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일괄적으로 넘겨버리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렸고 그로인해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중요성을 말씀합니다. 영원한 속죄 제사를
위한 속전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11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레위 지파 제사장의 제사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죄를 헌금이나 봉사나 어떠한 대가로 없이 하지 못합니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이고 보상금을 물어준다고 해도 양심의 가책은 남습니다.
어떤 보상으로도 우리의 죄의 양심의 가책을 없앨 수 없습니다. 제사나 예물
곧 소나 양이나 염소 이런 것 갖고는 사람의 양심의 가책을 없앨 수 없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일반양심으로 인해 이 말씀이 잘 안 이루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해 고민을 하십시오.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참 자유를 누립니다.
12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어딘가요? 그 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사를
드리므로 속죄의 중보로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려 지금도 그 효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드렸지만 영원한 제사이므로 항상 효력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든 유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옳다함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도 옳다함을 얻습니다. 주께서 옳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를 힘입어
나아가면 다 옳다함을 얻습니다. 또 하나님의 우편이란 권세와 능력 곧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속죄 제사를 드려서 영원토록 효력 있는
속죄의 제사장이고 또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의 완성을 이루시는 중보의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가십니다.
13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렇지만 아직 남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마귀가 발등상 될 때까지입니다.
반드시 자동으로 이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을 계속 하시니까 자동으로
시간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반드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싸움은 이미 약속된 싸움입니다. 주님께서 이기기로 약속된 싸움입니다.
다만 육체에 담긴 우리의 인생의 배가 세상에서 출렁거리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도 보여주실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보이신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앉아 계시다가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얼마나 마음이 바쁘셨으면 서 있는 모습을 보였을까요?
그런 모습을 환난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 성도들이 능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의 개념을 가지고만 있으면 그 개념으로 인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믿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영원한 속죄의 제사장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의 중보의 제사장으로 계신다’는 믿음의
지식을 왜 가지고 있어야 되느냐 하면 평상시에는 별 효능 가치가 없을 지라도
우리가 환난이나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 우리가 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그 사실을 믿고 보았습니다.
15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성령의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겁니다.
16절 이하는 성령이 예레미야를 통해 증거한 내용입니다(렘31:31-34)
16절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그날 후로는 바로 새 언약의 때입니다.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리라’ 그래서 우리의 영이
우리의 존재의 중심이 되고 우리의 마음, 생각, 육신은 영의 하수인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우리 영에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찬송합니다.
그 분의 영이 우리 영안에서 충만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내 속에서 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고야 말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은 영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사이에서 싸우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바로 영적 신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것이 이익일 될까? 저것이 이익이 될까?
싸우는 것은 영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그건 선악과의 독성을 가진 일반양심입니다.
내 속에 있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싸우는 것이 영적인 싸움입니다.
영적 신자라고 해서 완전히 영적으로 끝이 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단히 싸워야 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억지로
제어하려고 하지 말고 영의 양식을 축적해 나아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묵상을 계속하면 옛 사람은 점점 낡아져 가는 가기 때문에 스스로 행동의
허리띠를 졸라매지 마십시오. 옛 것은 점점 낡아져 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진화시켜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17절 “또 그들의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 등 뒤로 던져버리신다는 뜻입니다.
죄의 본질을 없애버리겠다 다시 말하면 죄의 성향을 없앤다는 말입니다.
죄가 어떤 존재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데 그게 바로 성향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자아와 욕심을 이용해서 하나님 반대편으로 향하는 성향이 바로 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이 성향을 바꿔버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없애 버린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롬8:6)
우리 속에서 생명의 성령이 죄의 생각을 할 수 없도록 그 성향을 돌려버리십니다.
죄의 본질을 없애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내 속에 있는 다른 한 법 곧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죄 되게 하기 때문에 그 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바꾸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전에는 마음에만 있지 실제로는 안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원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하는 수 없이 끌려가는 나였지만 이제는 죄에 대해서 마음으로부터
그 소욕조차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싫어집니다.
거의 모든 이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면서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은 수업료를 최대한 적게 지불하고 성공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과 육체의 싸움에서 빨리 성령의 소욕이 적어도 51% 이상을 차지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 속에 주식보유량을
체크해 봐야 됩니다. 성령님이 많이 갖고 계시는가 육체가 많이 갖고 있느냐는 겁니다.
생명의 성령의 원리가 죄의 법을 이겨냅니다. 죄와 죄책감을 없애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불법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의가 통합니다.
그래서 불법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18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더 이상 죄를 위하여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15절부터 18절까지 자세히 묵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없느니라”하십니다. 왜요? 이미 하나님께서 죄와 불법을 없이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그 말씀으로입니다. 만약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 18절을 자세히 묵상해 보십시오.
역설이지만 만약에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져와야 되겠지요?
제사 드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드리고 싶으면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져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현금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웃으려고 하는 이야기지만 자신의 죄를 위하여 꼭 돈으로 드리고 싶으면 10만원
100만원 잔돈 말고 죄 한 건당 소 한 마리 값은 되도록 가져와야 되지 않겠어요?
“제사를 드릴 것이 없느니라” 돈으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효력을 갖는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만약 여기에 덧붙이면
그 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을 얕보는 것이 되므로 그 분을 욕보이는 일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새 언약의 중보로서
구원사역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진리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임하셔서 끊임없이 그의 의와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무제한으로 공급하고 계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