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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시세계와 문학사적 의미
최동호
1. 정지용과 언어에 대한 자각
20세기가 첫 새벽을 연 1902년에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은 1923년 휘문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1929년까지 일본 동지사대학을 유학한 다음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학교,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6년부터 공식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지용은 1930년 <시문학>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두 권의 시집 정지용시집(1935)과 백록담(1941)을 통해 1930년대 이후 한국현대시시사를 새롭게 열어놓았다.
그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1920년대 대부분의 시인들의 시가 과도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씌어지고 있던 것에 비해 정지용은 감정을 이지적으로 절제시켜 이미지로 표현하는 새로운 시법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한다. 그의 시론을 보아도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다. 시는 언어와 육화적 일치다. 그러므로 시의 정신적 심도는 필연적으로 언어의 정령을 잡지 않고서는 표현 제작에 오를 수 없다”하여 언어에 대한 그의 자각이 동시대 다른 어떤 시인보다 각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모던한 감각과 시적 재기
1923년 5월 경도의 동지사대학에 입학한 정지용은 그 이전에 전혀 보지 못한 문물과 새로운 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특히 휘문학교 교주 민영휘의 도움으로 교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한 그는 빈곤한 가정환경과 유학생이라는 자신의 신분 사이에 커다란 괴리를 느꼈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식민지배하에 있는 조선 출신의 유학생이라는 것이 그에게 이중의 압박감을 갖도록 만들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정지용의 첫 발표작인 「카페․프란스」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젊은 청년들의 복합적인 자의식을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옴겨다 심은 棕櫚나무 밑에
빗두루 쓴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心臟은 벌레 먹은 薔薇
제비 처럼 젖은 놈이 뛰여 간다.
오오 패롵(鸚鵡) 서방! 꾿 이브닝!
꾿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鬱金香 아가씨는 이밤에도
更紗 커―틴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子爵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大理石 테이블에 닷는 내뺌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강아지야
내발을 빨어다오.
내발을 빨어다오.
―「카페·프란스」전문1)(《學潮》1호, 1926. 6)
옴겨다 심은 종려나무와 앵무새 등의 이국적인 분위기 각기 다른 풍모와 개성을 가진 청년들이 달려가는 카페 프랑스는 서구를 동경하는 젊은 유학생들의 자의식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와 ‘페이브먼트에 흐늙이는 불빛’들은 화자의 날카로운 시적 통찰력을 보여주며, 졸고 있는 카페의 아가씨들도 나른하고 도취적인 자의식의 다른 일면을 시사한다. 특히 마지막에 이국종 강아지가 등장하여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라는 화자의 울분 섞인 독백을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또한 이 시는 「파충류 동물」과 같이 다다이즘적 형식 실험도 하고 있는데 문장 부호의 사용이나 활자의 배치에서 당시 유행하던 시 형식이 시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험적인 시도는 단시간에 극복되어 「향수」(1927. 3)와 「유리창 1」(1930. 1) 등의 시편을 통해 정지용은 자신의 독자적인 시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琉璃에 차고 슬픈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든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寶石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琉璃를 닥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琉璃窓」 전문(《조선지광》89호, 1930.1)
이 시에서 지용이 동시대의 시인들과 구별되는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의 조형능력이다. 1920년대 시인들처럼 슬픔을 과도하게 노출하거나 리듬에 실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화시켜 차고 단단한 것으로 물질화시켜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물먹은 별이, 반짝, 寶石처럼 백힌다 ”고 하여 투명하고 단단한 결정체로 슬픔의 감정을 구체화시킨 것은 지용이 보여 준 남다른 시법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조형한 슬픔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외롭고 황홀한 심사’라고 표현한 것 또한 지적 절제에 의한 반어적 의미를 함축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나아가 정지용의 재기와 감각이 어우러져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 준 것은 「바다 2」이다.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흰 발톱에 찢긴
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海圖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굴르도록
회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地球는 蓮닢인양 옴으라들고……펴고……
―「바다 2」 전문(《詩苑》5호, 1935. 12)
발랄하고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를 구사한 「바다 2」2)에서 우리는 위의 인용 첫 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파도치는 바다의 형상을 뿔뿔이 달아나려고 하는 ‘푸른 도마뱀떼’로 이미지화시키는 지용의 놀라운 언어 감각을 엿볼 수 있다.3)물론 이 표현은 ‘꼬리’가 있기 때문에 생동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흰 발톱에 찢긴/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또한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지 않고서 포착하기 어려운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발랄한 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의 마지막 결구 “지구는 연닢인양 옴으라들고 ……펴고……”같은 부분을 보면 그의 초기시가 단순한 회화성을 넘어서 동적인 율조까지 배려하여 감각적인 언어의 표피적인 구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정지용시집이 1935년 10월 간행되었는데 「바다 2」는 1935년 12월 동인지 《시원》에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아마 동인지 발간이 예정보다 늦어져 시의 발표보다 시집이 먼저 발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본다면 「바다 2」는 그 이전에 발표된 적이 없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단의 관례상 지용이 동인지 편집자들에게 자신이 아끼던 원고를 보내고 나서도 시집 발간 직전까지 첨삭을 가해 수록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용의 <바다 시편>에서 이 작품의 절정4)에 오른 작품이라는 평가는 이런 점에서 음미할 만하다. 많은 첨삭을 통해 명품이 만들어졌다고 판단한 정지용이 발표연대와 관계없이 정지용시집의 서두를 장식하도록 하였고, 이 시가 지용시의 성과를 높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3. 견인의 정신과 산수시
1935년 첫 시집을 간행한 이후 자신의 시적 위치를 확고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용은 상당기간 침묵을 지키게 된다. 이는 새로운 시적 변신을 위한 모색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필자는 감각에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바다의 시편’에서 ‘산의 시편’으로 나아가는 자기 모색과 침잠의 시간이라고 본다. 시를 육화된 언어의 등가물로 인식한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첫 시집 정지용시집의 상당수의 시가 ‘바다’를 제재로 하는 반면, 제 2시집 백록담의 수록 시들은 ‘산’의 심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산’으로의 뚜렷한 변모를 보이는 정지용 시의 제재는 연속적인 흐름과 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의 시세계를 해명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의 시 특히 ‘바다의 시’가 언어의 기교를 위주로 하는 것에 비해 산을 제재로 하는 1935년 이후의 1941년까지의 시라고 할 수 있는 “산의 시”는 기교보다는 정신성이 강조된다. 특히 이 시기의 시는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를 드러내면서 고요하고 단아한 정취를 자아낸다. 정지용의 시에서 산이나 자연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기적 정신성을 함축한 대상이다. 백두산을 등반하고 씌어진 「비로봉」, 「옥류동」, 「구성동」 그리고 등산 체험이 바탕이 된 「장수산」, 「백록담」 등은 이 시기 지용이 시에서 추구하는 바가 견인의 정신주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골작에는 흔히
流星이 묻힌다.
黃昏에
누뤼가 소란히 싸히기도 하고,
꽃도
귀향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히지 않고
山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九城洞」 전문(《靑色紙》 2호, 1938.8)
「비로봉」, 「옥류동」과 함께 지용의 금강산시편을 대표하는 위의 「구성동」은 이른바 강기(姜夔)가 말하는 “자연고묘(自然高妙)”의 경지에 이른 가작으로서 일반적인 서구적 개념의 풍경시를 뛰어넘어 “산수시”5)라는 동양적 전통의 시 세계를 간결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향수」처럼 번다한 수사나 후렴구도 없는 이 시가 돋보이는 것은 미묘함 음영의 한 찰나를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결구 “山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에서 우리는 인간의 발길이 멈춘 곳에서 자연과 동물이 일체화되는 극적인 경계선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초기의 감각적 재기를 넘어서서 지용이 동양적 전통에 뿌리내린 시인으로 지용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시적 탐구는 「장수산」, 「백록담」 등의 1930년대 후반에 계속되는데 이는 당시의 일제에 의한 시대적 압박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클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뚯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번 지고 웃고 올라 간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속 겨울 한밤내―
-「長壽山 1」 전문(《문장》2호, 1939. 2)
「장수산」은 「구성동」에 뒤이어 발표된 것으로 이 시기 지용의 시적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매개적인 작품이다. 1937년 4월 이상이 동경에서 타계했다. 한국문단에서는 하나의 사건이다. 뒤이어 1938년 4월 중등학교에서 조선어시간 폐지되는 동시에 조선육군지원병령이 시행되는 상황에서 당시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휘문학교 교사이던 정지용이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길은 산수자연에 침잠하여 자신을 지키는 일이 거의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위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고요와 정적이다. 6)역사의 시간이 멈추어버린 태고의 정적에서 현실을 초탈하는 자신을 굳게 지키고자하는 의지가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속 겨울 한밤내-”라는 마지막 결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세상을 버리고 초연하게 살고 있는 “웃절 중”의 남긴 자취를 찾아 나선 화자가 오히려 환한 달밤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는 시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을 버리려고 해도 버리지 못하고 현실에 발붙이고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슬픔도 꿈도 없이 굳게 지키고 싶은 결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지용의 이러한 탐구는 뒤이어 발표된 「白鹿潭」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난다.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一抹에도 白鹿潭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조차 잊었더니라.
―「白鹿潭」 끝 부분(《문장》3호, 1939. 4)
「장수산」이 깊은 겨울밤의 세계라면 「백록담」은 명증한 물에 푸른 하늘이 비치는 여름 대낮의 세계이다.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은 실구름 일말에도 흐리울 만큼 투명하다. 화자는 이 맑은 물에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본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비췬 백록담에 문득 쓸쓸함을 느낀다. 여기서 화자와 백록담은 서로를 비추면서 하나가 된다. 이 순간을 화자는 “나는 깨다 졸다 祈禱조차 잊었더니라.”라고 표현한다. 겨울밤의 어둠 속에서 슬픔도 꿈도 없이 자신을 지키려던 화자가 자신의 얼굴에 비췬 명증한 물에서 기도조차 잊은 무아의 한 지점을 지용이 인식했다는 것은 고뇌에 흔들리는 자기를 극복하려는 시적 탐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록담」 이후 2년여의 침묵을 지키던 정지용은 1941년 1월 「조찬」,「비」,「인동차」 등의 신작시 10편을 발표하고 동년 9월 제 2시집 백록담을 간행하게 된다. 백록담은 모두 1935년 이후에 발표한 시편을 묶은 것으로서 문사로서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는 정신주의적 견인의 세계를 탐구한 시집이라고 하겠다.
백록담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형식적으로는 산문시형을 시도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위에 인용한 것처럼 동양적 정신의 구경(究竟)을 추구한다. 그것은 세속을 버리고 산수자연에 은거하면서 은일의 정신을 추구한 동양적 산수시의 세계이며 인간과 자연이 구극의 경지에서 일체화하는 자족의 세계일 것이다. 이는 또한 초기의 감각적인 서정시로부터 벗어나,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식민지 질서의 파행성에 영합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견인의 고투를 함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지용의 시는 여러 차례 변모를 겪으면서도 일관되게 언어의 기능성을 최대한도로 실현해 보였으며 감성의 지적인 표출에 있어 현대시의 선두주자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놓았다. 그가 추구했던 시와 언어의 육화라는 목표는 이후 20세기 한국 현대시의 한 지향점이 되어 왔다.
4. 정지용의 문학사적 의미
1941년 9월 시집 백록담을 간행한 이후 시대의 압박은 더욱 가중되었다.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맺을 때까지 일제하의 문인들은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정지용은 자유로운 세상이 온 것으로 일시 판단하기도 했지만 국제 사회의 역사적 격동은 역사의 격동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민족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그 결과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로 인해 지용은 북으로 납북되었으며 1988년 납월북작가에 대한 정부당국의 해금 조치가 있을 때까지 정지용은 한국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실로 민족의 비극이며 문학의 비극이자 인간의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20세기 최대의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정지용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일반 독자에게도 다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988년 해금조치 이후의 일이다. 민족 분단으로 인해 문학도 분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2002년 5월11일 지용의 고향 옥천에서 거행된 정지용 탄생 100주년 문학 포럼에서 유종호는 지용의 시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1920년대에 출중한 시편을 보여주면서 1935년에 처녀시집을 상자했고, 1941년에 분명희 시인으로서의 성숙을 보여주는 제 2시집을 간행한 정지용에 와서 비로소 우리는 20세기 최초의 직업적 전문적 시인을 보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러한 판단은 작품의 성취도나 어느 정도의 작품적 균질감이나 20년에 걸친 지속적인 정진과 관련되지만 무엇보다고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사실을 열렬히 자각했다는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7)
이러한 문학사적 평가는 지용이 문학사에서 사라져버렸을 때 1960년대부터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시적 기치와 중요성을 설파한 유종호 교수의 남다른 시각이 돋보이는 지적이라고 할 것이다. 20세기 최초의 직업적 전문시인으로서 지용의 문학적 의미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유종호를 비롯한 많은 문학적 지지자가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동호 또한 같은 포럼에서 정지용의 문학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탄신 백주년을 맞아 정지용의 문학사적 의미를 돌이켜보니 그가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는 말을 새삼 음미하게 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거론한 바대로 성정의 미학에 근거하여 한국 현대시를 주체적으로 환골탈태시켰다는 것이 그 첫째요, 다음으로는 이상의 시를 카톨릭청년에 소개하고,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하였으며, 해방 후 윤동주의 저항시를 경향신문에 소개하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상의 서구적 근대 감각,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의 전통적 서정의 감각, 그리고 윤동주의 저항시적 감각 등의 세 가지 시적 감각들이 우리 시문학사에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점에서 정지용은 가히 한국 현대시사의 결정적인 이정표가 된다.8)
위의 시각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우선 시적 전통의 현대적 혁신이 그것이요 다음이 서구적 근대 감각과 전통 서정시의 감각을 되살려 문학사적 흐름의 연속성이며 마지막으로 윤동주를 부활시킴으로서 식민치하의 저항시의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겨 놓았다는 점 등이 세 가지 측면이다.
앞으로 정지용보다 더 화려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시인은 출현할 것이다. 그러나 정지용이 20세기 한국현대시사에 미친 것과 같이 깊고 넓은 문학사적 의미를 갖는 시인은 쉽게 탄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지용 이전에 김소월과 한용운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정지용만큼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투시하고 향토적인 어휘를 구사한 시인들은 아니었으며, 지용시에 이르러 한국어는 현대적 의미의 모국어로서 민족 언어의 완성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국인들은 20세기가 전반의 식민지 시대 그리고 후반의 분단시대를 살아야 했던 까닭에 많은 한국인들은 물론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지용이 겪어야 했던 인간적 고뇌와 비극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차지한 문학적 위업은 그가 윤동주를 논하면서 말한 <弱肉强骨>의 것으로 우리 문학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험란한 인생도정은 그 개인에게 인간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에 틀림없으나 오히려 그의 문학적 불멸성을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지하의 지용이여, 고달픈 삶의 애환을 떨쳐버리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고향땅에 고이 명목하시라.
1) 이 글에서 시의 인용은 정지용전집 1 시집(민음사,1988)에 의함.
2) 정지용 전집에는 「바다 9」로 1935년에 간행된 정지용 시집에는 「바다 2」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정지용 시집을 따른다.
3) 최동호, 「난삽한 지용 시의 “바다시편”의 해석」, 디지탈 문화와 생태시학, (문학동네, 2000), 152-171쪽 참조
4) 김학동, 정지용연구(민음사,1987)38 쪽.
5) 최동호 , 「지용의 산수시와 은일의 정신」, 불확정 시대의 문학(문학과 지성사,1987)11-43쪽 참조.
6) 최동호 , 「장수산과 백록담의 세계」 , 현대시의 정신사 (열음사.1985) 310-324쪽 참조.
7) 유종호, 「정지용의 당대수용과 비판」, 문학포럼-정지용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옥천군 옥천문화원 지용회,2002. 5), 14쪽.
8) 최동호, 「정지용의 산수시와 성정의 시학」, 위의 책, 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