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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인천 96코스 역방향 제3부
창영초등학교-창영당-인천문화양조장-
배다리헌책방거리-개항로-경동감리교회-
인천자모원-경동사거리-신포문화의거리-
인천내동교회-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
맥아더장군동상-자유공원전망대-석정루-
연오정-자유공원입구-수호지벽화거리
2024년 8월 28일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새 문물을 맞이한 개항지의 역사와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아픔이 공존하는 굵직한 역사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는 코스
2)관광포인트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맥아더장군 동상이 있고 인천항이 한눈에 보이는 '인천자유공원'
- 일제강점기 때 응암산 줄기를 뚫어 축조한 무지개 모양의 돌문 '홍예문'
- 19세기부터 운영되던 시장으로 공갈빵, 닭강정 등 오래된 맛집이 많은 '신포국제시장'
3)여행정보(주의사항)
- 시점 : 인천시 중구 북성동3가 6-9 선린문 앞 자유공원 입구
교통편) 지하철 1호선 인천역에서 하차 후 도보 500m 이동
- 종점 : 인천시 서구 가정동 산21-51 대우하나아파트 버스정류장
교통편) 인천지하철 2호선 가정역에서 도보 800m
- 길이 14.4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
-주요경로 : 자유공원입구 3.1Km 송림오거리 4.3Km 가재울사거리 4.7Km 원적산 2.3Km 대우하나아파트 버스정류장
2.배다리헌책방거리와 응봉산 자유공원
제3부 : 창영초등학교 입구 동구민방위교육장 벽에 배다리역사문화마을의 역사적 장소를 알리는 사진과 내용을 적은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당대 구체적 현장 사진을 살피면 역사의 숨결이 가슴 속으로 흘러든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조계지에 들어서자 거주지를 잃은 조선인들이 삶의 터전을 옮겨와 마을을 형성한 배다리와 배다리시장, 인천 3.1운동의 함성이 시작된 곳으로, 1907년 개교한 인천 최초의 공립초등학교 창영초등학교, 1917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 1927년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 막걸리인 '소성주'를 생산한 인천 탁주의 발생지 인천양조장, 전쟁 이후 가난한 시절의 먹거리 1950년대의 꿀꿀이죽 거리 등을 순식간에 스쳐간다. 지난 시대를 밀어내는 새로운 시대의 물결이 회오리를 치며 하늘로 치솟아 오르다 땅으로 떨어진다. 아름다운 시대의 풍경은 언제나 무지개 저편에 있는 것이고 현재는 언제나 고단한 것일까? 1921년 인천주식회사 성냥공장 여공노동자들이 일으킨 동맹파업은 인천 최초의 여성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쟁의로 192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인촌주식회사 성냥공장 여공들의 노동쟁이가 192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창영초등학교 입구에서 최근에 생겨난 복합문화공간 창영당을 거쳐 배다리역사문화마을을 지나간다. 동성한의원은 한의원이 아닌 '문화상점 동성한의원'으로, '나비날다 책방', 제로 웨이스트 숍 '슬로슬로', 뜨개방 '실꽃', 식물가게 '뒤뜨레' 등 네 개의 상점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있다고 한다. 그곳을 지나면 문을 닫은 인천양조장을 개조한 인천문화양조장이 나오고, 금곡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배다리헌책방거리가 이어진다. 배다리헌책방거리는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됐으며, 한때 책방이 50여 곳에 이르러, 전국에서도 이름난 거리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개성 있는 독립 서점, 카페, 음식점, 예술인 창작소들이 배다리헌책방거리에 자리하여 이곳을 새로운 문화예술의 거리로 장식하고 있다.
배다리헌책방거리를 지나 수도권전철1호선 경인선 아래를 통과하면 배다리사거리. 참외전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왼쪽 위로 개항로가 이어진다. 배다리사거리 지역은 동구와 중구의 경계로, 서해랑길은 창영동과 금곡동에서 중구 경동으로 넘어와 개항로를 따라 올라간다. 왜 경동일까? 인천 개항지에서 서울로 가려면 싸리나무가 많은 싸리재고개를 넘어 예전에 쇠뿔고개라 불린 창영동 지역을 통과하기에, 서울로 가기 위해 지나는 동네라고 하여 경동(京洞)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중구 경동 개항로는 싸리재고개를 넘어 경동사거리에서 신포문화의거리로 이어지는, 개항 이후 인천의 새로운 문물과 문명을 꽃피운 곳이다. 현재 개항로는 사라진 시대의 추억을 기념하는 건물과 새로운 시대의 문명을 기리는 상점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골동품상점, 그리고 옛 시대 양식으로 장식한 복고풍 가구점과 새로운 양식의 가구점들이 늘어서 있는 가구점 거리를 지나면, 싸리재고개에 이른다. 언덕에는 인천기독병원과 경동감리교회가 자리하고 그 아래에는 지난 시대 인천 영화의 중심지 시네마거리가 펼쳐지고, 1895년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 지금은 이름을 바꾼 애관극장이 있다. 애관극장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60년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싸리재를 넘어 개항로를 따라 경동사거리 개항로 동쪽 출입구로 곧바로 내려가지 않는다. 애관극장 직전, 개항로에서 답동성당으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들어가 인천자모원을 거쳐 답동성당 입구 우현로로 내려와 우현로를 건너 경동사거리 개항로 서쪽 출입구로 올라간다. 경동사거리는 개항로와 우현로가 교차하는데, 우현로는 인천 용동 출신인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을 기리는 도로이다. 그의 경주를 예찬하는 글이 적힌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비석은 대종천이 동해 바다로 유입되는 경주 '신라동해구' 언덕에 세워져 있다.
경동사거리 개항로 서쪽 출입구에서 이어지는 개항로는 신포문화의거리, 인천 패션의 중심지이다. 서울의 명동거리에 해당하는 인천 신포 패션거리는 휘황찬란하여 눈이 휘둥그래진다. 서울 촌놈은 휘황찬란한 인천 패션거리에 넋이 빠져, 황홀하게 패션거리를 따라가다가 서해랑길을 잃고 지나쳤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서해랑길이 갈라지는 신포국제시장 앞으로 되돌아왔다. 패션거리의 신포국제시장은 인천 최초로 개설된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닭강정, 왕만두, 공갈빵, 쫄면 등의 주전부리로 유명한데, 특히 닭강정은 신포국제시장에서 처음 개발한 대표 메뉴라고 한다. 신포국제시장 구경은 시간이 모자라 구경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언덕길을 따라 올라 자유공원으로 향한다.
자유공원으로 가는 송학로로 올라서면 독특한 건물이 솟아 있다. 입구 표지판에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라고 적혀 있다. "아, 성공회성당 건물이로군. 서울 덕수궁 옆에 서울 성공회성당이 있는데." 성공회는 16세기 영국의 교회개혁운동으로 탄생한 영국 개신교로 우리나라에는 대한성공회가 있다. 1890년 영국 해군 종군신부였던 코르페(C.J. Corfe 한국명 고요한) 주교가 1891년 9월 30일 내동교회를 건축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공회 교회라고 한다. 내동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훼손된 부분을 수리해 사용하다가 1956년 복원했으며, 중세의 전통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양식을 고수한 바실리카양식으로 한국교회 건축양식으로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송학로를 따라 시간에 쫓겨 허걱거린다. 홍예문과 제물포구락부는 위치 확인도 못한 채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으로 들어섰다. 1889년 조성된 이 공원은 처음에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으로 불렸는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수복한 사적지임을 기념하여, 1957년 10월 3일 개천절에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과 함께 자유공원으로 개명되었다. 당당한 맥아더 장군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우뚝 서서 자유공원을 호령한다. 통일을 염원하는 비석과 통일목은 낮게 엎드려 있고, 자유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에워싸고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에서 자유공원 광장으로 내려왔다. 원래의 만국공원 터는 자유공원 광장 전망대가 있는 곳이라 한다. 전망대는 배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옆에 닻과 등대 모형물이 세워져 있는 전망대에서는 인천항을 조망할 수 있지만 탁 트여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아래 석정루 2층 누각에 오르면 인천항과 주변이 탁 트여 인천항과 월미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석정루 2층에서 인천항 연안부두를 가늠한다. 연안부두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백령도를 다녀온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때 김트리오의 노래 '연안부두' 노래비가 연안부두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김트리오의 어머니 이해연(1924~2019) 가수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그녀가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1956)는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였다. 그녀의 자식 2남1녀가 결성한 김트리오는 1979년 '연안부두' 노래를 불러 이별의 아픔을 낭만적으로 선물했으며, 이 노래는 인천 연고의 야구단 응원가로 인천 시민들이 현재도 사랑하고 있다. '연안부두' 노래를 불러 본다. 길손도 연안부두 노래와 함께 인천항과 작별한다. 그러나 항구의 쓸쓸한 이별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길손은 번영하는 인천, 번영 뒤에 숨겨진 역사의 흔적과 재회할 기쁨을 품은 이별을 노래한다. 안녕!
1절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2절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안개 속에 가물 가물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저무는 연안부두 외로운 불빛 홀로 선 이 마음을 달래주는데/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 작사/ 조운파, 작곡/ 안치행, 노래/ 김트리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5.9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24분(휴식시간 25분 포함)
창영초등학교 운동장 아래 동구민방위교육장 옆 벽에 인천의 3·1운동 발생지 안내판과 이 지역 관련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창영초등학교 입구 보행자 보호 도로난간대에 인천의 3·1운동 발상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창영초등학교 입구 보행자 보호 도로난간대에 수류탄 희생 강재구 소령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동구민방위교육장 벽에 창영동 관련 여러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이 만든 슬픈 음식 "창영동 꿀꿀이죽" : 창영동의 옛 이름은 우각리(牛角里)로 우리말로 쇠뿔고개이다. 우각리(쇠뿔고개)는 헌책방 삼거리에서 창영초등학교-인천세무서-전도관까지 오르는 언덕길로 소의 뿔처럼 휘어져 생긴 지명으로 19세기말 이후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옛날 인천서 서울을 갈 때 거치는 길목으로 경인철도가 생기기 전 사람들은 내동에서 싸리재를 거쳐, 다시 쇠뿔고개를 넘어 서울을 다니던 길이었다. 6.25전쟁 이후 창영동의 뒷골목을 중심으로 꿀꿀이죽 거리가 나타났다. 원래 창영동과 유동삼거리 사이의 건널목은 통행하는 인구가 많았는데 이 사잇길로 꿀꿀이죽 거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막일꾼, 노동자, 피난민, 지게꾼 같은 사람들의 끼니 해결을 위해 이용되었다. 전쟁 이후 먹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잔반으로 죽을 만들어 먹었다. 부대에서 나온 잔반으로 죽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에 따라 기억하는 바는 조금씩 달랐다. 햄, 소시지가 들어가는 고급음식이라 어려운 시절에는 먹을 수 없었다는 증언도 있었고, 부대 잔반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위가 상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그보다 어려운 사람들은 옥수수죽이나 학교에서 나온 미군원조 우유죽으로 끼니를 연명했다고 한다.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 “창영초등학교" :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1907년 관립 인천일어학교 교실을 빌려 전교생 3명의 '인천공립보통학교'로 출발했다. 학교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인천에서 만세운동을 처음 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학교에는 '독립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졸업생 중에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야구선수 류현진,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많은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순국한 강재구 소령, 한국 미학의 기틀을 마련한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있다. 이 밖에도 조진만 전 대법원장, 신태환 전 서울대 총장, 김은하 전 국회부의장, 이기상 전 인천시의회 의장,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이현부 전 육군 7군단장, 신용석 아시아경기유치위원장, 이원복 국회의원 등을 배출했다.
인천 최초의 여성 노동쟁의 현장 “조선인촌주식회사" : 1917년 금곡동 32번지에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으로 이곳은 한때 남녀직공 4백명이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생산하여 국내 소비량 20%를 공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1년 3월 하루 13시간 동안 1만개의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담아야 하는 살인적인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여공노동자들은 민족적 저항의식과 결합하여 동맹파업을 일으키는데, 이날의 파업은 인천 최초의 여성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쟁의로 192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인촌주식회사는 광복 이후에도 성냥생산을 계속하였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성냥사용이 줄어들면서, 점차 쇠퇴하였고 결국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폐업을 하게 되었다. 추후, 조선인촌주식회사 건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현대식건물(두손빌딩)이 들어서자 2019년 3월 동구청에서 그 옆에 있던 동인천우체국을 매입 리모델링하여 배다리마을 성냥박물관을 건립하여 그 때의 일을 기념하고 있다.
인천 탁주의 발생지 "인천양조장" : 인천양조장은 황해도 출신 상공인 최병두가 세운 공장이다. 최병두는 24세 때 인천에 정착하여 정미업을 하다가 1926년 여러 작은 막걸리 공장을 합병하여 배다리에 인천양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7년부터 가공하여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 막걸리인 '소성주'를 생산했다. 1974년 정부의 정책으로 대화·영화·창영 등 인천 소재 11개 양조장이 통합되면서 부평은 제1공장, 인천양조장은 제2공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자손들이 맡아 운영을 하다가, 1996년 막걸리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인 지하수가 예전 같지 않아 70년 동안 이어온 가동을 중단하고 현재는 청천동 공장에서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공장 가동이 중단된 이후, 2007년부터는 스페이스 빔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이 공간을 활용하여 양조장이었던 구조와 시설, 흔적들을 살리고 남은 물건들을 모아 별도로 보관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건물 간판을 '인천문화양조장'으로 바꾸고, 배다리 생태공동체마을 만들기 프로그램과 배다리전통주학교 프로그램 등 주민친화 및 지역공동체 형성을 위한 역할을 해가고 있다.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 “배다리와 배다리시장" : 배다리라는 명칭은 바닷물이 통하여 배가 드나들었던 갯골 주변을 지칭하던 말로서 지금의 배다리삼거리와 사거리 일대를 가리킨다. 1883년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조계지에 들어서자 거주지를 잃은 조선인들은 이 일대로 삶의 터전을 옮겨와 마을을 형성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20세기 초부터 '배다리시장'이 형성되었다. 시장에는 고기류와 생선류, 쌀 등의 식료품이 풍성하게 유통되었고 주변에는 이를 취급하는 여러 도매상회가 들어서면서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그만큼 과거 인천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다녀갔을 배다리시장은 매우 번화한 시장이었으며, 인천에서 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물건을 사고 팔았다. 배다리시장은 1940년대 말까지 위치가 조금씩 변경되면서 호황을 누렸고, 밤에는 야시장이 개최되어 이를 구경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배다리시장은 1950년에 들어서 새롭게 개편된 중앙시장에 일부가 편입되었는데, 주민들이 중앙시장을 배다리시장 혹은 배다리중앙시장이라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그 세가 약해진 배다리시장은 지금은 주로 중앙시장으로 흡수되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배다리시장, 조선인촌주식회사, 인천양조장, 창영초등학교, 꿀꿀이죽 골목, 영화초등학교, 한국신학의 선교기지인 여선교사 기숙사, 한국철도의 발원지 숭의동 105번지 일원 등 배다리역사문화마을의 중심지 위치를 안내한다.
왼쪽 위에 창영초등학교 정문이 있고, 동구민방위교육장 옆 벽에 배다리역사문화마을 관련 사진과 설명글을 전시하고 있다.
우각로의 동구민방위교육장 양쪽 벽에 배다리역사문화마을과 관련한 여러 사진과 이를 설명하는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배다리 골목의 복합문화공간인 창영당은 동화구연가 조은숙씨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숭인지하차도 및 연결도로 공사가 진행 중인 다리를 건너 우각로에서 서해대로513번길로 넘어간다.
서해대로513번길에 예전의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있는 동성한의원은 '문화상점 동성한의원'으로, '나비날다 책방', 제로 웨이스트 숍 '슬로슬로', 뜨개방 '실꽃', 식물가게 '뒤뜨레' 등 네 개의 상점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있다.
인천탁주의 발생지 인천양조주식회사가 공장 가동이 중단된 이후, 2007년부터 스페이스 빔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이 공간을 활용하여 양조장이었던 구조와 시설, 흔적들을 살리고 남은 물건들을 모아 별도로 보관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건물 간판을 '인천문화양조장'으로 바꾸고, 배다리 생태공동체마을 만들기 프로그램과 배다리전통주학교 프로그램 등 주민친화 및 지역공동체 형성을 위한 역할을 해가고 있다. - 배다리역사문화마을 게시판
서해대로513번길은 금곡로와 만나며, 서해랑길은 금곡로 왼쪽 방향 배다리헌책방거리로 이어간다.
서해대로513번길과 금곡로가 만나는 삼거리에서 금곡로 왼쪽 방향 배다리헌책방거리로 이어간다.
금곡로는 동쪽 동구 송림동 새천년로 동산휴먼시아아파트 앞에서 인천광역시 동구청을 거쳐 서쪽 금곡동 배다리 전통공예거리로 이어진다. 중앙 왼쪽 두손빌딩 앞에 배다리경로당이 있으며, 그 오른쪽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있다.
금곡로 서쪽 방향으로 배다리헌책방거리로 이어간다.
수도권전철1호선 경인선이 공중에 놓여 있고, 금곡로는 앞쪽 송림로와 만난다.
금곡로 입구에 도깨비 촬영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배다리헌책방거리와 송현근린공원에서의 촬영 장면이 전시되어 있다.
《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영어: Guardian: The Lonely and Great God)는 2016년 12월 2일부터 2017년 1월 21일까지 방영된 tvN 금토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도깨비 설화를 모티브로 김은숙 작가가 3년 전부터 기획하였고, 도깨비라는 현실에는 없는 캐릭터를 차용해 인간 신부가 필요한 도깨비, 그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기억상실증 저승사자, 그런 그들 앞에 '도깨비 신부'라 주장하는 '죽었어야 할 운명'의 소녀라는 소재와 함께 사극과 현대극을 오가는 판타지적인 요소를 강조한 드라마로 이응복 감독과 함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태양의 후예》 이후 다시 합작한 작품이다. - 위키백과
배다리헌책방거리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송림로 건너편은 천통혼수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배다리사거리로 이어지는 송림로는 배다리전통공예거리라 명명된다.
배다리사거리로 이어지는 금곡로는 헌책방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동구 금곡동(왼쪽)과 창영동(오른쪽)이 얽혀 있다.
수도권전철1호선 경인선 아래를 통과하여 배다리사거리로 나왔다. 참외전로가 남북으로, 왼쪽 위로 개항로가 이어진다. 동구 창영동과 금곡동에서 중구 경동 지역으로 넘어왔다. 경인선은 바로 위쪽 동인천역으로 이어진다.
참외전로는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3가에서 미추홀구 숭의동 숭의삼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3.35km, 왕복 4~6차선의 도로. 경인로가 숭의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좁은 길로 진입하는데 반해 참외전로는 그대로 직진하여 경인선 철도 노선을 따라 도원역, 동인천역을 지나간다. 숭의삼거리 이후부터는 참외전로가 경인로 대신에 실질적으로 전통적 의미의 '경인가도'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도로명 '참외전로'는 옛 참외전 거리 지역을 통과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예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이 거리를 '채미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채미'는 경기 방언으로 참외를 뜻하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참외밭과 참외시장이 있던 거리'라는 뜻이다. 실제로 동인천역에서 배다리사거리 사이 지역에는 숭의동과 도화동 등 인근 지역에서 재배했던 참외를 팔았던 시장이 있었고 이 가게들이 발전해 동인천 청과물시장으로 발전했다. 물론 현재는 과거의 대단위 청과물시장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일부는 과일가게가 남아 있어 옛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나무위키
참외전로 남쪽 방향으로, 경인선이 도원역으로 이어가고 있다. 행정구역은 중구 경동에서 아래쪽 율목동으로 이어진다.
참외전로가 남북으로 이어지고 중앙 왼쪽 위로 개항로가 시작된다. 서해랑길은 개항로를 따라 경동 지역을 통과한다.
개항로를 따라 중구 경동(京洞) 지역을 통과한다.
개항로(開港路)는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 신포공영주차장부터 동인천동 배다리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1.1km, 왕복 2차선의 도로이다. 도로명은 이 거리의 주변 지역이 구한말 개항장 일대였기 때문에 개항로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거리 주변에는 구한말에 건축된 답동성당과 대한민국 최초의 현대식 실내 극장으로 알려진 애관극장 등이 있으며 1990년대 초까지 인천에서 가장 번화했던 거리인 신포동 상점가(신포 문화의 거리)가 있다. 거리의 분위기나 역사성 등을 감안한다면 부산광역시의 광복동과 매우 유사하다. - 나무위키
주문제작가구 업체 지샌달, 화신가구, 엘사가구, 옻칠나전연구소 등이 이어지는 개항로를 따라 경동웨딩가구거리로 올라간다.
개항로의 경동웨딩가구거리로 올라간다. 골동품가게 하늘 가는 굴렁쇠, 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 옻칠나전연구소가 있다.
이 길은 싸리재를 넘나드는 고갯길이어서 싸리재고갯길이라 불렸다. 예지장례식장 앞을 거쳐 인천기독병원 앞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웨딩가구의 거리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왼쪽의 인천기독병원과 경동감리교회를 지나 개항로를 따라 싸리재 아래 애관극장 앞으로 이어간다.
애관극장 앞에서 배다리사거리에 이르는 길은 예전부터 싸리나무가 많이 심어졌다고 해서 '싸리재 골목'이라 불렸는데 이 거리의 중심인 애관극장 뒤편에는 당시 인천 최대 규모의 웨딩홀이던 신신예식장이 있어(언젠가 요양병원으로 개조됐다.) 양복·양장점, 포목점, 고급 요릿집 등이 많았고 주변에 인천기독병원이나 동인천길병원 등 종합병원이 있던 덕분에 크고 오래 된 약국도 많이 있었다. 또 가구를 저렴한 가격에 파는 가구 도매점도 있는데 2022년 현재도 일부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신포동 상권의 옛 영광과 번화는 도시 지역이 꾸준히 확장되고 주안역 일대, 부평역 일대, 구월동 로데오거리 등 다양한 부도심이 생성되면서 자연히 쇠락하게 됐고 1999년 터진 인현동 호프 화재사고는 신포동을 포함해 동인천 상권 전체의 몰락을 고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복고적 문화를 좇는 뉴트로 열풍이 불면서 1980~1990년대의 감성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동인천 상권이 다시 주목 받기 시작했고 애관극장 앞에서 배다리사거리로 이어지는 지역으로는 옛 병원이나 폐상가 건물 등을 식당이나 카페로 개조해 인기를 끄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 - 나무위키
싸리재 언덕에 인천기독병원과 경동감리교회가 서 있다.
싸리재를 넘어, 서해랑길을 벗어나 애관극장 앞을 거쳐 경동사거리로 내려가고 있다.
애관극장은 대한민국에서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역사 깊은 극장이다. 1895년 조선인 부호 정치국은 경동 싸리재 쪽에 공연장 협률사를 설립해 큰 인기를 얻었다. 협률사는 1925년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의 ‘애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극장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60년 다시 문을 열었다. 한때 경동 일대는 ‘시네마 거리’라 불릴 정도로 인천의 영화 중심지로 번성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른 극장들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도 애관극장은 살아남았고, 2004년에는 최신식 영사기와 디지털 음향 시스템을 갖춘 복합상영관(5개관)으로 재탄생했다. 지금도 최신 영화와 더불어 지역 영상문화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기획 상영과 행사를 진행한다. 단순한 극장을 넘어 여전히 지역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 애관극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애관극장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보는 것을 사랑한다>를 보는 것도 좋다. - 대한민국구석구석
개항로는 경동사거리에서 우현로와 교차하여 신포문화의거리로 이어간다.
경동사거리 신포지하상가 출입구 오른쪽에 4.19혁명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60년 4월, 경동사거리에서 인천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그 부당성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적 제 개혁을 통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였기에 이를 시민들과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다. 2020.12. 인천민주화운동센터
경동사거리에서 아래 횡단보도로 내려가지 않고 서해랑길 정코스를 밟기 위해 애관극장을 거쳐 타우카페 앞으로 되돌아간다.
경동사거리까지 내려갔다가 서해랑길 정코스를 밟기 위해 타우카페와 귀빈의상실 앞 우현로50번길 입구로 되돌아왔다.
우현로50번길을 따라 인천자모원 앞을 거쳐 경동목역탕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간다.
인간의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가톨릭교회 가치를 실천하고자 재단법인 인천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인천자모원은 낙태로 무수히 죽어가는 어린생명을 한 생명이라도 살리자는 생명수호운동을 시작으로 미혼모들의 보호와 건강하고 안전한 출산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5년 2월에 설립된 「미혼모자가족복지시설」입니다. 인천자모원은 카리타스(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미혼모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인천자모원 http://www.injamo.or.kr/main
인천자모원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우현로 방향으로 내려간다. 오른쪽 위로 올라가면 답동성당이 있다.
우현로50번길을 따라 우현로로 내려간다.
우현로150번길에서 우현로 횡단보도를 건너 우현로 서쪽 보도로 넘어간다.
우현로 횡단보도를 건너며 걸어온 우현로150번길과 공영주차장, 그 위의 답동성당을 올려본다.
답동성당은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답동)에 자리잡은 천주교 인천교구 유일의 주교좌 성당이다. 정식 명칭은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 바오로 대성당이고, 줄여서 답동성당(畓洞聖堂)이라고 부른다.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내리교회, 성공회 서울교구 내동성당과 더불어 인천에서 유서 깊은 종교시설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 세 교회는 인천을 대표하는 가톨릭, 감리교, 성공회 교회로서 사이가 돈독한 편이고 정기적으로 연합음악회 등을 개최하는 등 교회일치운동에 모범을 보이는 곳이다. 성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1981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됐다. 건축물로서도 역사적 가치가 깊지만, 천주교 인천교구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의 성전 건물이 건축된 것은 1897년이지만 현 답동본당의 전신인 제물포본당 자체가 설립된 것은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후 3년이 지난 1889년이다. 인천지역 모든 가톨릭 성당의 모(母)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천교구 연혁을 보면 현재 본당으로 승격된 부평공소(현 인천 부평2동성당)나 소사공소(현 부천 소사성당) 등 인천시내 여러 공소가 원래 답동성당의 산하 공소였다. 그러다가 공소가 있던 지역의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답동성당에서 분가해 부평성당과 소사성당을 설립하는 등 본당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 나무위키
우현로 서쪽 보도를 따라 경동사거리 서쪽 개항로 출입구로 이어간다.
우현로(又玄路)는 인천광역시 중구 사동에서 인현동까지 이르는 인천광역시도로, 총 연장은 969m이다. 해당 도로명은 용동 출생인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술 사학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 위키백과
우현로 서쪽 보도에 이경종 기록관이 있다. "인천 소년병 6·25 참전 기록관 : 여기 오가는 나그네들이여, 이곳에 전사한 스승과 학생을 기록해 놓았으니, 나라를 지키려고 참전하여, 전사한 인천의 아들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라오."
(인천=연합뉴스) 강종구 기자. 2020.6.17 inyon@yna.co.kr = 16살 나이에 6·25 전쟁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경종(86)씨는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12월 18일, 인천 축현초등학교에 모인 동네 형·친구 3천여명과 함께 부산까지 20일 넘게 걸어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씨는 전우들을 만나며 학도병들의 당시 사진, 전역 증서, 전사 통지서, 전사 후 묘비 사진, 1950년대 신문 자료 등 1천여 점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2004년 12월 인천 중구 신포동에 처음으로 '인천 학생 6·25 참전관'을 열었다. 참전관에는 이씨가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전우 200여 명의 육성 녹음테이프도 보관돼 있다.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참전관 운영은 치과 의사인 아들 규원(58)씨의 든든한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규원씨는 다른 기관의 재정 지원 없이 본인의 사재를 털어 자신의 치과 의원 아래층에 참전관을 만들고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16년 가까이 참전관을 운영하고 있는 규원씨는 최근에는 인근 건물을 아예 매입해 참전관 면적을 330㎡ 규모로 넓혔다. 참전관은 조만간 치과 의원과 함께 이 건물로 확장 이전될 예정이다. 새로 조성한 참전관에는 아버지 이씨의 이름을 딴 '인천 소년병 이경종 기록관'도 마련됐다.
남북을 잇는 우현로와 동서를 잇는 개항로가 교차하는 경동사거리의 서쪽 개항로에서 건너편 동쪽의 개항로를 바라본다.
경동사거리 서쪽 개항로 입구에서 개항로를 따라 왼쪽 신포문화의거리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개항로 신포국제시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개항로45번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다.
'개항'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서 볼 수 있듯 역사가 아주 깊은 동네다. 구한말 시대부터 인천지역 행정의 중심이었고, 해방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인천지역에서 경제, 패션, 문화를 선도하던 번화가였다. 개항로 서쪽 끝인 신포공영주차장부터 경동사거리까지의 신포 문화의 거리는 1990년대 초반까지 명실상부 인천의 쇼핑 1번지였다. 국내에서 잘 알려진 유명 의류 브랜드의 직영점이나 대리점이 이 거리에 모두 입점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포시장과도 골목으로 연결돼 있어서 쇼핑을 위해 찾아온 유동인구가 상당한 편이었다. 다만 상권이 쇠락하면서 금강제화 등 일부 브랜드는 이 지역을 떠나 주안이나 구월동, 부평 등 다른 부도심으로 점포를 옮기기도 했다. 그래도 2022년 현재까지 중구, 동구 일대에서 각종 의류 브랜드의 직영 대리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이 거리가 유일하다. - 나무위키
이정목 왼쪽 아래는 신포국제시장, 개항로 앞쪽은 신포문화의거리, 서해랑길은 개항로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으로 올라간다.
신포시장과 현대식 옷 가게들이 즐비한 이 거리는 개항 이후 상업의 중심 역할을 했던 지역이다. 옷 가게뿐만 아니라 먹을거리 또한 풍성해 쇼핑하느라 출출해진 배를 달래준다. 한 손엔 공갈빵을 들고 다른 손으론 엄마 손을 꼭 붙잡고 다니며 시장 구경하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곳.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묻은 닭강정 집에서 배를 채운 뒤 구석구석 구경을 하며 걷노라면 이번엔 맛 좋은 디저트 카페에서 이리 오라며 손짓한다. 즐거운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다. - 중구문화관광
신포문화의거리 가로등 디자인이 인천 패션의 중심지임을 이미지로 보여 준다.
이정목에서 신포국제시장을 내려본다. 전통시장인 이곳에서는 닭강정, 왕만두, 공갈빵, 쫄면 등이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인천은 물론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아올 만큼 유명한 전통시장이다. 신포국제시장은 인천 최초로 개설된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개항 초기에 ‘새로운 항구’라는 의미의 신포시장으로 불리다 2010년에 신포국제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개항 시기에 외국 문물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장터로 기능했던 신포국제시장은 지금은 지역 주민들을 위한 식재료와 먹을거리, 생활필수품들을 제공하는 인천의 대표적인 시장이 되었다. 신포 국제시장은 품목별로 구획이 나뉘어 있어 처음 온 이들도 둘러보기가 좋다. 야채와 과일을 비롯해 수산물 골목, 반찬거리 골목, 수선 골목 등 구경거리도 다양하다. 특히 이곳이 원조인 주전부리들이 유명한데 닭강정과 공갈빵, 쫄면, 오색만두 등 특색 있는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닭강정은 신포국제시장에서 처음 개발한 대표 메뉴로 이름난 집들은 아침부터 줄이 길게 이어진다. 이제는 외국인들도 찾아와서 맛볼 정도로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방송에 출연해 유명해진 청년몰 눈꽃마을과 빨간색 등대가 서 있는 등대공원은 신포국제시장에서 이름난 포토존이다. 이처럼 시장 내부에 공원을 조성한 곳은 신포국제시장이 유일하다. 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홍예문 등 관광 명소가 산재해 여행 코스를 짜기도 좋다. - 인천투어
서해랑길은 개항로에서 신포국제시장 맞은편 언덕길 개항로45번길을 따라 언덕으로 이어간다.
개항로53번길에서 개항로와 신포국제시장을 뒤돌아본다.
중구 내동 개항로45번길을 따라 성신아파트 오른쪽 동방하이츠빌라 옆 개항로45번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다.
동방하이츠빌라 옆 개항로45번길 왼쪽 길을 따라 성신아파트 방향으로 올라간다.
개항로45번길에서 송학로로 올라서면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가 있다.
홍예문 동쪽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고풍스러운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자로 잰 듯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올려 인상적인 성공회 교회이다. 이곳은 2002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될 만큼 종교, 역사,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1890년에 영국 해군종군신부였던 코르페(C.J. Corfe 한국명 고요한)주교가 선교 통역자 6명과 함께 인천항에 도착했고 1891년 9월 30일에 교회를 건축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공회 교회이다. 한국 전쟁 당시 훼손된 부분을 수리해 사용하다 1956년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내동교회는 중세의 전통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양식을 고수한 바실리카양식으로 한국교회 건축양식으로는 유일한 건물이다. 외벽을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중세풍의 석조 건물이지만 한국 전통 건축방식의 처마양식이 곁들여졌다. 특히 창호와 벽체 부분의 처리가 뛰어나고 지붕은 돔 형식이 아닌 목조트러스로 되어있다. 양 측면 기둥사이마다 큰 창을 설치, 벽돌로 다시 쌓아 틈 사이로 빛이 유입되도록 설계했으며 내부 제단이 놓인 곳과 위쪽으론 빛이 들어와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루가병원은 코르페 주교와 함께 들어온 미국인 의사 랜디스가 1895년 성공회 교회 옆에 개원한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1902년 러시아 영사관으로 임시 사용되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으로 인한 부상병을 치료 수용하기도 했으나 1916년 폐쇄되었다. 이후 성공회 신학원으로 사용되다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 병원의 자취는 교회 옆에 표지석으로 남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교회(인천관광 100선, 2016. 11.)
인천내동교회 앞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인천항이 보이고 송도와 영종도를 잇는 인천대교가 바다 위를 날고 있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앞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송학로를 따라 자유공원으로 올라간다.
송학로를 따라 대한성공회유지재단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 앞을 지나간다.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관장 박종실)은 2023년 10월 13일 복지관 로비 1층에 친환경 무인카페 ‘미가엘 다방’을 열었다고 한다. 미가엘다방 안내판에 "날이 더워도 날이 추워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무인카페 '미가엘다방'에서 편히 쉬어 가세요."라고 적혀 있다.
우리 복지관은 대한성공회가 1890년 이곳에 성.루가병원과 교회를 세워 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돌보기 시작한지 인천내동교회 100주년을 기념해 초기 선교사들의 정신과 헌신을 계승하고자 미가엘복지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나무 그늘에 앉아 쉴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오래 전에 나무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처럼 내가 하는 작은 실천이 누군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말의 무게를 느끼면서 한 발 한 발 걸어 왔습니다. 1993년 개관부터 오늘에 이루기까지 함께해준 개인, 단체, 기업체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과 후원자님들 그리고 선배사회복지사, 동료, 후배사회복지사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 사이트 http://www.migael.net/
송학로를 따라가다가 북쪽을 바라보면 서해랑길 97코스 탐방에서 지나가게 될 인천 최고봉인 계양산이 보인다.
송학로를 따라 장애인 복지 시설 희락원 앞을 통과하여 자유공원으로 올라간다.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로 48에 위치한 장애인 복지 시설인 희락원 원장입니다. 사회복지 핸디캡케어 시설인 희락원의 희락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희락원은 심한 장애인(장애 1~2 등급) 분들이 24시간 생활하는 곳입니다. 심한 장애인들에게는 지역사회의 통합 돌봄, 탈시설 자립지원 등 이용자 중심의 서비스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단기나 주간 보호 시설(그룹홈 등)에 입소가 불가능하며, 자립생활 지원이 어려워 가정경제의 어려움 등 지역 사회 문제를 해소하고자 심한 장애인들이 이곳 희락원에서 원하는 만큼 혹은 일생을 지내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의 자세로 지역사회 중심의 장애인 욕구에 맞는 장애인 복지 서비스를 실현해 나가겠습니다. - 희락원 원장 올림
자유공원 입구 아래에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 위쪽에 자유공원 주변을 안내하는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연혁(沿革) : 1950年 6月 25日 韓國戰爭이 渤發하자 我軍은 거듭되는 後退로 洛東江이 最後의 戰線이 되었다. 1950年 9月 15日 UN軍의 仁川上陸作戰이 敢行되자 우리 學徒들은 義勇隊를 組織, 强化하여 治安維持에 힘쓰던 中 勝戰을 눈앞에 두었던 戰線이 中共軍의 介入으로 나라가 또다시 危機에 처하자, 1950年 12月 18日 男女隊員 3,000餘名은 축현초등학교에 集結, 出征式을 갖고 馬山까지 南下하여 1951年 1月 5日 600餘名은 海兵隊로, 1,300餘名은 1月 10日 釜山에서 陸軍으로 自願入隊하였다. 그들은 수많은 戰鬪에서 200餘名의 戰死者와 많은 負傷者가 祖國에 젊음을 바쳤다. 우리는 그들의 護國精神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고자 여기에 紀念塔을 세운다. 仁川學徒義勇隊 6.25 參戰會
오후 50년 눈물 속에 흘렀어라./ 하늘이 불을 토하고/ 땅이 놀라 울부짖던 그 여름도/ 이제는 풀잎 이슬처럼 덧없이 흘렀어라.// 가슴 저미도록/ 오늘 삼천 꽃송이 그 애띤 젊음을 回憶하매/ 그대들은 문득 熱血로 일어섰어라./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 그대들 조국 山河 어느 것인들 사랑치 않았으랴./ 진정 그대들 자유처럼 분연히 일어섰어라./ 砲煙 자욱한 골짜기/ 이울어 濛濛하던 조국 강토의 운명을/ 그대들 끓는 피 얼룩진 눈물이 지켰어라./ 쓰러진 2백 散華여 落花여/ 얼굴 보숭보숭한 풀꽃들이여/ 이제 이 찬란한 조국은 그대들 것이니/ 하늘 우러러 말하라./ 조국은 그대들 심장 그 두근거리던 고통 속에 있음을.// 오늘 그대들 마지막 날인 親愛의 입마춤/ 그 따스한 체온을 담아/ 황해 물 말없이 출렁이는 언덕에/ 자유의 이름으로 추모의 돌을 세우노니/ 오후 50년 찾아도 그대들은 지금 없어라./ 다만 꽃처럼 붉은 넋으로만 있어라.// 그대들 고운 호국 혼령이시여/고이고이 잠 드시라.
2000년 초가을 南洲 金允桓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의 자유공원 새우리에서는 칠면조, 거위, 오리, 닭, 공작, 금계, 백한, 왕관앵무새 등을 키우고 있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 : 이곳은 고종 25년(1888년) 11월 9일 인천 항구 각국 조계 장정 제1관(仁川港口各國祖界章程第1款)에 의해 공원으로 확정되었으며 도면에 미, 영, 로, 청, 일(美英露清日) 등 각국 외교관이 공동 서명하고, 로서아인 토목기사 사바틴이 측량하여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부르던것을 1914년 각국 지계제도의 철폐와 함께 일본인들이 서공원으로 호칭했으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임을 기념하여, 1957년 개천절을 기해 맥아더 동상을 세우고 자유공원이라 개칭하였다.
자유공원을 상징하는 동상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동상은 1957년 9월 15일 건립되었다.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정의로써 이러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세계의 노선 위에 승리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만인의 감격과 탄앙을 한몸에 두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여기 이 동상의 주인공 다그라스 맥아더 장군이다 그는 1880년 1월26일 아-더 맥아더 장군의 둘째 아들로 미국에 태어나서 소위로 출발하여 오성장군의 칭호를 받음에 이르기까지 무릇 반세기에 걸쳐 가지가지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이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패전 일본에 주재케 되 었었다 일본이 이같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해방되었으나 불행히도 국토가 비참하게 양단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부터 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즉시 미국 정부는 한국구원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공산침략 항전에 참가한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탁월한 천재가 발휘된 것은 바로 이곳 인천에서였다. 그 호매한 식견으로 안출된 거의 기적적인 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 5일에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결행하여 그 결과로 전세가 일전하여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었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격에 넘치는 우리 국민의 명의와 의연으로 각계각층 대표를 망라한 맥아더장군 동상건립위원회가 김경승교수의 손에 의하여 비져진 장군의 용자가 영겁을 통하여 이 거룩한 지역을 부감하도록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장군과 그 휘하 용감한 유엔군 장병들이 우리와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독한 침투에 대한 최후투쟁에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없다라고 말한 분이 역시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 동상건립위원회
맥아더 장군 동상 옆에 미 해군 기념재단에서 세운 인천상륙작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의 영문을 번역해 보았다.
역사상 가장 능수능란하고 대담한 전략적 타격. (은퇴한 함대 해군대장 William F. Halsey의 한국전쟁 중 가장 극적이며, 결정적 행동 중 하나 - 1950년 9월 15일에 육해공 합동으로 인천항 상륙.)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 전쟁에 복무한 모든 미군 해군 직원들에게 경이를 바칩니다. 그들은 북한의 공산당 침략에 맞서 UN의 깃발 아래, 미군의 다른 군대, 대한민국, 그리고 21개의 국가 연합의 남성과 여성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미 해군 기념재단, 워싱턴 D.C. 2000년 6월 22일에 건립.
미 해군 기념재단 건립 기념비 앞에 인천시민헌장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통일목이라 명명한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인천시민헌장비 뒷면 - 인천시민의 다짐 : 황해 푸르러 멀리 퍼지고 구원한 문학의 정기 감도는 여기는 내 고향 인천 우리 모두 바다처럼 넓고 시원한 마음씨로 서로 믿고 아끼며 땀 흘려 일하는 시민이 되자 1965년 6월 1일 건립
통일목(향나무) : 여기 통일을 갈망하는 마음 한 그루 나무를 심어 그 이름 통일목이라 불러 영원히 자라게 하리라 1972.4.3.
제74주년 인천상륙작전기념주간 행사(9.6.~9.12.)와 기념식을 알리는 깃발이 가로등 기둥에 설치되어 있다.
통일을 염원하며 : 그 누군들 통일을 원치 않으리오 한 맺힌 민족의 슬픔이거는 그 이픔 달랠길 없기에 오늘도 통일을 외쳐 보노라 영광된 통일의 그 날을 위해 우리 모두 남과 북이 한마음 한 뜻 하나가 되어야 하나니
趙順根 짓고 張雲盛 쓰다 西紀 一九七三年 四月三日 新風會
인천 중구 개항장 문화지구와 월미도 일대의 평화 역사 이야기 여행 안내도가 자유공원 언덕에 있다.
자유공원 광장 전망대에서 인천항 앞 월미도와 왼쪽의 소월미도, 그 뒤 바다 위를 가르는 인천대교를 조망한다.
이곳이 자유공원이 처음 만들어져 각국공원 또는 만국공원이라 불린 곳인 듯. 뒤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보인다.
자유공원 광장 입구에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는 개항 이후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조성된 근대 문화유적지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공간들을 둘러보며 지나간 시간 속을 함께 거닐어 보겠습니다.
전망대는 배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고, 뱃머리 옆에 닻 모형물과 그 왼쪽에 등대 모형물이 세워져 있다.
자유공원 광장에서 서쪽 차이나타운 제3패루 선린문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락란다.
석정루(石汀樓)에 올라가서 인천항과 월미도를 조망한다. 석정루는 삼화조선을 경영했던 석정(石汀) 이후선(李厚善)이 누각을 지어 인천시에 기증한 것으로, 출생지가 월미도였던 석정은 월미도와 인천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공원 서쪽 언덕 위에 2층 규모로 누각을 지었다. 1966년 6월 23일 준공식을 거행하였으며, 현판의 글씨는 서예가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이 썼다고 한다.
석정루 2층에서 월미도를 조망한다. 왼쪽 인천항 뒤에 인천대교가 월미도 뒤로 지나고 그 맨 뒤는 영종도인 듯.
인천항과 오른쪽 월미도 왼쪽의 소월미도와 그 왼쪽 뒤 연안부두 연안여객선터미널, 중앙 뒤 인천대교를 조망한다.
인천항과 중구 항동, 신생동, 신포동 일대를 조망한다. 맨 오른쪽에 하버파크호텔, 그 맨 뒤쪽에 연안부두가 보인다.
석정루에서 연오정(然吾亭) 앞으로 내려오면 입구에 백합나무가 솟아 있고 그 앞에 헌수비(獻樹碑)가 있다.
연오정(然吾亭) : 중구 송현동 거주 한의사 조길(趙吉)이 그의 부친 독립운동가 조훈(趙勳)의 뜻에 따라 1960년에 부친의 호 연오(然吾)를 따서 건립한 육각정자이다. 조훈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였다. 이 정자의 현판은 좌수서(左手書)로 유명한 인천의 서예가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의 글씨이다.
헌수비(獻樹碑) : 西海蒼波 헤치고 朋程萬里 友誼의 손길 뻗쳐온 仁川, 그 由緒 깊은 언덕 위에 韓美 百年大計 그날의 意義를 기리며 더욱 後代에 血盟의 結緣을 새기고자 여기 이 고장 뜻있는 人士의 丹誠으로 木百슴을 심노니 이후 市木으로 茂盛하여 두 나라의 無窮한 繁榮을 길이 象徵하리라 - 韓美修交100周年記念日에 즈음하여, 1982年 5月 22日 仁川直轄市長 金璨會
차이나타운 제3패루 선린문 앞 자유공원 입구로 내려간다. 계단 입구에 서해랑길 96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있다.
응봉산 자유공원 입구 계단 옆 볼록거울 기둥에 서해랑길 96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96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치고 서해랑길 96코스 시작점 표지판과 함께 96코스 탐방 완주를 기념한다.
차이나타운에는 동서남북 사방에 네 개의 패루가 있다. 그들 중 응봉산 자유공원 입구에 제3패루 선린문이 서 있다.
차이나타운 제3패루 선린문 문기둥 아래에 선린문 건립 취지문이 적혀 있다.
韓·中間 親善紐帶를 通하여 차이나타운의 繁榮을 함께 이루어 가자는 意味로 우리 區民의 뜻을 모아 建立하였습니다.
2003年7月1日 仁川廣域市 中區廳長 金洪燮
서해랑길 96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치고 초한지 벽화거리를 거쳐 송월동 동화마을 아래 공영주차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