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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白頭大幹을 하고 있는 자유인의 英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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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白頭大幹 새재도립공원 이화령에서 - 계묘년 7월 23일 자유인산악회 백두대간26기종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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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산>- 새도 쉬어넘는 거대암봉 신선암봉을 가다, |
일시: 2023년 7월 23일, 자유인 26기수-제28구간, 기록: 한문희총대장, 사진: 대원들 취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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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白頭大幹 조령산에서 - 계묘년 7월 23일 자유인산악회 백두대간26기종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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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26기 백두대간 조령산-신선암봉 종주기록, ▶일시: 2023년 7월23일(일요), 한문희총대장 外 29명 ▶대간숲길: 이화령-헬기장1~2~3-조령샘터-조령산-안부(마당바위)-안부(절골)-안부(한섬지기)-828봉-전망대-821봉-안부(깃대봉3거리)-산성터-조령3관문(문경새재)-조령산휴양림-고사리주차장, ▶도상거리: 11.5km, 선두6:30분, 후미7:30분소요, -07:20분, 서울 양재역 최종출발, -09:25분, 이화령 도착, (충북 괴산 연풍 이화령로561) -09:35분, 이화령(529m) 들머리 산행시작, -09:38분, 첫 번째 헬기장, -10:01~06분, 758m, 두 번째 폐 헬기장, -10:30분, 조령 샘터,(샘터 표시석이 없음) -10:47분, 능선안부 (절골2.7km), -10:52분, 정상직전 헬기장, -11:00~20분, 조령산(1017m), 지현옥추모비, 휴식, -11:30분, 안부~(마당바위3거리)~東으로, -11:42분, 안부~西편으로 (절골3거리), -12:22~52분, 신선암봉(937m) 정상, 점심, -13:00시, 직벽 구간 테크계단 설치로 오르내림 수월, -13:05분, 안부~(西편으로 한섬지기3거리 4km), -14:26분, 928봉, 국보급 명물 소나무, -14:30분, 석문바위, -15:00시, 전망대에서 휴식, -15:25분, 안부~821봉, 깃대봉3거리, -15:45분, 산성터, -15:59~16:20분, 조령3관문, 새재휴게소휴식, -17:00시 이화학당 연수원, -17:10분, 고사리주차장, 산행마감(휴식포함 후미7:30소요) ※진용은 발목, 김재환 가슴, 2분 타박상, 큰 부상 아니길 기원하며!. 장맛철 우중에 수고들 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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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白頭大幹 신선암봉에서 - 계묘년 7월 23일 자유인산악회 백두대간26기종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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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령~조령산~신선암봉~깃대봉~조령3관문~소조령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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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26기 백두대간 28구간 이화령~조령3관문 종주 STORY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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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릿재: 이화령(梨花嶺)의 옛 이름이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이다. 이화현(伊火峴)으로 불리던 옛날에는 통행이 적은 자그마한 고갯길이었다.
그러나 1925년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열리면서 중부와 영남을 잇는 큰 길이 되었다. '조선세종실록'이나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분명하게 '이화현'(伊火峴) 표기되어 있던
이름이 '이화령'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이다. 조선총독부는 1914~1918년에 걸쳐 조사하여 '근세 한국 오만분의일 지형도'를 제작하였다.
이 지형도에서부터 '이화현'(伊火峴)은 '이화령(梨花嶺)'으로 표기되었다. 우리말로 풀면 '배꽃고개'라는 아름답고 정겨운 이름이다.
그러나 원래 이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답습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 고개가 이우릿재라는 옛 이름을 찾았다.
문경시가 2007년 '이화령'이라는 지명을 폐기하고 '이우릿재'라는 우리 고유의 이름을 되살린 것이다.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름을 버리고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걸어 넘으면 마음에 담아 부르던 이름을 찾은 것이다. 글 한문희총대장010-7679-7587,
▶조령산: 조령산군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많은 탐방객을 불러들인다.
조령산의 유래는 새도 쉬어 넘는다 하여 새조(鳥) 우뚝솟구친(嶺) 뫼산(山) 험준하여 바람도 구름도 새도 쉬어 넘는다 하였다,
건너편 주흘산과 난형난제하면서 조곡천을 거슬러 문경새재 길을 열었으니 바로 영남인 들의 한양 나들이하는 제일 관문이다.
수려한 그러면서도 험준한 주흘과 조령은 장정2-30명이 모여야 넘나들었고 조선 태종10년에 국도로 지정되었다.
박달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전국의 홍두께와 디딤 방망이를 공급하였다한다. 양 진영의 산군에 수려한 계곡이 낙동강 상류에 속하는 조곡천이다.
마루턱에는 조령3관문이 역사를 대변하고 힘들게 넘나들던 나그네의 갈증을 해소하는 조령 샘이 있다.
정상에서 솟아난 샘물은 가뭄이 극성을 부려도 마르지 않으며 1바가지 마시면 10년은 젊어진다니 2잔 이상은 삼가 바랍니다.
한문희총대장010-7679-7587,
,이곳이 조령산군의 신선암봉이다.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신선암봉,
▶신선암봉(神仙巖峰 937m): 大韓民國 白頭大幹 문경과 괴산 연풍 접경에 신선만이 드나드는 성스런 곳이다.
이우리지(이화령)에서 북으로 5km에 지점에 있고 조령3관문 문경새재에서 남으로 7km 지점에 있다.
이곳 구간은 화강암 거대 암봉들이 연이어 있으며 동서로 수직 직벽 암봉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이다.
신선암봉 정상에는 앙증맞은 표지석이 전면에는 신선암봉으로 후면에는 神仙巖峰으로 설치되어 있다.
대규모 화강암 슬랩이 몇 십 명은 앉아 풍광의 여유를 즐길 수 있으며 수려한 산세들이 남으로 조령산의 경관과 북으로 깃대봉의 암릉미와 마패봉의 위엄과
동으로 건너편 부봉1~6봉의 찬란함과 문경의 진산 주흘산의 존엄함을 조망하며 신선암봉이 왜 어찌하여 귀한 산명이 부여 되었는지 존경심으로 머물렀다 바람 따라 갑니다.
한잔 술에 시름을 잊고, 천하절색 산중 미인들을 바라보며, 산길 험하다 하여도 이곳이 내 집인가 하노라, 한문희총대장010-7679-7587,
조령산과 신선암봉 구간은 천혜의 자연미가 살아 있어 백두대간 로드 길에서 몇군데 안되는 릿지 암벽 등반을 하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안전시설을 테크 계단으로 요소요소에 설치하여 자연스런 산행의 묘미가 퇴색되어 예전의 스릴 넘치던 분위기는 엣 추억 속에 자리할 뿐이다.
이곳 30미터 지점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자유인 한문희총대장010-7679-7587,
조령산~신선암봉을 지나고 30미터 암릉구간도 지나 겨우 빠져 나아가는 석문을 빠져 나오는 백두대간 최경숙+이재은여성대원,
▶조령3관문 성터이다. 아래는 문경새재의 수호신 산산각이다.
문경새재도립공원(聞慶─道立公園), 문경새재(聞慶새재, 영어: Mungyeongsaejae Pass)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이다. 1974년에 지방기념물 제18호, 1981년 6월 4일에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난 1999년부터 학술연구용역 및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체계적으로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고 2007년 10월 18일 개장했다. ►역사(歷史): 예로부터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문경새재 길은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거리였다. 특히, 영남지방의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질까 봐,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질까봐 가지 않고, 문경새재를 통해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고 한다. ►명칭(名稱): 새재 또는 한자어로 조령(鳥嶺)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고대에는 '초점'(草岾)으로 불렸는데, 이를 한글로 옮기면 새재이다. 이후 새재를 한자표기로 변경하면서 조령으로 표기하였다. 명칭에 관한 다른 설로는 문경읍 관음리의 하늘재와 괴산군 연풍면의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에 난 고개'라는 설과 '새로 생긴 고개'라는 설이 있다. 또 옛날 이곳에 억새가 많아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문화재(文化財):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뒤에 제 1관문 주흘관, 제 2관문 조곡관, 제 3관문 조령관의 3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관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출장을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의를 제공했던 조령원터, 도적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덮쳤다는 마당바위, 조선시대 구 경상감사가 신 감사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해주던 교귀정이 있다. 또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산불됴심(산불조심)’이 적힌 표지석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어로 된 한글 비석 4점 가운데 국한문 혼용이 아닌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문경새재는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숲길 등 경관 가치가 뛰어나며,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문경새재(聞慶鳥嶺): 聞慶새재(鳥嶺) 명승 제32호: 문경새재는 조선의 옛길을 대표하는 관도(官途)로,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며,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의‘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새들도 쉬어넘는 힘든 고개’라는 뜻의‘조령(鳥嶺)’으로 기록되어 있다.[6] 조선 태종 14년(1414)에 문경새재 계곡을 따라 제3관문(조령관)까지 650m의 고갯마루를 개척해 문경에서 괴산, 연풍을 잇는 대로(大路)가 개통되었다. 조선시대 영남대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 기능을 했다.[6] 문경새재는 산성을 쌓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사적 제147호)과 국립 여관에 해당되는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자, 주막터, 성황당 그리고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다.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 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조선 최고의 옛길이다. 문경새재 일대는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숲길 등 경관 가치가 뛰어나다. 현재‘옛길 걷기체험’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의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출처: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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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하나로 연결된 大韓民國 白頭大幹!..
고개와 령 봉우리와 산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산길,
구름이 쉬어가고 바람이 넘나들며 물길을 가르며 사천오백리
혼불이 되어 민족의 백두대간이 살아 숨쉬는 곳,
우리는 그길을 간다.
우보천리하는 자세로 구도자가 되어
물을 가르는 산자분수령을 간다.
>백두대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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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탐사 Story - 02, 종주 사진편이 이어집니다.
댓글하나 남기는 센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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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날이 흐려서 그멋진 풍광은
안보이지만
우리들 인물사진은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네요
회장님 말씀대로
저도 총대장님 만난것은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밧줄구간에서
우리모두를 한사람 한사람
안전하게 올려보내시던
대장님모습 정말
존경스러워요
너무 너무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