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 케마 스님
나치·전쟁 공포 겪고 찾은 일상서 만난 불교로 인생전환
▲ 유태인 부모에게 태어나 고초를 겪은 아야 케마는
불교를 만나 공허함을 채워갈 수 있었다.
아야 케마(Ayya Khema)는 상좌부불교의 긴 역사에 크나큰 업적을 남긴 여성으로 여겨진다.
1923년 독일 베를린의 평범한 유태인 부모 아래 태어난 아야 케마는
1960년 불교를 접하고 불자가 되기까지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호주 여행서 상좌부불교 인연
불자들과 공동 모임 참여하며
마음 속 어두운 그림자 사라져
불교가 빈 마음 채울 대안 확신
20세기 초 나치즘 운동이 독일 전역에 점점 확산되기 시작하자
유태인 출신이었던 그녀의 부모는 공포에 빠져 독일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구의 가장 끝이라고 믿었던 중국으로 망명을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린 딸을 데리고 무작정 미지의 나라 중국으로 떠나기가 걱정되었다.
그들은 아야 케마를 독일에 거주하던 200여명의 다른 유태인 소녀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기숙학교로 보내게 된다.
스코틀랜드에서 나치에 대한 공포심 없이 평화롭게 학업을 마친 아야 케마는
졸업 후 드디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서 가족과 눈물의 재회를 하게 된다.
중국에서 다시 뭉친 케마 가족은 이제 안정과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군에 의해 중국이 침략당하며 케마 가족 모두가 수용소 캠프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 아야 케마의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다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몇 년 후, 수용소 캠프의 일본군들은 중국에 도착한 미군들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아야 케마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됐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픈 기억과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삶을 잊고자
중국 땅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던 아야 케마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두 명의 아이를 둔 주부로서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커다란 근심 없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던 아야 케마는
언제부턴가 점점 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외로운 생활,
마침내 찾은 행복이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불행에 빠졌던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이 모든 기억들과 지금의 무난한 삶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한 그녀는
모든 어두운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롭고 긍정적인 삶의 목표를 찾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잠시 가족을 뒤로 남긴 채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남미 대륙 전역을 여행하고 오랫동안 파키스탄과 인도를 여행했다.
그 후 호주 여행을 하고 있던 아야 케마는
그곳에서 우연히 상좌부불교와 접하게 되는 기회를 맞는다.
스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또 호주 불자들과 여러 공동 모임에 참여하며
그녀는 그녀 마음 속 깊이 뿌리내려있던 어두운 그림자와 암울한 기운이 점점 사라짐을 느꼈다.
그러면서 점차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된다.
불교 서적들을 끊임없이 읽어가며 또 명상을 배우며
그녀는 불자로서의 삶이 그녀의 마음에 비어있던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남방불교 비구니 된 후 샤카디타 창립·여성 권익 앞장
▲ 아야 케마는 암울했던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 삶을 개척한 도전적 여성 불교인이었다.
아야 케마는 1978년 호주 시드니 근처에 정통 남방불교를 교육하는
‘왓 붓다 다르마 센터(Wat Buddha Dharma)’를 설립했다.
스리랑카 파라부두와 센터와 왓 붓다 다르마 센터 두 센터 모두에
많은 서양인 불자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며
그녀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불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독일에서 온 불자들 몇 명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도망치듯이 떠나면서 감춰왔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독일인을 만나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독일 출신 불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그녀는 어린 시절 떠난 이후로
절대 들리지 않았던 고국 독일을 마침내 방문했다.
그리고 그 후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붓다 하우스(Buddha Haus)’라는 명상 센터도 설립했다.
호주·독일에서 불교센터 설립
세계 곳곳서 여성불자센터 운영
복잡한 삶 걸림돌로 생각 않고
도전적 여성불교인 이미지 개척
1979년 스리랑카로 여행을 떠난 아야 케마는
그곳에서 여성 불자를 대상으로 명상 강연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녀는 남방불교에서 비구니가 되었고
이후 파라푸두와(Parappuduwa) 지역에서
‘비구니의 섬(Nuns’ Island)’이라는 재단을 설립했다.
비구니가 된 후 그녀는 아야 케마라는 법명을 얻었다.
스리랑카 팔리어로 ‘아야’는 ‘덕망 있는’을 ‘케마’는 ‘안전하고 안심되는’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여성 불자만을 위한 국제 센터도 설립한다.
국제 여성 불자 센터를 세운 목적은 단 한 가지다.
여성 불자 가운데 비구니가 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거나 망설이는 경우
이곳에서 먼저 비구니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하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아야 케마는 어느 날인가 불교 모임에 참석했다가
스리랑카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던 그녀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부처님의 훌륭하신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하고자 한다면
그저 작은 우물 안에서 머물며 안정된 삶을 살지 말고
모험심을 가지고 세계로 나가 그 가르침을 전파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스리랑카를 떠나 세계를 돌며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강연을 열기 시작했다.
아야 케마는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런 그녀였지만 비구니가 되는 순간까지의 과정이 녹록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비구니가 되고 싶어도
그 과정 때문에 망설이는 많은 여성 불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처지 개선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세계 최초로 비구니들을 위한 국제 콘퍼런스인 샤카디타(Sakyadhita)도 개최했다.
그리고 여성 불자들을 위한 센터를 세계 각지에서 운영 중이다.
실제로 그녀가 개최한 국제 콘퍼런스는 달라이라마에 의해 공식적으로 개막되기도 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슈를 낳았다. 그녀의 도전적인 개척 정신과 모험정신,
그리고 평소의 소박하고 긍정적인 삶의 모습은
영어와 독일어로 발간된 많은 저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야 케마는 1997년 11월2일 독일 오이 미텔베르그크(Oy-Mittelberg)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복잡하고 우울했던 자신의 삶을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삶을 개척해가며 부처님 말씀을 전했다.
용감하고 도전적인 여성 불교인의 이미지를 개척했던 아야 케마는
불교계에서 매우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알랭 베르디에 저널리스트
2018년 2월 7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