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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삶의꽃밭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stella
나의 예수님. 나의 목사님
1998년 9월23일 익산 청복교회 [영적 대각성 전도집회] 에서 간증했었던 (간증문)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태리유학, 외환위기로 인한 휴학 중에)
제1부. 간 증 문
1, 예수 믿기 이전의 상태
+ 기도 + <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그 은혜를 체험하고 주의 거룩함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이 시간 전부를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고, 감사드리나이다. 원하옵기는 주님의 주님이심을 자랑하는 저에게는 교만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옵고, 이 간증을 듣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는 이 시간에 오로지 영적 안테나를 최대한 높이 세우시어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저는 친할머니께서 성당에 다니신 탓으로 초년 시절엔 큰집 언니를 따라서 성당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16살에 영세를 받았고요. 그러나 외가 쪽으로는 정반대로 독실한 불교 집안였습니다.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어머니까지 출가하여 머리만 깎지 않았지, 비구니나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하루는 어머니께서 성당에 나가지 못하게 성서와 미사포를 뺏으시며 야단을 치셨던 일도 기억납니다. 또 여고시절 아주 가까운 친구가 저를 구원시켜 보려고 애를 썼지만 계속 성당에만 나가는 이유로 끝내 우정이 깨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4년 6월 제가 조각공부를 하기 위해 Italy로 유학을 가서도 그 곳 한인 성당에 줄곧 다녔답니다. 특히 Italy란 나라는 '카톨릭 총본산'이어서 성당에 다녔던 저 한테는 새로운 기대가 은근히 있었던 것도 사실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당에 나가고 싶은 열의가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믿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한 때는 미신을 믿었고, 점쟁이나, 철학관에 찾아 가는 걸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2. 예수 믿게 된 동기
1995년 8월 중순경 저는 Italy에서 언어학교를 마치고 로마 국립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입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담낭암으로 3개월 밖에 살지 못하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은 저를 다른 형제들 보다 더욱 안타까움과 방황, 불안케 했습니다. 마흔이 다 되어 유학을 떠나는 제게 어머니는 가장 든든한 정신적인 지주이자 후원자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유당시절부터 정치부 기자로서 언론계에 종사하셨으나, 이미 1991년 말에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얼마나 허우적거리며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절박한 상태에서는 신부님을 찾아 갔어야 하는데 로마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 목사님 댁을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미 하나님께선 저를 인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 판단은 목사님한테 찾아가서 사정을 애원하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것 같았고, 3개월 밖에 살지 못할 거라면 3년이라도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해 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그래서 찾아 간 목사님께 무조건 "우리 엄마를 살게 해주세요. 울 엄마가 담낭암으로 3개월 밖에 살지 못하신답니다. 지금 돌아가시면 안돼요. 타국에 나와 있는 저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 하면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처음 뵈 온 목사님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애원을 했습니다.
제 얘기를 들으신 목사님과 사모님께서도 어찌 할 줄 모르고 당황하시는 기색이셨지만 저를 위로하시면서 진지하게 하시는 말씀이 " 돌아가시고 안 돌아가시는 것은 하나님 뜻입니다. 다만 천국에 가실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빨리 한국의 가족에게 전화하여 어머니를 예수 믿게 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어머니의 영혼은 물론 우리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 댁을 나와 바로 제 밑에 있는 여동생에게 한국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 동생은 결혼해서부터 서울 망우동 금란교회를 나가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전도 하기엔 가장 적임자였습니다.동생도 기뻐하면서 내 의견에 동참한 건 당연했습니다. 마침, 어머니께서는 풍납동 아산병원에 입원해 계셨기 때문에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걱정이 되어 동생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동생이 괴롭고 울상이 되어 하는 말이 엄마를 전도하려고 전도사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더니 엄마가 마구 화를 내시면서 "예수 믿으려면 너나 잘 믿어라, 나는 죽으면 그냥 죽지, 예수 믿고 죽진 않겠다" 는 것 이었고, 다음부터 너, 나 예수 믿게 하려면 병원에도 오지 말라고 하신다는 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저는 "그래 40년 동안이나 절에 다니셨는데 한 두번 설득해서 받아들이시겠니? 더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거야" 라고 동생을 위로했습니다.
얼마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섬세하신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한 영혼의 구원을 책임지실 사명감있는 전도사님을 통하여 결국 어머니께서는 하늘나라 가시기 꼭 한 달을 남겨놓고 아주 순수하고 완전하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셨습니다.(할렐루야!) 또한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셨던 것은 어머님을 비롯해서 우리 5남매를 구원해준 전도사님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신 것 이었습니다.
예를들면. 어머니께서 서울에서 익산의 원광대 병원으로 옮겨 와 계실 때에도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 그 시간에 서울에서 익산까지 밤차로 내려오셔서 어머님을 문병하고 기도해주셨으며, 어머님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바쁜 일과를 제쳐놓고 어머니를 찾아 뵙고 하셨던 일이 그야말로 한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실 저도 로마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병실로 국제 전화를 드렸는데요. 하루는 어머니께서 " 얘, 혜성아! 기도 많이 하고 찬송 많이 해라!"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정말이지 온 몸이 전율하는 그런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무사히 로마국립미술대학의 입학 시험을 치루게 되었고 합격을 했습니다. 그 때에 다시 한국에 있는 동생들의 통화는 어머니께서 95년 11월을 넘기지 못할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랍니다. 이제 그리도 애타왔던 한국으로 어머니께서 병고를 치루고 계시는 고국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1995년 12월 1일 비행기표를 예매해 놓고 어머니가 계시는 병실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 엄마! 나, 입학시험도 붙었고, 12월 1일 출발하면 다음 날 일요일 2일 도착하니까 병원으로 바로 갈께요." 그 때는 어머니께서 병세가 좀 호전되어 서울 아산병원에서 퇴원하시고 익산 원광대 병원으로 와 계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분명히 " 그래라!" 라고 대답하셨는데..... 어머니는 저하고 통화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995년 11월 28일 그렇게 어머니는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상하게도 어머님에게 복음을 전한 서울 금란교회 전도사님을 통해서 우리 형제를 익산의 청복교회로(최광렬 목사님 시무) 인도해 주셨습니다. 청복교회의 따뜻한 도움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을 은혜롭게 거행토록 하셨고, 우리 5남매에게 구원의 축복과 함께 하나님의 살아 역사 하심을 체험하게 도우셨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찬송을 올리고 싶습니다. 이 찬송은 어머니께서 생전에 가장 즐겨 부르셨고, 좋아하셨답니다.
계속~~
(찬송가 544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성가대와 전 교인 찬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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