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_어떤 날밤

[천심]

어떤 날밤

김 동 인

여보게.

창피창피 한대야 나 같은 창피를 당해본 사람이 있겠나.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도 부끄러울세. 그렇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창피는 다시 한번 당해보고 싶기도 하거든.

이야기할게. 들어보게.

5년 전…… 6년 전…… 7년 전인가. 어느 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혈기 하늘을 찌를 듯하던 젊은 시절일세그려. 지금은 벌써 내 나이 삼사십. 얼굴에는 드문드문 주름 자리까지 잡혔지만 이 주름 자리도 없던 젊은 시절.

절기는 봄날. 우이동 창경원에 벚꽃 만개하고 사내 계집 할 것 없이 한창 바람나기 좋은 절기일세그려. 얌전하던 도련님 색시들도 바람나기 쉬운 봄철에 그때 장안 오입쟁이로 자임하고 있던 이 대감이 가만있겠나.

비교적 수입도 좋것다. 허우대, 풍신, 언변, 남한테 빠지지 않고 시조 한 마디 가야금 한 곡조도 뽑아낼 줄 알고 경우에 의해서는 호령 마디도 제법 할 줄 알고…… 장안 오입쟁이로는 그다지 축가는 데가 없던 대감일세그려. 그 위에 여관 생활하는 자유로운 몸이것다. 친구 놈들도 모두 제법 한몫씩은 보는 놈들이것다.

이런 이 대감께서 말일세. 그 어떤 와류생심하고…… 아니 이러다가는 교외 정조가 나겠네.

도회 풍경으로 사쿠라 만개하고 창경원에 야앵(夜櫻 : 밤 벚꽃) 구경의 바람쟁이들이 몰려가는 날 몇몇 친구를 짝해서 한바탕 어디서 답청(踏靑)을 잘했다고 하세.

돌아오는 길일세.

친구 놈들은 제각기 기생집으로 갈 놈은 기생집으로 가고 여편네 궁둥이를 찾아갈 놈은 제 ¨칩으로 가고 대감은 기생집도 그날따라 갈 생각도 없고 해서 여관으로 향했네. 밤도 자정은 지난 때. 야앵 구경 갔던 연놈들도 모두 음란한 자리 속으로 바야흐로 들어갈 시간에 이 대감께서는 아주 호젓한 마음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여관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옥보를 옮기고 있지 않았겠나. 어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일세그려. 웬 계집애와 탁

마주쳤네그려.

물론 예의를 차리는 이 대감이 사과를 했지. 고멘나사이(용서하십시오), 하고. 그러고는 그냥 지났지. 지나고 생각했네. 여기는 북촌이다. 북촌의 대로도 아니요 골목이다. 이 북촌 골목에 웬 남촌 계집애가 단 혼자서, 그것도 자정 이 지난 이때에 방황하고 있느냐고.

연구라고까지는 할 수가 없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보매 문득 호기심이 벌떡 일어났네그려. 휙 돌아보았지. 그 계집애는 만약 그냥 길을 걸었다 하면 당연히 모퉁이를 돌아가서 보이지 않올 것인데, 계집애는 나허구 마주친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다. 몸까지 이리로 돌리고 있는 듯하다.

거기에는 한창 혈기의 오입쟁이의 자만심도 있지. 하하, 이 대감께 마음이 있는 모양이구나. 어두워서 똑똑히는 못 보았지만 그만 했으면 하룻밤쯤은 쓸 만도 해. 혼자서 만족히 여기면서, 또 다음 모퉁이를 돌아섰지. 그 모퉁이를 돌아서 세 걸음인가 네 걸음인가 더 가다가 발을 멈추었겠지. 그러고는 발길을 돌렸것다그려.

왜 웃나? 웃지 말고 들어.

돌아서서는 이번에는 고양이 걸음으로 살짝살짝 다시 모퉁이까지 갔지. 가서 목만 길게 뽑아가지고 계집애 있던 곳을 엿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계집애가 도로 이리로 향해 오네그려. 마음을 똑똑히 잡지 못한 듯이 걸음걸이가 매우 거북스러워.

하하하, 오누나. 그러면 그렇지. 이 자긍심 많은 대감의 거동을 보게. 대감은 얼른 다시 돌아섰네그려. 그리고 구두끈이 풀어진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구두끈을 풀었다 맸다 하기 시작했다.

그 동작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좌우간 허리가 아프도록 굽히고 서서 구두끈 장난만 하고 있네.

계집애도 걸음이 매우 내쳐지지 않은 모양으로 꽤 오래 오데. 굽히고 서서 다리 틈으로 계집애가 모퉁이를 돌아오는지 안 오는지를 엿보면서 허리가 거의 끊어지리만치 기다리니까 그제야 모퉁이를 돌아서겠지.

거기 내가 굽히고 서 있는 것을 보더니 계집애가 몸을 흠칫해. 흠칫하고는 주저해. 그러더니 다시 걸어서 내 곁으로 빠져서 내 앞을 서서 가네.

나도 비로소 일어섰지. 일어서서 천천히 따르기 시작했지. 계집애는 나보다 대여섯 걸음 앞서서 가네그려. 호젓하고 침침하고 고요한 골목에서 계집애의 뒤를 밟으며 혼자 고소했네그려. 오입쟁이로는 자처했지만 계집애의 엉덩이를 쫓아다니는 불량자는 아니었던 이 대감이 우연한 기회에 불량자 노릇을 하면서 에라, 돌아서버릴까까지 생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쫓아갔지.

이렇게 따라가니까 계집애도 거북한지 더욱 걸음을 늦추어. 하릴없지. 나는 더 늦출 수는 없어서 그냥 그 걸음대로 가니까 세 걸음 거리가 두 걸음 되고 한 걸음 되고 나란히 하게 되고 앞서게 됐지. 그 앞서 게 되려는 순간일세그려.

“아노(저)…….”

계집애가 문득 입을 열어. 그래서 앞서려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지 .

“좃도 우카가이마스카(좀 여쭤보겠는데)…….”

“네.”

“저…… 인천서 야앵 구경을 왔다가 기차를 놓쳤는데 이 근처에 조용한 여관이 하나 없겠습니까?”

장안 오입쟁이, 기생 이외의 계집에게 눈떠보아서는 안 될 당당한 신분일세그려. 그렇지만 남아의 의기가 그런가?

“그것 곤란하시겠습니다. 여관이야 있구말구요.”

“미안하지만 그럼 한 군데…….”

“어렵잖습니다.”

이리해서 대감의 호텔로 데리구 왔다.

불행인지 행인지 나 묵어 있는 여관은 그날따라 시골에서 꽃구경꾼이 많이 와서 방이 없다. 어쩌겠나. 이 의협 남아가 초면의 계집애더러 내 방에 같이 묵음시다고야 체면이 허락하지 않는 일. 서로 슬금술금 눈치만 보네.

“고마리마시타나(곤란하게 되었군요).”

“아타쿠시코소 고메 이와쿠 가케마시테 (저야말로 폐를 끼처서…….”

“도모(대단히)…….”

쓸데없는 소리만 서로 중언부언.

드디어 이 오입쟁이 대장부가 졸장부가 됐네그려. 한마디 슬쩍 던졌지.

“내 방이 넓기는 넓지만 마사카(설마) 부인네 혼자를 묵으랄 수도 없고…….”

여기 걸려들었네 그 려.

“저는 괜찮습니다만 당신께…….”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만 좋으시다면…….”

“저는 그렇게 해주시면 참 어떻다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야, 보이야! 깨끗한 이부자리 한 벌 더 가져오너라. 이분은 기차를 놓친 분으로서 여사여사 약차약차하게 되신 분이니, 에헴. 이리해서 궐(厥 : ‘그’ 를 낮잡아 이르는 말(=귈자厥者))은 내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자, 이 뒷장면을 어떻게 진행시키나. 자기 말로는 기차를 놓쳤다한다. 사실일까. 사실이면 왜 하필 조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었나.

전등 앞에서 보니 나이는 스물너덧. 그 옷차림으로 보아서 허튼 계집은 아닌 모양. 얼굴도 십인지상은 되겠고 가진 물건으로 보아서도 상당한 집 딸이 아니면 아내.

이런 점으로 보아서는 막차를 놓쳐서 갈 곳이 없어 헤맸노라는 말이 그럴듯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당한 집 계집 같으면 왜 혼자서 서울까지 구경을 왔으며 왔거든 막차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할 것이지 창경원 닫힌 지도 벌써 세 시간이나 된 입때껏 어디를 무엇하러 배회하고 있었나.

호기심이 무럭무럭 일어나지. 게다가 또 한 가지…… 남아의 의협심을 최절정까지 발휘시켜 이 계집을 곱다랗게 하룻밤 묵어 보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사건을 꾸며보나?

장안의 오입쟁이로 자처하는 이 대감이 길 잃은 계집을 여관으로 끌어들여 희롱했다 하면 말대까지의 치욕이라. 그럼 곱다랗게 재워보내나?

그러나 아까울세그려. 기생과의 장난은 그다지 축에 빠지는 편이 아니지만 기생 아닌 계집은 접해본 일이 없었더니만치 이 희식(希食)을 그냥 놓기도 아까워.

오입쟁이의 체면을 지키나 혹은 눈 딱 감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나.

에라, 오입쟁이 기권해라.

“참, 저녁 어떻게 했습니까?”

“먹었습니다.”

“잡수셨대야 지금이 벌써 자정 이 지났으니까 시장하시겠지요.”

“괜찮습니다.”

눈을 슬쩍 굴려서 이 용안을 보네. 사양은 하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

청요리를 시켰지. 약주도 좀 받고 기생이나 응대하자면 손익은 일이지만, 내 평생 처음 대해보는 영양인지 영부인이라 주장군(酒將軍)의 조건이 없이는 좀 곤란하단 말이지.

“한 잔…… 꼭 한 잔만 드세요.”

“약주는…….”

“그러기에 한 잔만.”

“미안합니다.”

궐의 눈가에 슬쩍 미소가 보이네. 자긍심 많은 이 대감 미소에 됐다 했네그려.

‘꼭 한 잔’, ‘꼭 한 잔’이 거듭되고 대감도 취하시고 궐도 취하고…….

봄날. 청춘. 술기운. 좁은 방…… 운우지정(雲雨之情)에 이러구저러구……·차간일행략야(此間 一行略也)라.

자, 그런데 오입쟁이의 근성이 이런 때에는 더러워. 궐은 곤한지 좀 있다가 잠들어버리고 혼자 잠 못 든 견우(牽牛 : 견우직녀 설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대감.

생각했네. 자, 내일 저 계집을 해우채(기생, 창기 따위와 관계를 가지고 그 대가로 주는 돈(=해웃값) ‘해의채(解衣債):치마를 벗음)’ 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라도 주어야 하나. 하다못해 기차비라도 주어야 하나. 계집을 보았으면 반드시 돈을 주어야 된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연구를 했네그려. 딱한 견우성이지.

주었다가 도리어 비웃기나 하지 않을까. 혹은 주어야 할까 어쩌나. 좌우간 천병만마지간을 다 다닌 맹장의 경험으로 분명히 직업적 계집은 아닌데 그런 경우에도 해우채는 주는 법인가, 안 주는 법인가. 이런 것은 불량 소년의 영분이지 오입쟁이의 영분은 아닐세그려.

그런 연구를 하다가 나도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이튿날 아침에 깨보니까 계집이 없다. 제 자리도 벌써 개켜놓고. 방 안을 둘러보니 계집의 핸드백 등도 없고. 간 것이 분명한데그려 .

먼저 내 시계와 지갑을 보니 그냥 있어. 그래서 이 점에는 안심을 하고 보이를 불러서 물어보니까, 계집은 이른 새벽에 깨어서 갔는데 자기의 하룻밤 숙박비는 치르고 그 위에 어젯밤의 청요리 값까지 치르고 갔다네그려.

입을 딱 벌렸지.

생각해야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분명한 시로도(풋내기)인데, 시로도의 일로서는 너무 대담하고 아무런 점으로 보아도 구로도(기생)는 아니고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네그려.

모를 일을 모를 대로 그냥 의문에 붙여두고…… 그 뒤부터는 이 선악과를 맛본 아담은 때때로 그 생각을 했네그려. 무슨 영문인지 그 까닭을 알아보고 싶다기보다 ‘구로도’ 아닌 계집의 은근한 맛이 잊히지를 않아.

이런 꿈과 같은 일을 겪은 뒤에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난 줄 알았지. 그 후일담이 생기리라고는 뜻도 안 했지. 후일담이 있을 성질의 사건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일에는 후일담이 있네그려.

한데 후일담이 있어.

사건이 있은 지 1년 뒤…… 그때 나는 벌써 그 사건을 사건으로 기억할 때가 아니요 지나간 꿈으로 기억하고, 생각날 때에는 뜻 안하고 미소와 고소를 겸발하게쯤 된 때일세그려.

인천에 군함이 왔것다. 별로 군함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기생 년들이 구경 가자고 너무 졸라대서 에라, 그래라 하고 기생 몇 명올 모시고 인천으로 거동을 하시지 않았겠나.

거기서 뜻 안 한 궐녀를 보았네그려. 군함에서 말일세. 군함 사령탑에 올라가는 층계에설세.

나는 기생 몇 명을 달고 올라가거니 궐은 내려오거니 하다가 딱 마주쳤지. 몬츠키(가문(家紋)을 넣은 일본식 예복)를 입었데. 궐도 귀부인 같거니와 귀부인인 듯한 여인 몇 명과 동반을 했어.

딱 마주치니까 자기도 깜짝 놀라. 대감도 오입쟁이답지 않게 눈이 아뜩하데그려. 그렇지만 궐녀가 시치미를 뚝 떼기에 대감도 같이 떼었지.

한데 그때 여를 배종(陪從 : 임금이나 높은 사람을 모시고 따라가는 일.)했던 사람 가운데 인천 관변의 유력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궐녀와 서로 인사를 주고받거든. 그래서 하문해보았지.

“그 색시가 누군가?”

“그 색시? ○○씨의 마누라.”

“○○씨?”

신문 지상에서 간간 보던 인천 명망가. 그렇지만…….

“○○씨란 60 노인이 아닌가?”

“그렇지.”

“그럼 첩인가?”

“첩은 왜? 본댁이지, 후실…….”

근본은 알았다. 알고 보니 그때 그 밤의 사건이 더 수상하단 말이지.

듣고 보니 희식도 너무 드문 희식.

“영감의 마누라면 간간 오입이라도 하겠네그려.”

던져보았다.

“아니. 그렇진 않은 모양이야. 그래도 좀 적적하긴 한 모양이야. 극장이라 무슨 구경거리에는 빠지지를 않아. 그렇지만 늙은이의 마누라로는 참 정숙하다는 평판이 높은걸.”

“정숙하다?”

짐작이 갔네.

때는 봄날일세그려.

늙은이의 마누랄세그려.

모험도 하고 싶겠지.

봄날 젊은 피가 끓어오르지만 인천 바닥에서는 정숙하다는 평판이 높은 만치 끓어오르는 모험심을 이 좁은 고장에서 어떻게 만족시키겠나.

경성까지 모험을 찾으러 출장 여행.

주저…… 반성 …… 모험 추구심 …… 이렇게 바재고(‘바장이고’ 의 방언.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자꾸 머뭇머뭇 거리고.) 바재는 동안 덜컥 막차 시간도 지나고.

인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모험의 무대에 올라가야 할 터인데, 남촌에서는 그래도 혹은 어떤 일이 생길까 해서 북촌 거리에서 공포와 기대와 주저로써 배회하고 있을 때에 대감께서 그 모험 무대의 피해자로 나타난 셈일세그려.

말하자면 궐녀도 인생 비극의 한 여주인공이지.

이렇게 대감은 뜻 안 한 오입을, 더구나 돈 안 들인 오입을 하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필경 내가 오입을 한 게 아니고 오입을 당한 겔세그려.

장안 오입쟁이가 오입을 하지를 못하고 당했대서야 이런 창피한 일이 어디 있겠나. 체면 똥칠했네.

그렇지만 이런 창피는 또 당해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아.

말하자면 희극이 아니요 비극…… 궐녀도 가련한 인생 일세.

-끝-

2016년 10월 14일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