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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공부 때문에 머물던 로마의 우리 수도원에선 하루 일곱 번의 시간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승 일과를 그대로 지킬 수 없었다. 학생들은 매일 등하교로 바쁘고 어른들도 몇은 바티칸에 출퇴근하던 ‘공무원’이셨기 때문이다. 수도원 공동기도는 아침기도와 미사, 낮기도, 그리고 저녁기도가 전부였다. 문제는 바로 저녁기도 시간이었다. 긴 ‘독서기도’와 끝기도, 그리고 묵주기도까지 모두 저녁기도와 함께 몰아 바쳤기 때문이다. 이 많은 기도가 50분 안에 다 끝났다. 그러니 낭송하는 속도가 얼마나 빨랐겠는가. 우리 기도 소리는 로마의 거리를 질주하는 이탈리아제 스쿠터 ‘베스파’(말벌이란 뜻!) 소리처럼, 둥글고 높은 천정에 닿았다 다시 떨어져 사람 귓전에서 말벌처럼 웅웅거렸다. 그때 나는 ‘성무일도’란 말의 무게를 온몸으로 절감했다. ‘거룩한 의무’는 방식이야 어떻든 채워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의 갈등은 일종의 ‘반면교사’로 지금도 내 길을 비추어 주고 있다. 신앙생활과 수도생활에서 (거룩한) 의무의 충실한 이행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주로 그렇게만 알아듣기에, 신앙생활이 ‘힘’이 아니라 ‘짐’으로만 느껴지는 작금의 현상이 생긴 건 아닐까. 기도생활이 깊은 ‘쉼’이 아니라 ‘의무 방어전’ 혹은 ‘극기 훈련’으로 더 자주 체험되는 현상도 이와 영 무관하진 않으리.
주어가 중요하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전례 행위를 두고 ‘하느님의 일’(opus Dei)이라 불러 왔다. 특히 베네딕도회 전통에서는 ‘성무일도’(Officium Divinum)라고도 부르는 ‘시간 전례’(Liturgia Horarum)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굳어졌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성찬례(미사)와 다른 성사 거행을 두루 포함한다. 그뿐 아니라, ‘전례’(그리스어 Leitourgia)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하느님에 대한 예배의 거행뿐 아니라 복음 선포와 사랑의 실천도 가리킨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70항).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알아듣는다고 해서 무리는 아닐 터. 수도자의 경우, 사도직을 포함해서 수도생활 전체를 ‘하느님의 일’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게 ‘하느님의 일’은 진행 중이다.
요한 6,28-29에는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맥락에서 ‘하느님의 일’이란 표현이 글자 그대로 나온다. 유다인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들(erga)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복수 형태로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 이라고 단수 형태로 대답하신다(위 번역본은 「200주년 신약성경」인데 원문 그대로 단·복수를 구분하여 직역했다).
유다인들의 질문에서 ‘하느님의 일들’의 주어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works)’이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수로 대답하신 그 ‘일’(the Work)은 당신께 대한 전폭적 내맡김이요 신뢰다. 바로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 안에서 지금도 당신 일을 계속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통해 일하시도록 내맡겨 드리는 것이다. 요컨대 ‘하느님의 일’에서 주어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시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도 잘 읽으면 ‘하느님의 일’을 바로 이런 뜻으로 알아듣고 있음을 알 수 있다.전례에 관한 교회 가르침도 다시 찬찬히 읽어 보면, 교회가 단 한 번도 이 점을 간과한 적이 없다는 새삼스러운 발견으로 기뻐진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회에, 특별히 전례 행위 안에 계신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 7항). 일하시는 분은 언제나 그리스도시니, “누가 세례를 줄 때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다.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같은 항). 미사 때 집전자가 “그리스도로서 회중을 지휘”한다(in persona Christi praeest, 33항)는 굉장한 표현도 사실 이 맥락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당연히, 전례는 하느님께서 주체이신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함을 의미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9항).
거룩한 수동태
‘하느님의 일’에 대한 이런 (재)발견은 당연히 공동체의 전례 거행 관행과 스타일을 되돌아보도록 초대한다. 미사뿐 아니라 시편기도 역시,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거룩한 의무의 이행이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통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 알아들을 때, 전례 분위기는 내적으로 쇄신되고 한결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에 대한 근원적 이해의 효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적 생활에 심원한 파장을 일으킨다. 수도자로 나이 먹어 가면서, 특히 영적 여정과 관련해서는, 능동태보다 수동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도는 집중이나 통제의 노력이 아니라 그 모든 노력을 내려놓기(letting go)에 더 가깝다.
결정적인 것은 영적 수준에서의 어떤 성취가 아니라, 성취할 게 애초에 없었음을 알아차리게 하시는 은총과의 대면이다. 그리고 그 대면의 순간 비로소 순명 혹은 ‘항복’(surrender)을 배운다. 그 자리에서 사람은 잘난(!) 자기가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모든 노력을, ‘나’라는 견고한 주인공 의식과 함께 순순히 내려놓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의 품에서 비로소 깊이 쉬게 된다(마태 11,28 이하 참조).
나아가, 우리의 사도직과 여타 활동 역시 숨은(혹은 노골적인) 자기실현 욕구로부터 비로소 정화된다. 살고 일하는 게 더 진심이지만 한결 수월해지며, 그 열매는 더욱 풍성해진다. 설혹 교회 공동체에서도 종종 벌어질 수 있는 ‘밥그릇 싸움’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들, 억울함과 우울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원한 자유의 경계에 들어선다. ‘나와바리’를 지키고자 경쟁과 경계로 에너지를 낭비할 일도 없다. 그게 ‘내 일’이기 전에 ‘하느님의 일’인 바에야!
필리피서 첫머리에서 바오로 사도가 자기 공로를 가로챈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은 정녕 허세가 아니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1,18).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7월호에 실렸습니다.
이연학 요나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도회 수도자.
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