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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선(五種禪) / 청화 큰스님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는 오랜 기다림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단박에 무엇이 이루어지고 무슨 공덕이 나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서 몇 년이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공(功)이 성숙되고
마치 씨앗을 뿌리면 그 종자가 땅 속에서 싹이 나고
꽃이 핀 다음에 비로소 열매를 맺듯이
우리 참선 공부도 그렇게 공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자를 뿌리고 싹이 트고 자라고 익어지고
그래서 여물어진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승려가 되어서 줄곧 참선만 했고,
참선에 가히 미쳤다고 하는 사람인데도 역시 한 사십이 넘어서니까
비로소 조금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무슨 견성오도(見性悟道) 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인후개통 획감로미(咽喉開通 獲甘露味)라,
목구멍이 툭 틔어서 감로 맛을 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항시
목구멍이 칼칼하고 머리가 근질거리고 몸이 무겁고 그럽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애쓰고 하다보면
미련한 사람도 차근차근 맑아져 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가서는
이 몸뚱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가볍고,
걸을 때도 공중으로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가옵니다.
오랫동안 참는 것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따라서 참선은 오랫동안 참는 것입니다.
참고 하다보면 어느 때에 가서 문득 별보고 깨닫고,
바람소리에 깨닫고, 깨닫는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참지 못하고 중간에 그르쳐 버립니다.
그래버리면 그저 참선했다는 것뿐이지,
그 동안의 공은 다 허물어지겠지요.
그러고서 다시 새판을 잡으려면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상시에 차근차근 책을 보거나,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항시 진여불성의 본체를 안 여의면 손해가 없습니다.
오종선이라,
참선이라는 것이 순수한 선 하나뿐인 것이지만
중생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일하는 쪽에다 관심을 두고
조사 스님들이 풀이한 것이 있으니까 소개를 해드립니다.
오종선, 이것은 도서(都序)에 있는
종밀선사(宗密禪師)의 풀이를 옮긴 것입니다.
오종선이라, 다섯 종류의 선이란 말입니다.
외도(外道)가 하는 외도선(外道禪),
또는 범부 중생이 하는 범부선(凡夫禪),
또 소승이 하는 소승선(小乘禪),
최상승선(最上升禪), 이것을 오종선이라 합니다.
오종선(五種禪)
1. 외도선(外道禪):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2. 범부선(凡夫禪):인과(因果)를 신(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3. 소승선(小乘禪):아공(我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4. 대승선(大乘禪):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5. 최상승선(最上升禪):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을 원만히 구족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禪).
외도선은 불도가 아닌 외도들이 호흡법이나 마인드 컨트롤 등
요새 별스러운 것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외도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因果)도 믿지 않고
그냥 참선을 하면 몸도 가볍고 건강도 도모하고
스테미너를 증진시키는 따위의 공덕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텔레파시로 사람들의 생각도 알아맞히고 하는
그런 유위공덕(有爲功德),
인과를 믿지 않는 단계에서 하는 선을 외도선(外道禪)이라 합니다.
유루공덕(有漏功德), 이것은 때 묻은 공덕입니다.
말하자면 상(相)을 떠나지 못한,
자기라는 관념(觀念)을 떠나지 못한 공덕은 다 때 묻은 공덕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떠나버린 공덕이 되어야 무루공덕(無漏功德)이라,
때 묻지 않은 공덕입니다.
그러나 외도인들은 무아(無我)라는 관념이 없으니까
항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때 묻은 공덕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선 이것은 비록 상(相)을 떠나버리지는 못했더라도
외도꾼 같이 때 묻은 공덕은 아닙니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이라,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일반중생의 공덕을 위해서 하는 선이 범부선(凡夫禪)입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선(善)을 행하면
반드시 안락(安樂)의 과보(果報)가 있고
악(惡)을 행하면 또 그 원인으로 인해서
고통의 보(報)가 따른다는 게 인과의 법칙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정도로
소박하게 인과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외도꾼들은 인과를 믿지 않으니까
함부로 사기도 치고 뇌물도 먹고 하겠지요.
그러나 인과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가 사기를 치고 뇌물을 먹고 나쁜 짓을 하면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업보를 받으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이 혹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은 인과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인과를 믿으면 부도덕한 행동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악보(惡報)를 받아
인생의 고과(苦果)가 따르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소승선 이것은 범부선보다는 좀 더 높아서 아공(我空)이라,
본래 나(我)라는 것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四大)가
잠시간 모인 것에 불과하고 우리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
감수하고 분별하고 느끼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간 모여 있을 뿐이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잠시간 모여서 무상(無常)한 것이
우리 범부인 아(我)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我)라는 것은 본래 비었다고(空) 생각하고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여기서의 아공(我空)은
오온개공(五蘊皆空) 까지는 미처 못 간 것입니다.
그냥 나타나는 이 몸뚱이라는 것은 원소가 모여서 잠시간 된 것이고
내 마음도 역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
분별하고 느끼고 감수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 모여서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공(我空)을 믿고 해탈을 위해서 닦는 선,
이것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따라서 자기 몸뚱이에 대한 관념을 무상으로 분명히 느껴야
이른바 소승선도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질긴 것이
자기(自己)라는 관념(觀念)입니다.
자기 몸뚱이, 또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 말입니다.
넷째로 대승선(大乘禪)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
자기도 비어 있지만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념이나 개념도
그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개념이나 자기라는 존재가 다 비었다고 믿고서
해탈(解脫)의 법을 닦는 것이 대승선(大乘禪)입니다.
여기까지 되면 그야말로 상당히 온 것이지요.
우리가 앉아서 망상도 하고 분별시비도 하는 것은
아공, 법공을 믿지 못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남에게 좀 섭섭한 일을 당하면 그걸 가지고 마음고생을 하고,
배고프면 고프다고 생각하고, 추우면 춥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만 망상이 생기고
진여불성 자리로 우리가 굳게 못 나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본래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법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움직여 가는 것이지
실지로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육조단경의 혜능스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 아무 자취가 없는 것이니 어느 곳에 가서 티끌인들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마음을 다 열어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다만 존재하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인
이 순수 생명자리 이것만 결국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空)에만 치우쳐 버려도 이것은 허무가 됩니다.
우리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그냥 말로만 느끼면
허무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실지로 닦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공(空)해지고 모두 텅 비어지면
그와 더불어서 진여불성의 광명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을 느껴도 닦아서 느끼는 사람은
공(空)에 떨어지지 않지만 말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느끼면 공에 떨어지고 맙니다.
다섯 번째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우리가 지금 문제시 하는 것은 최상승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양의 대승권에서 하는 참선이 최상승선이지요.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이 그것입니다.
여래선과 조사선의 싸움도 아주 치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통불교(會通佛敎)를 지향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의 도원선사 같은 분도
이런 문제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여래선, 조사선이란 말도 없었던 것이고
달마에서 육조까지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후대 중생들의 근기가 약해지니까 괜히 분별시비가 나와 가지고
여래선, 조사선을 서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싸우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공부가 조사선이고 여래선이고 그런 것이지,
그것은 바로 일체방편을 떠나서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는 무루지성품(無漏知性品)이 구족(具足)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는
일체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닦아야 참다운 여래선이고 조사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最上乘禪) 즉,
외도선이나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등을 훌쩍 뛰어 넘어서
최고의 정상인 최상승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내 마음 가운데는
모든 무량공덕이 다 들어있으며,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참구하는 선이 되어야 이른바
가장 고도한 참선인 최상승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꼭 그렇게 하셔야 부처님 뜻을 따르는 것이고
또, 달마에서 육조까지의 순수한 순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른바 안심 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이 항시 편안합니다.
내가 지금 못 나고 못 배웠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인은 무식해도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마음자리만 바로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문적으로 팔만대장경을 다 독파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성자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하나의 마음인 것이고,
불성 가운데는 때 묻지 않은 일체공덕이 다 갖춰져 있고,
때 묻지 않은 무루공덕이 본래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오로지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요,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화두를 들어도 좋고 들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다.
참선공부는 여러분들께서 평생을 해야 할 공부입니다.
평생 동안 해야 할 가장 절실한 공부가 바로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인 참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됩니다.
허튼 짓을 하면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해도, 너무 욕심을 부려도 참선에 장애가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어느 존재나 다 진여 연기법으로 해서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고, 좋아하고, 욕심내고,
집단 이기심이나 개인 이기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진여불성 자리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모양은 참선 모양을 내면서 마음은
탐욕과 어리석은 그대로 있으면 참선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나타내는 행동과 입으로 하는 말과 생각하는 뜻이
모두 다 진리에 맞게 나아가야 참다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되풀이 합니다.
최상승선이라, 이것은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을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禪)을 최상승선이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처럼 고도한 최상승선의 참선법은
먼저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이치를 모르고 덮어놓고 하면은 최고의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달마스님께서도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치로(理入과 行入)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마선이란 이치로 먼저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라,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본래 부처라는 이 말을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처음부터서 부처란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나한테는 잘나나 못나나,
늙으나, 젊으나 누구나가 다
법신부처님의 무량공덕이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나, 자비나, 원력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믿어야 본래 부처라는 의미가 됩니다.
믿어도 그냥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해(信解)라, 믿어 의심치 않고
이치적 체계를 세워야 신해(信解)가 됩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해(解)는 못되고 가까스로 신(信)만 되겠지요.
부처님 법문은 조금도 빠뜨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소중한 것입니다.
더러는 ‘경(經)은 필요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경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필요 없는 말씀을 하셨을 리가 만무할 것이고
필요 없는 것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천 오백년 동안을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해 왔겠습니까?
다 우리 마음의 때를 없애고
우리를 부처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최상승선,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淸華 大宗師 『마음의 고향』-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