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길(아가서 5장과 6장에서)
2022년 7월 31일 주일오전예배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아가서 5장과 6장을 중심으로 ‘성도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깨어 있는 마음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아5:2)
아가서 5장 전체는 주님의 신부된 우리 각자가 신랑 되신 내 주님께 대하여 얼마나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주님께 더딘 마음과 삶으로 인해 다가오신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다가오시는 발자국 소리, 내 주님이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는 그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주님을 영접해야 마땅한데도 말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아가면서 참 느끼는 바는 우리 주님은 억지가 아니라 참으로 인격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내 주님을 향한 그리움 속에 기다리는 성도라면 밤에도 낮에도 깨어 있고자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고도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자를 향해서 주님은 당신의 원함을 말씀해주시고 주님의 돕는 자로 섬길 바를 명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주님을 사랑하므로 깨어 근신하는 마음은 주님께 속한 귀 뚫은 종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기드온 사사 시대에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과 함께 물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깨어 근신하며 마시는 자들로 선발했는데 그들이 바로 기드온 삼백 용사들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사울 왕의 사위였을지라도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인해 사울 왕이 던지는 단창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울 왕에게 쫓기는 형편에서도 사울 왕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음에도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살려주었습니다.
열왕기하서 13장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몸은 비록 죽을병에 걸렸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살아 있었고 주님의 안목으로 깨어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의 스승 엘리야처럼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주인 나발 때문에 온 집안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아비가일은 지혜있고 깨어 있는 마음과 민첩한 행동으로 의분에 찬 다윗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근무 중에도, 학생은 공부하는 가운데에서, 주부들은 가사를 돌보면서도 그 일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얼마든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가한 정오 시간에 그날은 왠지 모르게 장막 문 앞에 서 있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앞을 지나가는 천사들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아브라함이었기에 소돔 성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의 가정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에만 매여 있었다면 결코 깨어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줄 압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큰 성 여리고를 주님과 함께 깨어 있는 마음으로 무너뜨려 대승리를 거두었어도 그 승리감에 도취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안일한 생각으로 주님께 묻지도 않고 나아갔던 아이 성 일차 전투는 이미 패배가 당연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우리는 스스로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모를 전적으로 따르는 어린아이처럼, 내 목자만을 따르는 양처럼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며 즉각 따라야 할 줄 압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 한 시간만이라도 깨어 있는 기도를 통해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대로 우리의 경험대로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주님과의 깨어 있는 사귐 속에 깨어 있는 생활이 흘러나오고 열매는 그 길에서 자연스럽게 맺혀갈 줄 압니다.
오늘의 내 주님 향해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길 가는 자가 주님의 신부요, 주님이 찾으시는 성도인 것입니다.
둘째, 내 주님의 다스림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아 6:2)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 생각지도 못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 보디발의 오해를 받아 더 깊은 골짜기라 할 수 있는 감옥살이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고자 했던 요셉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요셉 한 사람을 이스라엘의 양 떼처럼 생각하시던 하나님이 요셉을 더 주님께 합당한 자로 만드시고자 아름다운 백합화를 꺾듯이 주님은 요셉을 다스려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주님의 증인된 사도 바울 선생님과 형제 실라가 모함에 의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그들은 매를 많이 맞았고 착고가 채이고 쇠사슬에 매어 있었지만 주님으로 인한 두 형제의 영적 자유와 행복은 찬송과 기도 소리로 온 감옥에 메아리쳤습니다.
지금부터 삼백년 전 프랑스에서 살았던 쟌느 귀용부인은 당시 카톨릭의 종교생활에 매이지 않고 복음 안에서 주님을 실제적으로 모시고 사는 일로 수녀원 감방에서 죄수 생활을 했습니다. 귀족이라는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그녀의 두 날개는 꺾이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 주어진 감옥 생활은 그녀를 더욱 값진 하나님 나라의 진주로 형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스림 속에 그녀의 영향력은 그 당시에 어두웠던 그 세대에 주님과 복음을 드러내는 밝은 빛이 되었습니다. 성도가 천국 가는 길에서 내 뜻대로가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그래서 주님 한 분만 바라보도록 하시는 주님의 다스림은 생각할수록 소중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주님 모신 기도생활이 전부였던 사무엘도 나이가 든 노인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 선지자가 은퇴를 하고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우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말씀했던 사무엘은 백성들 앞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뼈에 새겨진 주님의 종으로서 일생동안 왕 되신 주님께 철저히 다스림을 받은 대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 쉬는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거인 골리앗을 앞세우고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은 왕자 요나단에게 기대를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베들레헴의 목동 소년 다윗이었고, 요나단은 주어진 마음을 따라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사십 일간 그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주님이 주신 믿음의 마음을 따라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은 요나단이었을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진 영웅이자 왕자였던 요나단은 은밀히 보시는 주님께 매여 살았고 주님의 다스림이 살아 있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명성보다는 다윗에게 향하는 칭찬과 명성을 참으로 축하하고 존중히 여기는 모습이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외아들이셨지만 이 땅에 계실 때는 미천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기뻐하셨고,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길 가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다스림 속에 살고자 하는 깨어 있는 성도들을 통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은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