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崔冲)은 자가 호연(浩然)이며, 해주(海州) 대령군(大寧郡) 사람이다. 풍채가 훌륭하고 컸으며, 천성과 지조는 굳고 곧았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목종(穆宗) 8년(1005), 갑과(甲科) 장원에 발탁되었고, 현종(顯宗) 때에는 습유(拾遺)·보궐(補闕)·한림학사(翰林學士)·예부시랑(禮部侍郞)·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덕종(德宗) 초에 〈최충이〉 우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右散奇常侍 同知中樞院事)로 옮겼는데, 〈왕에게〉 주문(奏文)을 올리기를, “성종(成宗) 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청 벽에, 『설원(說苑)』의 「6정(正)·6사(邪)」 글과 한(漢) 자사(刺史) 6조(條)의 영(令)을 써 붙였는데, 지금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마땅히 다시 그것을 써 붙여서, 관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삼가하고 힘쓸 바를 알게 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그것을 따랐다. 조금 있다가 〈최충이〉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 中樞使)에 임명되었다.
정종(靖宗) 때 〈최충에게〉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西北路兵馬事)를 제수하였는데, 왕은 최충(崔冲)에게 명령하기를 변경으로 가서 성과 해자를 척정(拓定)하라고 하였으며 옷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다. 최충이 영원진(寧遠鎭)·평로진(平虜鎭) 및 여러 보루 14개를 설치하고 돌아오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올리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 修國史 上柱國)을 더하였으며, 얼마 뒤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옮겼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최충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명령하기를 율령(律令)·서산(書算)을 상고하여 〈제도를〉 정하게 하였으며, 수태보(守太保)를 더하였다.
〈문종〉 4년(1050)에 〈최충에게〉 다시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 守太傅)를 더하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최충(崔冲)이 시중(侍中)으로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어 주문(奏文)을 올리기를, “지난 해 서북지방의 주(州)와 진(鎭)에 곡식이 익지 못하여 백성들이 궁핍하며, 남자는 부역으로 피곤하고 여자는 징세에 지쳐 있습니다. 청컨대 성과 해자를 수리하는 일 외에 모든 토목공사는 모두 금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니, 〈왕이〉 그것을 따랐다.
〈최충이〉 또 주문(奏文)을 올리기를,“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염한(塩漢) 등 86 명이,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다가, 지금 개경의 객관에 억류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랑캐들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서 형벌과 법으로 다스릴 수 없고 인의(仁義)로 교화할 수도 없습니다. 강제로 억류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首丘之心]이, 분명히 깊어 성내고 원망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에게〉 드는 비용이 매우 많으니, 청컨대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소서.”라고 하니, 〈왕이〉 그것을 따랐다.
이듬해 〈최충은〉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가 되었으며, 내사시랑(內史侍郞) 왕총지(王寵之) 등과 함께 주문(奏文)을 올리기를, “과거 급제자 이신석(李申錫)은 씨족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조정에 오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문하시랑(門下侍郞) 김원충(金元冲)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김정준(金廷俊)이 주문을 올리기를, “씨족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 조부와 부친의 잘못이지, 이신석의 죄가 아닙니다. 하물며 글공부[翰墨]에 오랫동안 힘써서 염전(簾前)〈복시(覆試)〉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捷第]하였고, 그 자신에게 허물이 없으니 관직[簪紳]의 반열에 있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최충 등이 아뢴 것은 진실로 마땅한 법도이지만, 어진 사람을 기용하는 데는 정해둔 방식이 없으니, 마땅히 고집하지 말고 김원충 등이 아뢴 대로 따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문종〉 7년(1053)에 최충(崔冲)이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간청하니, 〈왕이〉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시중(侍中) 최충은 여러 대에 걸쳐 유학의 대가이며, 삼한(三韓)의 덕이 높은 어른이다. 지금 비록 노퇴(老退)를 요청하나, 차마 윤허할 수 없다.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옛 법도를 살펴 안석과 지팡이[几杖]를 하사하고 일을 보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다시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推忠贊道協謨同德致理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師 兼門下侍中 上柱國)을 더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에 내사령(內史令)을 더하고 곧 치사하게 하였다. 최충은 왕이 사자를 집으로 보내어 임명장[告身]과 예물을 하사한다는 말을 듣고 글을 올려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관직에 나온 이래 보좌하지 못하면서 힘은 다하고 나이 들어 감히 물러날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직책을 완수하지 못하였어도[坐尸] 넉넉한 녹봉을 받아, 이미 각별한 은총[殊私]을 받았습니다. 지금 또 특별히 명륜(明綸)을 내리심을 입고, 사자를 대궐[雲宵]에서 보내시어 마을에까지 영광을 미치게 하시니 분수를 헤아려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가득차면 손해를 부르니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간청하옵건대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고, 새로운 은총은 바로 그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김원정(金元鼎)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왕무숭(王懋崇)을 보내어 〈그의〉 집에 가서 조서를 하사하게 하니 이르기를, “경은 유학의 모범[圭臬]이며, 덕화를 빛냈도다[神化丹靑]. 문필로 역대 임금을 섬기고, 문장으로 나라를 빛내었으며, 삼공의 지위에 올라 국정을 다스리니, 공적이 기록됨이 당연하오. 비록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지만, 지난날의 덕을 잊지 못하여, 다시 재상[黃扉]의 품계로 승진시키고, 또한 저택[綠野堂]을 영화롭게 하려 하오. 이제 경에게 내사령(內史令) 치사를 제수하는 임명장[告身] 1통과, 아울러 의대(衣帶)·은그릇·채단(綵段)·포화(布貨)·안장 달린 말(鞍馬) 등의 물품을 하사하오.”라고 하였다. 관고(官誥)에 이르기를, “어진 신하가 있어야 성군이 되는 것이니, 순임금은 8명의 인재를 기용하였다. 선비를 얻은 나라는 번창하게 되니, 주(周)나라[姬] 왕실은 4명의 현자를 맞이하였다. 혹은 그들에게 재상의 지위를 주기도 하고, 혹은 재상[宰衡]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들의〉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책을 채택하여 황제의 덕화를 빛내고, 올바르게 보필하는 지혜에 힘입어 임금의 묘책을 아름답게 수놓았다[黼黻]. 교화[於變之期]를 이르게 하고 무한한 복을 열었도다. 누가 옛날의 지혜로운 사람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짐은 그 사람을 얻었도다. 생각컨대 경은 본성이 온순하고 과묵하며, 성품은 넓고 총명하다. 당(唐)나라 영웅들이 성각(聖殼)에서 머리를 숙이고, 예형(禰衡)이 천자의 조정에 선 것 같다. 매우 높은 학문[萬丈金山]은 양(梁)나라 때 누가 주이(朱异)를 넘어서고, 뛰어난 재능[一枝丹桂]은 진(晉)나라의 신하들이 모두 극선(郄詵)을 우러러 본 것과 같다. 다재다능으로 말하면 숙향(叔向)이 수레바퀴를 지킬 것이요, 박식으로 논하자면 장화(張華)가 자리를 피할 것이다. 임금의 부름[芝詔]에 명백히 답하였으므로 발탁되어 삼공(三公)의 벼슬[槐司]로 들어왔고, 헌원(軒轅)의 꿈에 상서로움이 펼쳐져 풍후(風后)와의 만남에 화합한 것이며, 주(周)나라의 시가 아름답게 이루어져 첨석(瞻石)의 노래[謠]를 실어 드러낸 것이다. 대각(臺閣)의 본보기로 뭇사람들이 두여회(杜如晦)처럼 추앙하였고, 인륜(人倫)의 영수(領袖)로는 당대 사람들이 위서(魏舒)와 같이 받아들였다. 군신이 화합한다는[咸有] 칭찬을 성대히 전하였고, 재상의 임무[惟幾之務]를 모두 바로잡았도다. 근래에 나이가 80살[耄]도 아니고 아직 이가 빠지지도 않았는데, 일찍부터 요직의 권력을 사양하여 집으로 돌아가 관직을 물러나는[懸輿] 바람을 이루었도다. 하지장(賀知章)은 호숫가에서 비록 마음대로 즐겁게 놀았지만, 도홍경(陶弘景)은 산 속에서 항상 큰 일을 자문받았다. 예전에는 〈경의〉 행동이 백성들의 규범이 되었고 이제는 앉아서 백성들의 스승이 되니, 지극히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지 않는다면, 어찌 이름 붙이기 어려울 정도의 〈큰〉 덕을 표창할 수 있겠는가? 이제 중서성(中書省)에서 최고의 품계로 올려 최고의 반열에 앉힘으로써 영예를 드높이고자 한다. 아아!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주는 것은 임금과 어버이의 당연한 은총이자 권장할만한 것이니, 짐은 여기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은 재상이 힘써 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힘써 행할 바이다. 〈그대는〉 천하를 다스리는 책략을 힘써 베풀어 굉강(肱康)한 국운이 이르도록 하고, 〈우리 왕실을〉 순임금과 주 왕실 같이 편안하게 함으로써, 8명의 인재와 4명의 현자만 오로지 기려지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후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바꾸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라 하니, 최충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최충이 비록 〈은퇴하여〉 집에 거하였으나, 군국의 대사는 모두 〈그에게〉 가서 자문하였다. 여러 차례 덧붙여 공신호를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라고 하였다.
〈최충이 문종〉 22년(1068)에 죽으니 왕이 태의감(太醫監) 이염(李塩)을 보내어 그의 아들 최유선(崔惟善) 등에게 조서를 내려 조문하여 이르기를, “경의 부친은 사람들 중 어질고 능력 있었으며[威鳳] 조정 고관[朝右]의 으뜸가는 귀감[元龜]이었다. 제(齊)나라를 노(魯)나라로 변화시키는 〈훌륭한〉 문장을 지녀 일찍이 재상[大輔]에 올랐고 두고두고 되씹어야 할 위대한 계책들을 떨쳐 대대로 성세[昌辰]를 도왔으니, 그 공적이 훌륭하여 사서[史冊]에 항상 빛날 것이다. 재상의 지위[蟬璫]에 이르러서는 경사(慶事)를 남겨서 여러 벼슬[冠冕]하는 자손들에게 주었다. 비둘기가 새겨진 지팡이[鳩杖]를 받고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악기[琴笙]와 서적[墳典]을 즐겼다. 누워서도 임금[宸極]을 도와 막대기가 드리운 울타리처럼 든든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홀연히 공자[宣尼]께서 돌아가신 것과 같이 슬프다. 생각하면 백번 죽더라도 살려내기 어려우니 온 나라가 거듭 슬퍼하도다. 경들은 갑자기 집안의 우환을 만나 더욱 집안의 근심이 깊을 것이다. 마땅히 효도하고 추모하는 예에 힘써야하겠지만, 몸을 훼손할 정도의 슬픔은 일으키지 말라.”라고 하였다.
현종(顯宗) 이후 전쟁이 겨우 멈추었으나 학문으로 교화하기[文敎]에는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최충(崔冲)이 후진들을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니, 학도들이 줄지어 모여들어 거리에 차고 넘쳤다. 마침내 9재(齋)로 나누었는데, 이르기를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라 하고, 이를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라고 불렀다.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제는 반드시 먼저 학도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매년 여름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 여름 공부[夏課]를 하였는데, 생도 가운데 급제하고 학문은 우수하나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을 택하여 교도(敎導)로 삼아 9경(經)‧3사(史)를 가르치게 하였다. 어쩌다 선배가 내방하면 초에 금을 그어 놓고 시를 지었으며, 그 석차를 게시하고 이름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조촐한 잔치[小酌]를 베풀었다. 어린이와 성인[冠]이 좌우로 줄을 지어서 술잔과 안주그릇을 받드는데, 나아가고 물러남에 예절이 있었으며 연장자와 연소자간에 차례가 있었다. 서로 〈시문을 지어〉 주고받다가 날이 저물게 되면, 다함께 「낙생영(洛生詠)」을 읊고 마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최충이〉 죽으니 시호를 문헌(文憲)이라 하였다. 후에 대개 과거에 응시하려는 사람은 역시 모두 9재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으니, 이들을 일러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하였다. 또 유학자로 학도[徒]를 세운 사람이 11명이나 있었는데, 홍문공도(弘文公徒)는 시중(侍中) 정배걸(鄭倍傑)로 일명 웅천도(熊川徒)라고도 하고, 광헌공도(匡憲公徒)는 참지정사(叅知政事) 노단(盧旦), 남산도(南山徒)는 국자좨주(國子祭酒) 김상빈(金尙賓), 서원도(西園徒)는 상서복야(尙書僕射) 김무체(金無滯), 문충공도(文忠公徒)는 시랑(侍郞) 은정(殷鼎), 양신공도(良愼公徒)는 평장사(平章事) 김의진(金義珍)으로 일설에는 낭중(郎中) 박명보(朴明保)라고도 하며, 정경공도(貞敬公徒)는 평장사 황영(黃瑩), 충평공도(忠平公徒)는 유감(柳監), 정헌공도(貞憲公徒)는, 시중 문정(文正), 서시랑도(徐侍郞徒)는 서석(徐碩), 구산도(龜山徒)는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12도라 불렀는데, 최충의 학도가 가장 성하였다. 우리나라[東方]에서 학교가 일어난 것은, 대체로 최충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렀다.
선종(宣宗) 3년(1086)에 〈최충을〉 정종(靖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충의〉 아들들은 최유선(崔惟善)·최유길(崔惟吉)이다. 최유길은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은 최사추(崔思諏)인데, 「최사추전(崔思諏傳)」이 따로 있다. 최충의 자손은 문학과 덕행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