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하고 말하였다.(마태 14,2)
우리네 삶은 매일 매일 끊임없이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중요한 선택과 결정(=직업과 배우자 선택)부터 아주 사소한 선택과 결정(=메뉴, 영화)처럼 아주 폭이 넓고 다양합니다. 그런데 선택에 대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할 때 많은 삶의 에너지가 낭비하게 됩니다. 신중하게 고려하고 시간을 끌고 미루면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실패에 대한 무의식적인 변명이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 다른 우유부단한 원인은 선택한 일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일을 선택하면 그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내가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책임진다는 배짱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속담에 <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의 연상 작용을 잘 나타난 말입니다. 과거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로 일어난 일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비난당한 과거의 일이 늘 어떤 선택 앞에서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헤로데는 본디 요한의 충고, <그 여자(=제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마14, 4)고 하는 요한의 충고가 부담스럽고 거북스럽기는 하지만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보호해 주고자 했었습니다. 허나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헤로데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았는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보고를 받고 예수님을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어떻게 보호하려고 했는지 마르코복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19-20)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난 뒤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자신의 판단을 거슬러 원하지 않은 일을 떠밀리듯이 결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의붓딸에게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하는 자신의 위신과 체면 차림을 위해 거룩한 요한의 목을 베게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 한편에 후회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던 이 사건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지적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일정부분 수긍했다는 뜻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수치스럽고 떳떳하지 않은 행동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고뇌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카이자 의붓딸 살로메의 뇌쇄적인 춤 앞에서 흥분된 헤로데는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습니다.>(마14, 7) 술기운에 객기를 부리고 허세를 부린 꼴이지요. 스스로가 제 무덤을 판다고 하듯이 자신이 전여 예상하지 않았던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의붓딸인 살로메의 요구에는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요한에 대한 깊은 앙심과 복수심의 표출입니다. 기회를 악용할 수 있는 한 여인의 앙심이 그런 부당하고 황당한 요구를 하게 한 것입니다. 의붓딸의 요구를 듣는 순간 헤로데는 괴롭고 황당했지만 <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마14, 9) 한 번 한 약속을 물릴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들 역시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시선이었겠지만 그 보다는 어쩜 왕인 자신의 체신과 체면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하느님의 시선 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했고, 하느님의 인정 보다 스스로가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는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찮은 인간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 거룩한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그의 우유부단함이 단지 헤로데만의 문제이겠습니까? 헤로디아가 아무리 몰상식한 요구를 딸을 통해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요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헤로데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가 불행한 길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 근저에는 <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 술기운이나 감정에 휩싸여서 하는 내뱉는 말>입니다. 불행을 자초 하지않기 위해서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서도 아니 되고, 취중이나 감정에 휩싸여서 함부로 맹세하지도, 말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앙심에서든 위신이나 체면에서든 자신의 그릇된 선택과 결정은 단지 자신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갑시다.
< 주님 저로 하여금 앙심과 체면의 진창에 빠지지 않게 저를 구출해주십시오. 깊은 내면의 죄악의 어둔 강물 속에서 저를 구출해 주십시오. 저로 인해 다른 이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당하지 않도록 저를 늘 당신 사랑의 빛으로 비추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