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은 중국 길림성 동남부에 있는 연변지역(예전에는 간도지방이라 불렀다)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곳에 성립된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줄여서 쓰기도 하는 말이다. 전자는 지리적 의미이고 후자는 행정적 의미이다. 자치주 내에 조선족은 40% 정도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말부터 한민족(韓民族)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일제의 조선 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이 지역의 조선족은 중국어(漢語)와 한글(朝鮮語)을 함께 배우고 있으며, 옛 조선의 문화적 전통, 예컨대 의식주 생활과 관혼상제 등에 있어서 조선의 고유한 문화적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석화 시인은 1958년 연변의 용정에서 태어나 연변대학을 나왔다. 현재 연변작가협회 이사로 있으며, 월간 《연변문학》을 편집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시단에 나온 이후 천지문학상·진달래문예상·해란강문학상·장백산문학상·아리랑문학상·압록강문학상·도라지문학상·지용시문학상 등 넓게는 중국 내의, 좁게는 연변 내의 각종 문학상을 휩쓸다시피 수상하고 있는 연변이 낳은 대표적인 시인이다. 《나의 고백》, 《꽃의 의미》, 《세월의 귀》 등의 시집은 연변 문단에서 크게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그의 이름은 한국 문단에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력을 지닌 석화 시인이 최근에 쓴 시는 제목을 ‘연변’으로 하여 일련번호와 부제를 붙인 22편의 연작시다. 연변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연변의 풍광과 풍습, 연변 조선족으로서의 삶과 꿈 같은 것이 22편의 시를 이루었다. 이들 시편을 읽은 소감을 간단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나는 곳이다
사래 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조각에 묻어 나오고
룡드레우물가에
키 높은 버드나무가 늘 푸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 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 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백두산 이마가 높고
두만강 천리를 흘러
내가 지금 자랑스러운
여기가 연변이다.
―[연변·1―천지꽃과 백두산] 전문
연작시 제1번의 부제를 ‘천지꽃과 백두산’으로 하였다. 연변에서는 진달래를 천지꽃이라 부른다고 한다. 시인이 말하는 연변이란 도대체 어떤 곳인가. “사래 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조각에 묻어 나오고/ 룡드레우물가에/ 키 높은 버드나무가 늘 푸른” 곳이다. 이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연변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곳이며, 드높은 기상이 뚜렷이 남아 있는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을 뒷산에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고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한창 공부를 하고 있다. 연변의 과거와 현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제3연에 이어 시인은 4연에 가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연변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백두산 이마가 높고 두만강 천리를 흐른다고 표현한 것은 이곳의 지정학적인 특성을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수려한 자연이 뛰어난 인걸을 낳듯이 백두산의 남성적 기품과 두만강의 모성적 자애로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시인은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좀 다른 차원에서 자신이 연변에서 태어나 살아가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서 쓴 시가 있다.
텔레비전을 끄고
전등도 껐다
빛이 모두 밀려나간 창문 밖으로
모아산이 다가와 슬그머니 들여다본다.
하루의 수고로움을 다 내려놓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며
다시 고맙다.
거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바로 여기서
아들딸 잘 낳아 키우게 하여주신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연변·13―마지막 밤] 부분
2005년 한 해만도 쓰나미(바다 해일)·허리케인·지진·홍수 등 예상하지 못하고 방비하지 못한 천재지변으로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그 중에는 한국인 여행객과 교민이 간간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들도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었다. 그런데 연변에서는 조선족이 정착하여 살아온 이래 수많은 인명이 일시에 피해를 입는 그런 천재지변은 거의 일어난 적이 없었던가 보다. 시인은 남아시아의 해일 참변 뉴스 속보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거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바로 여기에 와서 아들딸 잘 낳아 키우게 하신 것을 새삼스레 고마워하면서. 아닌게아니라 중국 연변은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한반도와 인접한 곳이라 대외무역에 유리한 특징을 갖다. 또한 풍부한 삼림·광물·수력자원을 이용하고 있고, 입담배와 원삼을 중심으로 한 농산물 생산량도 많아 자치구 가운데 자립도가 높은 편이다.
구한말과 일제 때에 일본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의 후손은 지금까지도 민족 차별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거의 해마다 지진과 태풍으로 말미암아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입고 있는데, 재일교포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또 러시아 연해주의 탄광촌에 끌려가 거기에 둥지를 튼 우리 조상은 오랫동안 모국을 방문할 수조차 없는 반(半) 억류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 곳과 견주어볼 때 연변의 조선족은 이주지를 그곳으로 택한 조상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인데, 시인은 바로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썼다.
연변의 조선족은 1953년부터 종래 한자를 섞어 쓰던 관행을 철회하고 공공단체들의 간판에서부터 조그만 상표에 이르기까지 한글과 중국어 두 문자로 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글을 반드시 위에다 쓰거나 오른쪽에 쓰게 하여 자치주 내의 제1종 문자로서 한글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연변 조선족은 국적이 중국이지만 모국어인 한글을 학교에서도 배우고 있고 주민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쓰고 있다. 즉, 따로 공부를 해야만 하는 외국어가 아니라 모국어이면서 일상어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쓴 작품이 연작 두 번째 시이다.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
한족말로 우(嗚)―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 바람은 퍼~엉(風) 불고
조선족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 새끼들조차
중국 노래 한국 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 귀신 한족 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월의 거리에 넘쳐나는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연변·2―기적소리와 바람] 전문
기적소리를 조선말로 표현할 때 붕―이라고 하지만 한족(漢族)말로 할 때는 우―라고 하는 모양이다. 바람은 사실 우리말로 ‘휙’이나 ‘휙휙’으로 표기하는데 한족말로는 ‘퍼~엉’이라고 표기하는가 보다. 조선족은 한글과 중국어 두 언어를 다 쓰고 다 알아들을 수 있다. 이것 또한 연변 조선족이 갖고 있는 큰 장점 중의 하나이다. 제2연의 표현이 재미있다. 납골당의 조선족 귀신과 한족 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들을 말로 저희들끼리 가만가만 속삭인다. 사자들도 이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고, 하늘을 나는 새 새끼들조차도 중국 노래와 한국 노래를 다 같이 잘 부르고 있다. 마지막 제3연이 의미심장한데, ‘여기서’는 남과 북처럼 서로 반목·질시하는 일이 없다.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는 시구는 사실 남북한 모든 사람에게 주는 연변 조선족의 메시지이다. 한민족은 38선이 놓인 이후 동족상잔의 전쟁도 했고, 휴전협정 조인식 이후(그렇다, 남북한은 지금까지도 휴전중이다) 휴전선의 남과 북에서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분단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남북한이지만 지난 일들은 잊고 화해와 화합의 길을 모색하라고 시인은 진지하게 충고하고 있다. 여기 연변에서 우리는 좌로 우로, 또 동과 서로 나뉘어 반목하지 않고 대동단결하여 잘 살아가는데 남과 북은 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가,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런 시를 쓴 것이다. 비슷한 주제를 지닌 시가 한 편 더 있다.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우리만의 《식물도감》에
우리만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연변사과배》
―[연변·7―사과배] 부분
연변사과배는 사과와 배를 접붙여 만든 신종 과일로 사과만큼 달콤하고 배만큼 시원한 과일이다. 두 과일의 장점을 취해 개량한 과일인 것이다. 우리 연변 조선족은 남과 북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발전을 이룩해나가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고 한 이유는 분단 극복의 의지를 피력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남에서 살건 북에서 살건 다 같은 민족이므로 나로서는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연변 조선족의 입장을 나타낸 것으로도 보인다. 사과배라는 과일이 표상하는 것이 ‘조화’이니, 남과 북이 앞으로는 서로 도와가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이 한 편의 시에 담아본 것이다. 아홉 번째 시도 ‘우리의 뿌리는 같다’는 명제가 들어 있으므로 민족 화합에 대한 열망을 피력한 시로 볼 수 있다.
드는 낫에 잘려
이삭들은 실려 가고
논밭에는
그루터기들만 남아
빈 들을 지킨다
벼가 쌀이 되고
쌀이 밥이 되어
식탁에 오를 때
빈 들에 남은 그루터기들은
실핏줄 같은 뿌리를 뻗어
땅속 깊은 곳에서 서로 엉킨다
한물간 바람이 저만치서
빈 들에 머물다 간다.
―[연변·9―빈 들] 전문
가을걷이가 끝나 논밭에 그루터기만이 남아 있을 때 우리들 시야에는 ‘빈 들’이 들어올 뿐이다. 하지만 “빈 들에 남은 그루터기들은/ 실핏줄 같은 뿌리를 뻗어/ 땅속 깊은 곳에서 서로 엉킨다”. 남한사람과 북한사람과 연변의 조선족이 실핏줄 같은 뿌리를 뻗어 땅속 깊은 곳에서 엉킨다면 들이 텅 비어도 “한물간 바람이 저만치서/ 빈 들에 머물다” 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뿌리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가 지향하는 더 큰 주제는 남과 북의 상호 화합도 물론 중요하지만 남한과 연변이, 북한과 연변이 서로 같은 뿌리임을 명심하고 호혜의 정신으로 살아가자는 데 있다. 그런데 현실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국은 등소평이 집권한 이후 개방정책을 폄에 따라 우리나라와 교류를 점진적으로 확대시켜 갔다. 그러다가 1992년 8월 24일에 양국 대표가 북경에서 한중수교 공동서명에 서명을 함으로써 국가 대 국가로서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그 이후로는 경제교류와 관광, 친척 상호방문 등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교 정상화에 따른 활발한 교류에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 가서 취업한 연변 조선족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통한의 눈물을 흘린 사례는 부지기수이며, 연변에 가서 사업을 한 남한 사업가가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하여 큰 손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속임과 속음의 빈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양국간 같은 민족 사이에 불화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양국간 국민소득의 격차는 조선족 여성의 한국으로의 이민결혼이나 위장취업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불거지는 문제점 또한 적지 않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려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나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4―연변은 간다] 부분
이 시에는 남한사회에 와서 살고 있는 연변 조선족 사람들이 등장한다. 양국간에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제는 예전같이 연변이 연길에 있다거나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이란 대목의 ‘신주’는 중국에서 처음 발사한 유인우주선의 이름이다. ‘아폴로’도 마찬가지인데, 이제 중국에서도 유인우주선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타고 하늘 밖으로 떠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것에 빗대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짐에 있어 상호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한국에 온 조선족이 보따리 싸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연변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의 60~70년대(‘개발연대’라고 불린 시대이다)에 시골 처녀들이 무작정 상경을 일삼았던 것처럼 남한으로의 취업과 남한사람과의 결혼을 원하기도 하는데, 그것의 결과는 반드시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가 없다. 또 ‘위장결혼’을 한 경우 결혼의 신성함을 무시한 채 위장취업을 하려고 “보따리 싸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는 사례가 대단히 많다. 이런 세태를 보고 시인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인들 연변이 없을쏘냐” 하면서 한탄하기도 한다. 이 때의 연변은 ‘沿邊’(국경·강·철도·도로 따위의 언저리 일대)일 수도 있고 ‘緣邊’(혼인상의 친척 관계)일 수도 있다. 그냥 변두리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세태풍자시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제 본분을 망각하고 세태에 휩쓸려 사는 사람들에게 경계의 메시지를 주고자 쓴 시가 또 한 편 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연길 네거리에 내려와서
칼라 도라지로 변신하였대요
싸리나무 꼬챙이에 꿰인 채로
순진한 촌티 내며 서로 껴안고
동시장 서시장에 몰려있을 때가 첫걸음이었고
수돗물에 알뜰히 가랑이 씻겨
《경희궁》, 《경복궁》에 《서울한식관》
쟁반마다 하나 둘씩 담겨 나가는 것 둘째 걸음이래요
내친걸음 한 달음 확 달려가
된장, 고추장에 식초라 간장
맵고 짜고 시고 단 온갖 것들 뒤집어쓰더니
지지고 볶이고 무치고 데워져
세상의 구미에 맛들어져가는 것이
넷째 다섯째 걸음이라나요.
―[연변·8―도라지] 부분
도라지란 이름 그대로 백도라지인데 연길 네거리에서 팔리는 도라지는 온갖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칼라 도라지’로 변신해 있다. 그 다음 단계로 도라지는 수돗물에 알뜰히 가랑이가 씻겨 식당의 쟁반에 하나 둘씩 담겨 나간다. 이 시의 도라지는 의인화된 도라지이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도라지의 다음 행보는 “맵고 짜고 시고 단 온갖 것들을 뒤집어쓰더니”, “지지고 볶이고 무치고 데워져” 세상의 구미에 맛들여져 가는 것이다. 타락의 길로 점점 깊이 접어드는 느낌이 든다. 그 다음에 도라지는 “해가 진 뒷골목/가로등도 희미한 모퉁이까지 막 가버려” 노래방으로 간다. “자정 넘은 노래방 빈 방”은 성의 타락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연변의 처녀들 가운데에는 이런 식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다고 돌려 말하면서 시인은 연변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고 있다.
연작시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열한 번째 시를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바다여,
천리를 내처 달려 너의 품에 닿는
두만강이 부러워
뒹굴며 엎어지며 숨 가쁘게 쫓아왔건만
나뭇가지에 걸린 파지조각처럼
발목 묶인다.
모든 그리움이 바람에 휩쓸려
한 편으로 나부끼듯이
바다여,
지척인 너를 끝내 만져보지 못하여
사무치는 연모는 소금이 된다.
햇볕에 날카로운 가시철조망
늘어선 국경경비선이 아니더라도
눈가에 맺히는 이슬이 소금 맛이고
입술 깨물어 삼키는 맛 또한 소금 맛이다
바다여,
저기서 시퍼렇게 돌아눕는 물결이여.
―[연변·11―방천에서 전문
‘방천’의 사전적 의미는 둑을 쌓거나 나무를 심어 냇물이 넘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을 말한다. 그 둑을 방천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각주를 달아 “두만강이 동해바다로 흘러드는 지역. 중, 조, 러 3국 국경이 인접해 있다. 중국 쪽으로는 해변에 닿을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어 사전적인 의미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방천’은 훈춘 지역의 한 지명으로, 3국의 국경이 인접해 있는 한 마을의 이름이다. 국경 초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 지역의 유명한 관광 명소로 많은 유람객들이 찾고 있다.
우리에게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는 노래로 잘 알려져 있는 두만강은 양강도 삼지연군 북동계곡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610㎞의 장강이다. 두만강은 수세기 동안 한국·중국·러시아의 세력 각축장인 동시에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두만강은 또한 중국·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국경하천으로서 수많은 우리 선조가 이 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했기에 민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강이다. 이 강의 의미를 시인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인 방천에 와서 짚어보는 것이다. 화자가 바다를 향해 외치는 식으로 전개되어 시의 호흡이 굵고 시의 흐름이 당당하다. 이 시가 의미심장한 것은 이런 호탕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중국 쪽에서는 해변에 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다가 바로 지척이지만 “햇볕에 날카로운 가시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다. 바로 국경경비선이라 시인은 월경할 수 없다. 강물은 아무 거리낌없이 동해로 가지만 시인의 발걸음은 이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자신의 몸은 분명히 한민족 조선인이지만 국적은 중국인이다. 그래서 두만강을 따라 죽 오다가 동해에 닿을 찰나에 발길을 돌려야만 한다. 가시철조망을 만나니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는데, 그것이 소금 맛이다. 입술 깨물어 삼키는 맛 또한 짜디짠 소금 맛이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 것이다. 민족과 국적이 동일하지 않은 데서 오는 한이 이 시에 절절이 배어 있어 진한 감동을 준다.
이상 몇 편의 시를 감상해 나가는 동안 석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해온 시인임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 그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잘은 모르지만, 소수민족이기에 연변 조선족은 중국 주류사회로 진출해 입신양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인들과 보다 잘 융화하면서 살아가자면 조선어보다는 중국말을 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 땅에서 한글로 시를 쓰고 있다. 연변의 조선족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연변에 살던 조선족이 고토를 떠나 중국의 대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변 조선족 가운데 모국어를 아끼고 돌보는 사람인 문인과 문학 독자층도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시를 쓴다는 일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고 있을 석화 시인에게, 그리고 모든 연변 조선족 문인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런 뜻에서도 이번에 내가 읽은 22편 연변 연작시의 의의는 결코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헉화 시인의 글을 다시 음미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시인의 자기 정체성 ........
석화시인님 지난 여름 을 기억하며 오늘도 좋은글 보고 갑니다
리선생님, 유시인님과 천년의 미소님 모두 건강하시죠. 여기는 어제 비가 조금 내렸습니다. 새 봄의 기별인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석화시인님의 왕성하신 건필이 게으른 저희에게 활력의 채찍으로 다가옵니다 세기에 명작을 남가는 시인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