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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8 서해랑길31회차 76코스+4K( 팔봉초등학교~팔봉갯벌체험장~장구섬~구도항~솔감저수지 15.5k, 5.5h)
서산시의 유래와 역사에 직접적으로 연유(緣由)하는 곳은 팔봉산이다. 그렇기에 팔보수로니 팔봉초등학교니
하는낱 말들은 자립성과 분리성을 가진 말이며 사람이 지은 이름이지만 오랜 역사성을 지닌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서산 팔봉산에서 광활한 갯벌과 서해바다를 굽어보다,
충남 서산시는 서산의 명소 아홉 곳을 꼽아 서산9경으로 선정했다. 서산의 명산 팔봉산도 그중 하나로 가야산, 황금산과 함께 제5경에 이름을 올렸다. 팔봉산은 8개의 봉우리가 갯벌과 바다를 굽어보는 해발 362m의 아기자기한 산이다. 왕복 2시간 정도면 충분하고, 봉우리를 타고 넘는 재미와 아름다운 풍광이 가득하다. 8개의 봉우리를 따라 팔봉산을 올라보자. 팔봉산 하면 이름처럼 8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산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팔봉산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충남 서산에도 그 못지않은 또 다른 팔봉산이 있다. 홍천 팔봉산이 홍천강을 굽어보는 산이라면, 서산 팔봉산은 금싸라기 같은 서해안의 차진 갯벌과 바다를 굽어보는 산이다. 홍천 팔봉산은 327m, 서산 팔봉산은 362m로 조금 높다. 지역은 달라도 엇비슷한 모양새가 마치 형제 같다. 서산 팔봉산은 철계단을 타고 오르는 험한 산이지만, 산세가 낮고 풍경이 아름다워 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팔봉산은 팔봉면 금학리와 어송리, 양길리에 걸쳐 있다. 팔봉산이 있는 팔봉면 역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팔봉산의 여덟 봉우리를 따서 지었다고 하니 팔봉산의 유명세는 듬직할 정도다. 조선 광해군 때 편찬된 서산의 읍지인 《호산록》에 "서산 서쪽 바닷가에 있는 산으로 정상의 여덟 봉우리가 마치 바둑돌처럼 줄지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팔봉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원래 팔봉산은 봉우리가 9개인데 제일 작은 봉우리를 빼고 팔봉산이라 불렀다. 그래서 매년 연말이 되면 작은 봉우리가 자신을 끼워주지 않았다며 운다고 한다. 팔봉산 산행은 양길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제1봉을 지나 8봉을 끝으로 어송리로 내려오게 되는데 모든 봉우리를 다 거칠 필요는 없다. 양길리에서부터 정상인 3봉까지가 가장 멋지고 풍광이 뛰어나다. 정상에서 8봉까지는 능선을 따라가는 다소 밋밋한 길이다. 3봉 정상까지 올랐다가 운암사지 방면 숲길로 내려오는 코스가 추천할 만하다.
팔봉산의 하이라이트, 제1봉에서 3봉까지
주차장에서 숲속 공터까지는 완만한 숲길이다. 300m쯤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어송리 방면 임도가 나온다. 이 길은 서산 아라메길 4구간이다. 양길리 주차장에서 어송리와 구도선착장, 호리를 거쳐 양길리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22km 코스다. 팔봉산을 오르는 길에 바라보는데도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숲길이다. 완만한 숲길을 따라 10분 남짓 가면 본격적인 팔봉산 산행이 시작된다. 계단을 따라 오르는 것도 잠시, 제1봉과 2, 3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제1봉까지는 약 70m를 올랐다 다시 내려와야 한다. 온통 바위투성이지만 제1봉 정상까지는 금세다. 해발 210m의 제1봉은 감투봉 또는 노적봉이라 부른다. 벼슬아치의 감투 또는 노적을 쌓아올린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봉우리에 올라서면 출발지점인 양길리 주차장이 발아래다. 산을 오른 지 20여 분 만에 봉우리 하나를 꿰차고 보니 시시하다는 자만심이 몸을 휘감는다. 제3봉 정상에 비해 절반 이상 올랐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다.
제2봉에서 정상인 제3봉까지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바위로 이뤄진 산이다 보니 등산로 곳곳이 철계단으로 이어지거나 좁은 바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난다. 긴 철계단을 오르면 금방 지나왔던 제1봉이 가려진 나무 사이로 위용을 드러낸다. 감투나 노적을 쌓아올린 모습은 잘 모르겠지만, 잘 찾아보면 하트바위도 보이고, 오리 머리처럼 생긴 바위, 상어 머리를 닮은 바위가 숨어 있다. 해발 362m 팔봉산 정상이다. 바위 꼭대기에 신선처럼 앉아 사방을 둘러본다. 가장 높은 곳에 앉으니 시야가 탁 트여 장쾌하다. 서쪽으로는 팔봉면 일대와 태안군 이원면의 이원반도가 바다를 향해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이원반도 서쪽은 태안해안국립공원이다. 북쪽으로는 서산과 태안 사이 가로림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리아스식 해안과 갯벌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가로림만에 떠 있는 고파도와 웅도가 다정스럽다. 북쪽으로 멀리 서산의 끝자락인 대산읍과 코끼리바위로 유명한 황금산도 바라다보인다.
정상에서 제8봉으로 가지 않고 운암사지 숲길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제3봉 아래로 내려가 양길리 주차장까지 에둘러 가는 길이다. 바위지대를 따라 내려가나 싶더니 금세 조붓한 숲길이 이어진다. 팔봉산의 허리를 휘감아 가는 길은 '항상 구름이 머문다'는 운암사 터를 지나 제1봉과 제2봉의 갈림길로 이어진다. 산을 내려가는 내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친구처럼 정겹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듬직한 두 어깨가 나란하다. 팔봉산 제3봉 정상을 거쳐 양길리 주차장까지 되돌아오는 데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가파른 암봉이 있기는 하지만 남녀노소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가파른 길을 피하고 싶다면 운암사지로 난 숲길을 이용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천문·기상 분야의 실감나는 체험,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228호로 지정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이 있다.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다. 특히 밝기에 따라 별의 크기를 달리 표현한 전통 천문도로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유일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 후 조선의 개국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만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 고구려에서 전해 내려온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 만들었는데, 이는 고구려와 조선의 별 위치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때 달라진 별의 위치 등을 계산하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든 사람이 바로 금헌 류방택이다. 충남 서산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이 있다.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은 전시교육실과 천체투영실, 별과 행성을 관측하는 주관측실, 보조관측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교육실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천문과학 자료와 천문기기, 기상기기 등을 전시한다. 용오름, 플라즈마 방전판 등 기상 분야의 간단한 체험도 할 수 있다. 주관측실과 보조관측실에서는 맑은 날 태양과 달, 별과 행성 등 천문 관측도 가능하다.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옆에는 류방택 선생을 기리는 송곡사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반긴다. 1420년 유윤이란 사람이 낙향해 정원수로 심은 것으로 600년 가까이 된 향나무다.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고목이다.
서해안의 간석지 [tidal flat, marsh, 干潟地]
하천에 의해서 하구에 운반된 점토와 모래 같은 미립물질이 해수의 운반작용으로 하구나 그 인접해안에 퇴적된 지형. 개펄
개설
밀물 때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 해수면 위로 드러나는 평평한 해안퇴적지형(海岸堆積地形). 육상생태계에 가까운 쪽의 염생식생이 정착되어 있는 곳을 염생습지(salt marsh), 해안 생태계 쪽을 갯벌(mud flat)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염생습지는 대부분 간척되어 최근의 간석지라 하는 곳은 갯벌을 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세계적으로 조석간만의 차가 큰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에 넓게 분포한다. 위성사진 분석에 의하면 남한의 간석지 총 면적은 약 23만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경기도 8만 3000㏊, 충청남도 3만㏊, 전라북도 1만 1000㏊, 전라남도 10만 5000㏊, 경상남도가 8,000㏊를 차지한다. 경기만은 한강·임진강·예성강의 하구가 되기 때문에 강화 갯벌과 같은 넓은 간석지가 형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갯벌로는 순천만과 서천 갯벌 보존구역 등이 있다. 20세기 후반 서해안과 남해안의 곳곳에서 간척사업이 국토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간석지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지도상에 해안선의 직선화(直線化)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관련한 해안 생태계의 변화가 초래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하천에서 직접 토사를 공급받아 형성되는 간석지는 대체로 다량의 모래를 함유하거나 주로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미세한 점토 물질은 조류에 의하여 하구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으로 운반되며 파도가 약한 만입부에 쌓인다. 남양만·가로림만·천수만 등지에 간석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는 까닭은 바다가 잔잔하여 벌이 쉽게 집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깊숙한 만으로 흘러 들어오는 작은 하천의 하구에도 하천의 운반 물질보다 조류에 의하여 바다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벌의 양이 훨씬 많아서 점토질 간석지가 넓게 발달한다. 현재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염생습지가 국지적으로만 분포한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그 분포는 광범위하였으며, 동진강 및 만경강 하구 일대와 같은 일부 해안에서는 바다와 육지 사이의 경계선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리시설의 확충과 더불어 간척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염생습지의 대부분은 논 또는 염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중장비가 대량으로 동원됨에 따라 간척사업이 천수만·시화지구·대호·영암만·새만금 등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간척사업의 규모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형화 되었다. 과거에는 염생습지가 간척의 주요 대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썰물 때 바닥이 드러나지 않은 바다도 방조제로 막고 바닷물을 퍼내는 식의 간척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계화도간척사업 처럼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된 곳도 있지만, 시화호나 새만금간척사업에서 보듯이 생태계 파괴, 수질문제 등 수많은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있어 많은 논쟁을 불러 잁으키고 있다.
현황
문헌사료에 의하면 간석지는 고려기로부터 염전과 농경지로 간척되었다. 흙으로 둑 또는 방조제를 쌓았던 20세기 이전에는 개발의 규모가 극히 작았으며, 염생습지만이 간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방조제를 쌓으면 갯벌은 그 바깥쪽에 집중적으로 쌓이며, 염생습지는 확장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행하여졌으며 1917년 공유수면매립법(公有水面埋立法)을 공포하여 근대적인 간척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건국 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는 1960년대의 국토종합개발사업의 대부분은 자연환경 개조의 내용을 포함하는 수자원 개발을 중심으로 한 다목적댐 건설, 농지개발사업, 간척지 조성 등을 정부주도 하에 공공단체 및 민간사업자가 참여하여 추진하였다. 1960년대의 국토개발은 개발효과가 큰 경인특정지역, 공업단지를 위한 울산지역, 관광자원·경제개발을 위한 제주도특정지역, 지하자원과 에너지자원개발에 치중한 태백산지역, 토지개간·수자원개발을 위한 영산강지역·아산∼서산특정지역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특히 서남해안은 간척지로서의 입지조건이 유리하여 오래 전부터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왔다. 62년 공유수면매립령이 제정되고 간척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져 62∼66년 사이에 7개 지구 1만 3260ha가 착공되었다. 그 뒤로 김해·대천간척이 준공되어 식량증산에 기여하였고, 삽교천(揷橋川)지구에 1329ha, 목포지구에 5500ha가 조성되었다. 이 밖에도 아산만 일대, 만경강·동진강 하류의 호남평야, 영산강 하구의 나주평야는 각각 상당한 면적의 간척평야를 포함하고 있다. → 국토개발
의의와 평가
간석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한 간척사업은 지금까지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강조되어 왔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차원의 환경인식으로 간석지의 매립은 환경단체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해안생태계와 지역공동체의 위기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간석지를 구성하는 물질과 각종 서식 생물체들은 육지에서 흘러드는 오염 물질을 분해하는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간석지의 파괴는 연·근해의 오염을 유발하고 해안생태계의 파괴를 야기함으로써 어획고의 감소를 초래한다. 또한, 지형변화에 따른 조류의 유속감소는 항구에 미세점토(벌)를 퇴적시켜 항구기능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조류에 의한 대규모의 자연재해 가능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인근 지역공동체의 삶도 경제적 기반을 잃게 되면서,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던 전통마을들은 이촌(移村)현상에 의해 공동화(空洞化)되고 초등학교의 폐교와 같은 사회문제가 환경문제와 함께 대두되고 있다. 간석지는 경제적 가치만이 아닌 환산할 수 없는 무한한 생태적 가치도 보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해안관리와 이용을 위한 행정체제와 법규를 재조정해야 하고 불가피한 간척사업으로 야기된 생태적 손실을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전향적인 제안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남해안의 순천만이 간석지를 생태관광의 장으로 이용하고 있고, 보령의 해안에서는 개펄을 상품화하여 국제적인 머드축제를 벌이는 등 간석지의 활용이 다각적으로 변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지리지 ; 총론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08)
『한국의 간척』(농어촌진흥공사, 1995)
『국토이용과 간척지 개발에 관한 연구』(국토문제연구소, 1991)
『자연지리학』(권혁재, 법문사, 1983)
「해안습지 발달과정에 대한 연구동향과 과제」(박의준, 『지리학연구』Vol.35 No1, 2001)
「순천만 염하구 퇴적작용의 시·공간적 변이」(박의준,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황해안(黃海岸)의 간석지(干潟地) 발달(發達)과 그 퇴적물(堆積物)의 기원(起源)」(권혁재, 『지리학(地理學)』10, 1974)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구도[Janggudo]
충청남도 태안군의 이원면 내리에 있는 섬이다. 지금은 제방이 만들어져 육지와 연결되었다. 『조선지형도』에는 '장구도(長龜島)'로 표기되어 있으며 가로림만에 섬으로 존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명에는 몇 가지 유래가 전해온다. 하나는, 조선조 세조 때에 순절한 충의공 김문기의 후손 김흥관이 영조 때 중추부사 자리에 있었다. 그는 정의에 민감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관리였다. 영조에 이어 정조가 등극한 이후 홍국영의 세도가 날로 팽창하여지자, 이에 반기를 들고 관직을 버린 채 낙향한 곳이 이원 면내리였다. 그는 거처를 찾기 위하여 후망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 그 앞바다에서 장구처럼 생긴 조그마한 섬을 발견하였다. 장구란 평화롭고 즐거울 때 사용하는 악기이므로 이 섬에 들어가 살게 되면 홍국영의 세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내리에는 김홍관의 측근들이 많이 살게 되었고, 지금도 50여 가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받아들이면 지명은 '장구처럼 생긴 섬'에서 유래하였으며, 지명의 역사는 18세기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장구도는 본래 물이나 술, 간장 등을 담아 옮길 때 쓰는 나무로 만든 그릇, 즉 장군을 닮았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장구도로 음이 변하였다는 것이다. 두 지명의 유래가 섬의 모양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공통하고 있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구도항
서산시 코스의 백미는 작은 반도인 덕송리와 호리이다. 주 도로가 거의 소로이고 해안 쪽으로 길이 잘 나있어 천혜의 라이딩 환경을 제공한다. 덕송리와 호리 코스는 구도항 근처 해안에서 태안군 경계와 만난다. 소나무 숲길과 바다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서산 팔봉산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구도항은 서산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 이 지역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특히 가로림만에서 잡히는 낙지가 유명해 박속낙지탕 요리로 명성이 자자하다. 작은 항구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구도항에서 바라보는 가로림만의 저녁노을이 일품이다.
출처:(해양관광정보포털 바다여행 : 자전거길 편, 한국어촌어항협회)
가로림만
충청남도 태안군의 북서부 해안에 있는 만이다. 서쪽은 태안군 태안읍 · 원북면 · 이원면으로, 동쪽은 서산시 팔봉면 · 지곡면 · 대산읍으로 에워싸여 있다. 만의 입구가 북쪽으로 열려 있다. 만내에는 고파도 · 웅도 등 규모가 큰 유인도와 율도 · 피도 · 조도 · 대우도 등 규모가 작은 무인도가 있다. 『조선지형도』에서 처음으로 지명을 볼 수 있다. 그 지도에 해안선의 드나듦이 매우 복잡하고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현대지도에는 만의 곳곳에 농경지와 염전이 조성되어 해안선이 많이 단조로워졌으며 육지에 가까운 작은 섬들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23-07-08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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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명사십리 명품영상들
감사해요.
명사십리작성자 18:01 새글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늘 건강하셔서 함께하시는
날들이 많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