교하여 함께 살펴보면 더욱 더 깊은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호세아 6장 1절을 4가지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6장 1절 초반부입니다.
개역개정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새번역 -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공동번역 - 어서 야훼께로 돌아가자
메시지성경 -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자.
가장 중요하기에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바로 '돌아가자' 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있던 곳에서 떠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 가지 조건을 기준으로 보면 본문에 등장하는 ‘돌아가자’ 란 "떠나오기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1절 본문에 등장하는 '돌아가자'의 히브리어는 "וְנָשׁ֣וּבָה(ve·na·shu·vah, 베냐슈바)"로 성경에서는 창세기 3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 새번역>
이 구절에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는 내용으로 쓰인 히브리어가 바로 오늘 호세아 6장 1절에 나오는 '돌아가자'라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근원, 원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가 빚어지기 전의 상태, 즉 처음이었던 흙으로, 가장 처음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쉽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호세아 6장 1절도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그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무 형용사를 지니지 못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삶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을 가지고, 지금 현재의 모든 상황을 완전히 다 내려놓고 버리고서, 다시 하나님께서 빚어주시길 소망하면서 처음으로,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핵심적으로, 결론적으로 한 줄로 요약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기 전이었던 흙으로,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나를 빚어주시길 원하면서, 다시 나를 새롭게 하길 소망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이기에, 다시 그분으로부터 시작하려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중간에 꼬일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씩 복기하면서, 천천히 뒤로 돌려보면서, 풀어 가면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겠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면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을 달리해 보는 것입니다. 가장 기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한 이유로 돌아가고, 가장 먼저 이 일을 하면서 떠올렸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우리에게는 수도 없는 꼬임이 원하지도 않는데 너무도 자주 발생합니다. 어찌 그리도 우리의 계획대로 착!착!착! 진행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그럴 때마다 왜 그렇게 무엇인가에 원망스럽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이런 환경이 짜증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가 계속 이어지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곧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진짜 다 포기할건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지!’ 물론 당연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선택하지 못한 채로 결정을 방치해 두고 있는 것도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말씀 가운데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호세아서 6장 1절은 전반부보다 후반부를 보면 더욱 재밌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쩌다보니 "여호와께 돌아가자" 라는 타이틀 때문에 많이 회자되지 못하는 구절이지만 저는 솔직히 이 후반부 구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도 역시 4가지 번역으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역개정 -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새번역 -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공동번역 -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주신다.
메시지성경 - 주께서 우리를 상하게 하셨으나, 이제 치료해 주실 것이다. 우리를 아프게 치셨지만,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읽다보면 재미있기는커녕 하나님을 오해하기 딱 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으시고 상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치료해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치시고 상처를 내시고 아프게 하시지만 다시 싸매어 주시고, 아물게 하시고, 일으켜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병 주고 약 주고'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치료해 주실 거면서 왜 우리를 찢으시고 상하게 하십니까? 다시 싸매어 주시고, 아물게 하시고, 일으켜 주실 것이면서 왜 우리를 치시고 상처를 내시고 아프게 하십니까?
그래서일까요? 예전에 아는 분 중에 하나님을 '분열형 성격장애'를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하는 이기적인 신일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하나님께 길들이기 위해 고난과 축복을 섞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맙시다. 이건 철저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하나님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는 방법은 우리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에 대해서 나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호세아서가 시작되면서 등장하는 막장드라마 같았던 이야기 바로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기록된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 호세아서를 쓴 저자는 호세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녀들을 낳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오해할 만한 사람은 바로 이 글을 쓴 저자, 호세아라고 생각이 되지 않으십니까?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이라는 명령을 받고 황당하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선지자가 된 것은 좋은데, 처음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호세아서 1장 3절을 통해 보여주듯이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녀들을 낳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이름까지 지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이스르엘로 ‘하나님이 씨를 뿌리시다’라는 뜻의 이름이고, 둘째는 로루하마로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딸’이란 뜻이고, 셋째는 로암미로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생각해보니 이상한 저주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신지 하나님은 곧 다시 다른 이름을 주십니다. 형제들은 암미, 즉 ‘내 백성이다'라고 부르고, 자매들은 루하마, 즉 ‘불쌍히 여김을 받는 딸’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그 자녀를 낳은 아내 고멜은 또 다시 음녀가 되기 위해 호세아를 떠나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다시는 잡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돌로 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자신과 자녀를 버리고 다시 음란으로 돌아간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시며, 다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정말 지금 그 어떤 막장드라마와 비교해도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을, 이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바로 호세아서의 저자, 호세아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바로 그 때 해 주십니다. 호세아서의 주제와도 같은 호세아 3장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왔다. 나는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많은 날을 나와 함께 살면서, 창녀가 되지도 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도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그 동안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소." 이스라엘 자손도 많은 날을 이렇게 왕도 통치자도 없이, 희생제물도 돌기둥도 없이, 에봇도 드라빔도 없이 살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서, 주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떨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것이다. <호세아 3장 1~5절, 새번역>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서를 통하여 지금 하나님을 떠나 죄악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직접 겪은 호세아가 바로 지금 오늘날의 당신이라면 당신은 호세아서를 기쁨으로 써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하고 나서도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험을 안 하게 하시고 그냥 말씀하시면 안 되는 것일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그의 주권과 통치와 명령에 순종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생각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호세아의 인생에 잔인하리만큼 혹독한 말씀을 하시면서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솔직히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질투라고 설명은 하지만 솔직히 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만약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도 호세아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아닙니다. 저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가지 착각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나를 호세아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호세아가 아니라 고멜이라면 어떨까요? 내가 고멜의 입장이라면 이 하나님의 명령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음란함이 가득했던 삶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찾아와 청혼했을 때 그리고 그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았을 때 고멜이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호세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호세아의 기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즉 ‘고멜’에게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았지만 또 다시 음란한 길로 떠나버린 고멜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삶을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과 함께 많은 열매를 맺어왔지만 다시 하나님을 떠나는 우리가 고멜입니다. 그런 고멜을 바라보면서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이제 그만! 어서! 돌아 오라!”
하나님은 떠난 우리를 결코 버리시거나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오늘도 찾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벗어난 삶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아서 찾아보려고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해 보지만 공허함과 불안함, 텅 빈 외로움 밖에 없음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전부였는데,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근원이 사라지고 나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니 우리 삶에 사랑이라는 것이 도무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찢겨집니다. 상처가 많아집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폭풍을 우리는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나를 치시고, 상처를 내시고, 아프게 할 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 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 하나님은 이 고백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집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마음이 돌아서고 삐뚤어져 있는 첫째 아들을 기다리고, 밖에서는 뒷산에 올라 떠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집 안에 있는 첫째 아들의 마음은 늘 상해있습니다. 멀리 타국으로 떠난 둘째 아들의 고난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둘째가 조금 다른 생각과 결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누가복음 15장 17~18절, 새번역>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돌아가서' 라는 단어가 호세아 6장 1절에서 쓰인 히브리어와 같은 뜻을 가진 헬라어 "πορεύσομαι(poreusomai, 포레우소마이)"입니다. 그런데 영어로 더욱 흥미롭게 사용됩니다. "I will go", "그래! 가자!" 지체할 필요가 없이 출발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드디어 제정신이 든 둘째는 그렇게 결정하고 아버지께로 즉시 돌아가게 됩니다. 수많은 고난 속에서 발견한 것은 오히려 잊어버리고 있던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종들마저도 배부르게 먹이셨던 내 아버지의 그 넓은 마음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제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참 때로는 고난이 은혜라는 말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나에게, 개개인에게 모든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간섭'이라고 말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대한 파티를 열고 우리를 ' VIP'라 부르시며 초대하신 집주인인데, 우리는 가끔 우리를 'IDOL'로 착각하고 하나님을 '팬'으로 생각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디까지 사랑하셨습니까?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독생자를 그냥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독생자를 찢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독생자를 상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독생자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도록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하여!
그러니 깨닫는 이는, 제정신을 차리는 이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라! 이제! 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면서, 또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회개의 고백이 담긴 구절이 바로 호세아서 6장 1절인 것입니다.
그냥 ‘돌아가자’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결단하고, 다시 처음으로,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 조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절대 안 늦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떠올랐다면 이제 결정만 하면 됩니다.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개역개정에서 번역한 '오라' 라는 단어보다 새번역과 메시지성경의 '이제'라는 말이 더 좋은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동번역처럼 '어서'라는 표현으로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깊은 뜻이 더 좋습니다.
함께 결정하시겠습니까? "그래!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자!"
함께 지금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 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돌아가자"라는 말 중에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한 구절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40절입니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자. <예레미야애가 3장 40절, 새번역>
자, 이제 돌아갑시다! 하나님께!
결단찬양 - 주께로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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