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복은 유니폼이 아니다
제57기 사미사미니계 수계교육 고불식 8월19일 직지사 만덕전(사진출처 = 불교신문)
출가수행자들의 옷을 가사(袈裟, 승복)라고 한다. 가사는 불교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다. 승가의 전통에서 스님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은 삼의일발(三衣一鉢), 즉 가사 세 벌과 발우 한 개다. 가사 세 벌의 소유를 인정한 것은, 더럽혀지면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사를 만들 수 있는 소재로 나무껍질이나 모피는 금지된다. 비단도 허용되지 않는다. 살생(殺生)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아주 추운 곳에서는 예외를 두기도 했다.
가사를 입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서 입는 ‘편단우견’이다. 큰스님께 인사드릴 때나 부처님께 삼배 올릴 때 입는다. 둘째는 탁발 등 외출할 때 양쪽 어깨를 모두 가리고 입는 ‘통견’이다. 일반적으로 사원 내에서는 ‘편단우견’을, 외출할 때는 ‘통견’을 적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후의 특성으로 인해 장삼을 입고 그 위에 가사를 걸치는데, 이를 합해 승복이라고 부른다.
입고 벗을 때는 물론, 입고 생활하는 순간순간에 출가수행자들이 가사에 대해 다짐해야 하는 마음가짐이 있다. ‘제가 사용하는 가사에 대해 올바른 생각으로 관찰합니다. 다만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파리와 모기, 비바람과 태양열, 여러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다만 몸을 가리고 수행하기 위해 이 가사를 사용하겠습니다.’가 그것이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편단우견'
가사는 불교에서 신성한 보시물로 매우 귀하게 여긴다. 특히 안거를 마친 스님들에게 가사를 공양하면 큰 공덕을 짓는다고 알려져 있다. 소부경전 등에 가사공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에 따르면 가사공양 공덕을 지으면, 언제 어디서 태어나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몸을 받으며, 항상 최고급의 옷을 입고, 재물이 없어짐 없이 생활할 수 있다. 또한 괴로운 피부병에 걸리지 않으며, 화상 등을 입어도 빨리 완치되고, 흉터도 남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먹는 일로 인한 장애가 생기지 않으며, 급격한 기후 변화에도 견딜 수 있는 체질이 되고, 물질에 집착 하는 마음이 자꾸 줄어들고, 집착하지 않는 성격을 갖게 돼 지혜의 완성과 해탈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한 스님에게 가사 한 벌을 보시해서 얻을 수 있는 공덕도 이렇게 대단한 데, 가사를 승가에 보시하면 그 공덕의 크기는 ‘무량·무제한’이 된다. 보시의 대상이 사방승가(四方僧伽)여서 그 수가 무량하므로 무수한 성자에게 보시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가사를 입어보면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벗겨지거나 흘러내린다. 필자도 미얀마에서 단기 출가하여 잠시 비구로 지낼 때 가사를 처리하는 데 곤욕을 치렀다. 조금만 방심해도 흘러내려 맨몸이 드러나는 통에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오죽하면 가사를 ‘사띠(알아차림)를 부르는 옷’이라고 불렀을까. 사띠를 놓치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늘 조신하게 해주는 옷이니, 가사는 최고의 수행복이기도 하다. 수행은 ‘마음을 침착하게 하고, 인내하는 것’이 핵심이니, 가사처럼 훌륭한 수행도구도 드물다.
특히 가사는 수행자와 한 순간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 테라와다 승가의 출가자들은 몸을 씻을 때조차 가사를 벗지 않는다. 가사를 입은 채로 목욕을 하고, 그 자리에서 새 가사로 갈아입은 후 가사를 세탁한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가사는 ‘아라한의 깃발’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가사를 입은 비구는 ‘깃대’에 해당될 뿐이다. 따라서 이곳 불자들이 절을 하는 것은 비구가 아닌 비구가 걸친 가사에 예경을 하는 것이다. 예경의 대상은 아라한의 깃발이지, 깃대가 아닌 것이다. 테라와다 비구들에게 절을 하거나 합장을 할 때 비구들이 맞절로 응대하거나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데면데면한 태도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탁발 등 외출할 때 양쪽 어깨를 모두 가리고 입는 ‘통견’.
가사에 대한 남방에서의 존숭은 이처럼 대단하다. 그러므로 출가수행자가 가사를 벗으면 외도(나체수행자)가 되고, 재가의 옷을 입으면 출가 정신을 오염시키는 것이 된다. 승복은 의식복이 아니며, 유니폼도 아니다. 필요에 따라 입고 벗는 그런 대상이 아닌 것이다. 승복이 불편할 수 있고,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견뎌내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자가 가져야할 자세다.
최근 한국불교계 일각에서 ‘승복 미착용자에 대한 징계규정’을 삭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규정이 있어도 엄격하게 지켜지기 어려운 환경인데 아예 없애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재가자의 옷을 출가자가 아무런 규제 없이 입을 수 있게 허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결코 손대서는 안 될 ‘기본 중의 기본’을 훼손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