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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우리와 함께. (찬양 : 오 신실하신 주)
본문 : 사7:10~17 / 시8:1~9 / 마1:18~25 / 계1:4~8
1. 시작하면서
1.1. 대림절에 대한 이해 : 오늘은 교회 절기로 하면 대림절 혹은, 대강절 2째주입니다. 대림절은 교회 역사에서 507년 투르 공의회에서 지정된 절기이며, 성탄 주일 전 40일간 지켰고, 9세기에 들어서는 4주간으로 지정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식을 중요시하는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지키고 있고, 개신교에서는 통합과 기장에서 대림절 묵상을 통해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의미’이며, 대림절에서 행하는 의식은 초를 켜는 것입니다. 1주는 ‘기다림과 소망’의 의미로 진보라색을 2주는 ‘회개와 빛, 평화’의 의미로 진보라색과 연보라색을, 3주는 ‘사랑과 나눔’의 의미로 진보라, 연보라, 분홍색을 4주는 ‘만남과 화해’의 의미로 진보라, 연보라, 분홍, 흰색을 성탄주일에는 ‘감사와 환희’의 의미로 흰색이나 보라색을 각각 1개와 4개로 촛불을 켰습니다.
1.2. 오늘날 교회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개신교 내에서도 긍정과 부정의 이야기가 공존합니다. 긍정하는 입장은 교회력을 지킴으로서 구속의 의미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예식을 통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합니다. 반대로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은 절기라고 하는 것이 카톨릭의 전통가운데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성경의 증거가 절기를 뒷받침하지 못하다는 것, 구약에서 예수님의 모형적이었던 절기들이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되었다는 점, 종교개혁자들도 절기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또한 후대에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절기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다시 한번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3.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절기의 예식을 지켜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저는 예식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임재를 갈망하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예수님의 나심과, 부활을 매 주일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뻐 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대림절 2째주여서 우리는 ‘회개와 빛, 평화’를 바라면서 촛불을 점화하고 그 의미를 생각했다면 저는 그런 회개와 평화에 대한 갈망과 의식이 오늘, 이번 주간 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 그 의미가 잘 녹여져 있기를 바랍니다. 예식화 해서 만들어낸 신앙의 표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체득화해서 각자의 삶 속에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삶 속에서 녹여 내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예식이 있어도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그 가치대로 살지 않으면 의미 없는 예식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식을 철폐해 놓고는 아예 그 정신과 가치를 잃어버리면 그것 또한 문제일 것입니다.
1.4. 이제 저는 3주간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분의 임재에 관한 말씀을 살피면서 우리에게 과연 예수 그리스는 누구이신가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2.1. 지금까지의 저의 삶에서 예수님은 제게 여러 가지 의미로 존재하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위인전을 통해서 만난 예수님은 제게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처럼 한 위대한 인물이었고, 위인전 독후감의 제목이었습니다. 제게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신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은 교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 속에서 투사적이고 완벽한 삶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생각되던 때도 있었고, 청년의 때에는 가난과 약자들을 위한 예수님, 등으로 제게 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이 기대하는 예수님, , 혹은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아마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같은 분을 서로 다르게 기대하고, 경험하며, 알고 있을 것입니다.
2.2. 마치 눈을 가리고서는 커다란 코끼리를 만지면서 누구는 기둥과 같다, 아니 부드러운 털이 있다. 길다란 코를 가졌다. 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등으로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2.3.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의 환경에서 서로 다른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기대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나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게 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주셨던 방법으로 여러분 모두를 만나지는 않으십니다. 각자 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이름이 너머서 교회인 것이지요, 각각의 차이를 인정해 주는 교회 말입니다.
2.4. 이제 저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코끼리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도 한 사람이 ‘얘들아. 이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식물이 아니고 동물인 것은 분명해!’ 라고 할 때 모두가 ‘그래 맞아’ 라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서로의 삶 속에서 조금씩은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긍정할 수 있는 이야기 말입니다. ‘아! 그래 그분이 예수님이시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주제를 말 하려는 것입니다.
2.5.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바꾸고, 성품과 인격까지도 바꾸어 내신 예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무언가 공통된 우리의 고백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3. 본문이해
3.1. 사7:10~17 : 유다의 왕 ‘아하스’때에 북쪽이스라엘의 베가 왕과 아람의 르신 왕이 서로 연합하여 남 유다를 침공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에 유다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제 전쟁을 위하여 물을 비축하는 일들을 벌입니다. 이때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남은자는 돌아오리라)이 유다와 아하스에게 나아가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람의 르신 왕이나 이스라엘의 베가 왕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아하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사건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새로운 왕에 대한 예언을 들려주면서 그 왕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알려 줍니다.
3.2. 마1:18~25 : 이 말씀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다시 한번 언급됩니다.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결혼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요셉에게 두려워 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 되었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뜻을 알려 줍니다.
3.3. 오늘 제가 여러분에 말씀드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그 첫 번째가 바로 ‘임마누엘’에 관련한 것입니다. 성경의 나오는 이름들은 그 사람이 누군가를 규정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baker은 빵집주인, carpenter는 목수, Smith는 대장장이(금속세공인), Miller는 제분공(방앗간주인) 등)
4. 임마누엘 :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은 세 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단어들을 함께 살피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4.1. 엘(하나님)
4.1.1. ‘엘’이란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강한 자’란 뜻으로 이 단어는 다른 단어들과 합하여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 엘 로힘-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 엘 로이-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 울람 – 영원하신 하나님, 엘 칸나 –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시는 분 등)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뜻은 그러니까 다르게 표현한다면 ‘강하신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4.1.2. 이 땅의 엄마는 참 강합니다. 모든 위기에서 자식을 구해 내거든요. 위대한 인물을 만든 위대한 엄마의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힐러리, 네 스스로 어려움과 싸워야 해. 가서 네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렴.” 엄마의 이 말은 힐러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도전정신을 키워줬다고 합니다. 한 강연에서 김연아 선수의 어머니는 “꿈은 아이의 몫이다. 엄마는 안내자다. 꿈으로 가는 길목의 안내자, 아이가 외롭지 않게 불을 밝혀주는 사람, 엄마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꼭 좋은 부모에게만 위대한 자녀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직 미숙한 자녀에게 부모는 참 든든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우리에게 든든한 후원자이셨습니다. 살아가면서 그런 후원자는 꼭 부모님만은 아닙니다. 이제 친구이기도 하고, 아내나 남편이기도 하고, 혹은 역으로 나의 자녀가 나의 든든한 후원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나의 부족함을 감당해 줄 지혜롭고 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기도 합니다.
4.1.3. 여기 강하고 능력 있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그 강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주어지는 상황 가운데 오는 어려움들에 너무 쉽게 툴툴거리고 화내고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까? 보수적인 교회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까지도 외면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있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능력보다 사회적 구조와 제도에 힘을 주고는 하나님의 전능한 섭리를 너무 외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너머서 모든 가족들이 구조와 제도의 변화와 함께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신뢰하고 세상에 대한 지혜와 함께 날카로운 경건을 가진 성도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야 불의한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연약한 것을 세워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4.1.4. 여러분 강하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그분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오늘의 약속! “함께 하여 주신다”는 이 소망을 가슴에 새겨 봅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4.2. 임(함께하심)
4.2.1.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공유하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4.2.2.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상과 감정과 죽음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살다보니 바쁘고 경황이 없는 때가 있습니까? 피곤해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힘드실 때가 있습니까?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졌습니까?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가슴에 상처가 남았습니까? 높은 벽 앞에 선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무기력함으로 어제를 보내셨습니까?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건강을 잃어 몸이 아파 옵니까? 이제 죽음이 가까웠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그 모든 인생의 여정을 우리 주님이 몸소 걸으시고 우리가 어떨지 그분은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4.2.3. 막막할 때 던지는 한 마디 기도 ‘아버지..’ 라고 기도할 때에도 그것 밖에 다른 기도 없는 나의 마음을 우리 주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마디 기도할 때 ‘그래 .. 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4.2.4.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기뻐할 수 있는 이유,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이면 안되겠습니까?
4.3. 마누(우리) :
4.3.1. 어렸을 적에 이런 교육을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나요?” “우리요!” 그러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라고 하지 말고 ‘나’라고 바꾸세요.. 그러고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나요?’ ‘나! 요’..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요?’ ‘나! 요’, 등등… 교회를 이야기 할 때는 내 교회만, 지역을 이야기 할 때는 내가 사는 이 동네, 나라를 이야기 할 때는 대한민국만 잘되면 되는 식이었습니다.
4.3.2.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면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주심은 궁극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완성됩니다. 이것은 한 성령 안에서, 한 고백을 하며, 한 분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4.3.3.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면서 자기 중심성의 확대는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개인주의와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서만 움직이고 활동하는 이기주의의 팽배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런 문화의 흐름은 교회 안에도 이미 자리잡은 모습이 되어졌습니다.
4.3.4. ‘자기중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죄의 본성을 따라가는 것과 성숙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자라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혼자가 아닌 우리의 중요성과 그 우리 안에서 누리게 될 회복과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나 혼자만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개인에게 주어졌음에도 이 구원은 공동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주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열방의 구원받은 백성이 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임마누엘의 시제 :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계시록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에도 우리와 함께 계셨고, 이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실망하거나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을 여십니다. 조급해 하면 오히려 길을 잃습니다.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다면 잠잠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운전 하다 보면 급히 약속시간에 맞추려고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하지만 그렇게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더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급하니 실수도 많아지고 사고의 위험도 큰 법입니다. 여러분의 지난 날들을 기억하며 위기의 순간 마다 도우셨던 하나님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상하지 못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으나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놀라운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오늘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내일 베푸실 은혜를 기대 합시다.
6. 결론
6.1. 결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혹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기대만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경험하고 깨닫는 바도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신앙 안에서 이룬 성공의 이야기를 듣거나 기적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나에게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조금은 마음이 상하게 될 때도 있는가 봅니다. 교회에 대해서 기대한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도 있고, 오늘의 교회가 진리를 따르지 않음에 마음이 불편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6.2. 그렇게 다른 우리의 상황, 믿음, 생각을 넘어서 이것을 기억합시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믿음 위에서 함께 걸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