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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서리요 | 1 1 ①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
요동치 아니함 | 2-5 2 ②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4 ③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5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④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 하리이다 |
15편, 주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인가
요절 :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 오니이까.
15편의 중심점은 “주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11개 덕목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면 “주의 장막에 유하게 된다” 하고 말하는 것을 조심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한다면 행위구원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143:3)는 점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51:5) 하고 자복했겠는가?
14편의 주제가 “시온에서 나오게 될 구원(救援)자”에게 초점을 맞춘 구원론이라면, 15편의 주제는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1)한 실천윤리(倫理)에 강조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짝인 것입니다.
도표를 보시면 ①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를 중심으로, ②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③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④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 하리이다”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첫째 단원(1) 주 앞에 누가 서리요
둘째 단원(2-5)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
첫째 단원(1) 주 앞에 누가 서리요
①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 오니이까”(1) 하고 묻습니다.
㉠ 이는 범죄 함으로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한 아담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절박한 물음인 것입니다. 구원계획이란 무엇인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한, 하나님과 함께 유(留)하고 함께 거(居)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하는 주제는 밝히 들어난 복음을 통해서 답변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6장에서도,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5-17) 하고,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7장에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것을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9-10) 하고 외칩니다.
㉢ 계시록에는 또 한 장면이 있는데,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4:1) 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부언하기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貞節)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계 14:4) 합니다.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 “구속(救贖)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과,
㉯ “정절(貞節)이 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레위기의 두 큰 주제도 5대 제사로 예표 된 “대속제물”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신 “성별”(聖別)입니다. 이런 구속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14편은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14:7) 한 “구원”이 중심주제(主題)고, 15편은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성별된 삶을 말씀함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합니다.
좀 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하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가 있는가?
㉤ 복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1:17, 3:21)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의”(칭의)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게 되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榮光)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즉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주의 장막에 유하고, 주의 성산에 거할”(1)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받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가?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 5:1-2), 즉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감”을 얻는 축복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마련해주신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라면 본문에서 열거한 덕목들의 삶을 살기를 열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 오니이까”에 대한 답변입니다.
둘째 단원(2-5)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
②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
㉠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치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3) 합니다. 이러한 덕목들은, 14편에서 거론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소행과는 반대되는, 즉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의 거룩한 행실들이지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됨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尊待)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4-5상) 합니다. 한마디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명심해야할 점이 있는데 본문이 거론하고 있는 11가지 덕목들이 모두가 “이웃”과의 관계와 결부된 덕목들이라는 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가 않고, 또한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문제는 실천(實踐)해야 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입으로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던 자들이 시야를 이웃에게 돌리는 순간 자신의 거짓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점이,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하신 주님의 답변에도 나타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하자,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17-22) 하시자 이내 거짓이 들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 또 주목해야할 덕목은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4상) 한 덕목입니다. 이 말씀에는 “망령된 자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가 대조(對照)가 되어 있는데,
㉮ “망령된 자”란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10:4),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14:1) 하는 자를 가리키고,
㉯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를 가리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중심이 나타납니다.
③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 하리이다”(5하) 하는데, 이것이 15편의 결론입니다.
㉠ “요동치 아니 한다”는 뜻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도”(마 7:27) 무너지지 않는다는 종말론적인 뜻이 있습니다. 망령된 자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10:6) 하고 큰소리치지만,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 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 하였나이다”(73:19)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또한 “요동치 아니 한다”는 말은 담대하다는 것이 되는데 본문에 열거한 덕목들을 실천하는 자라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하고 말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요, “주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적용 : 형제는 열거한 11가지 덕목 중 특히 어느 점에 걸림이 됩니까?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요동하게” 되면, 두렵건대 사탄은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하게 될 것이고, 불신자들은 “기뻐할까 하나이다”(13:4) 한 말씀을 명심하십시다.
묵상
㉠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당한 자들의 가장 절박한 질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웃과의 관계성을 제시하는 의도에 대해서,
㉢ 14편과, 15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중심주제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