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지난 2006년,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의 칼럼입니다.
참고삼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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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부드러운 저음의 美學, 안다성[2]
'당시 내 월급은 대통령 월급의 다섯 배는 되었을 것'
▲안다성씨는 서른 살 때 그의 공연을 구경 왔던 11살 차이의 부인 강정남씨를 만나 결혼했다.
장남 태상 군이 5세 때인 69년 가족사진. 이들 부부는 현재 아들 둘과 손자 둘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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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은 당시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안다성씨와 송민도씨가 듀엣으로,
그리고 40인조 시온성합창단(단장 이동일)에 의해 취입되었다.
취입 과정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스스로도 근사했으며 반응 또한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정작 음반은 현인씨와 권혜경씨의 목소리로 출반되었다.
이 노래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안다성씨는 곧바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된다.
당시 오아시스는 일류 작곡가들이 활동하던 메이저 음반사로 그는 전속되자마자
박춘석 작곡의 '아주까리 주막집'을 비롯해 이재호, 손석우, 김호길씨의 곡을 고루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모나리자, 비극은 없다, 흐르지 않는 강, 보헤미안탱고, 굿바이탱고,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 등.
이미 가요 명곡으로 자리매김한 그의 초창기 노래들은 발표 당시만 해도
이전 가요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안다성씨는 이 노래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유감없이 표출해 보였다.
안다성씨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당시 내 월급이 아마도 대통령 월급의 다섯 배는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듬해 국민들의 귀를 온통 라디오에 쏠리게 만든 드라마 '꿈은 사라지고'의 주제가 역시 취입한다.
50년대 말, 이 '꿈은 사라지고'는 '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꿈이 절실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드라마'로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주제가 역시 영화화되면서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최무룡씨에 의해 음반으로 출반되었다.
안다성씨 입장에서는 ‘청실홍실’에 이어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는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 그대로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했고 취입에 대비했다.
"당시는 단 한 번 만에 녹음을 끝내야 했지요.
악단이라든지 가수가 취입 도중 실수라도 하면 가차 없이 처음부터 새로 녹음해야 했기에
모든 경비가 이중으로 든다는 것이 당시 여건에서 가장 큰 난제였습니다.
실제로 가수가 취입 도중 몇 번씩 가사가 틀려 계속 NG를 내자
화가 난 음반사장이 연주인들과 식사를 하러가면서 가수를 안에 가둔 채
아예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던 일화도 있었던 시절이었지요."
때문에 안다성씨는 취입할 때 감정에 몰입하다보면 1,2,3절 가사가 혼동되어 실수할까봐
가사를 각각의 다른 색깔로 구분했다.
이를테면 1절은 검정, 2절은 빨강, 3절은 파랑 등으로 가사를 악보에 적어 마이크 앞에 섰을 정도다.
때문에 그로 인해 녹음이 중단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성기 때 그의 별명이 '탱고의 왕'이었듯
그에 걸맞게 무려 20여곡이 넘는 탱고 곡을 발표했다.
보헤미안 탱고, 뒷골목 탱고, 나의 탱고, 이별의 탱고 등...
'에레나가 된 순이' 역시 탱고리듬의 곡. 이 노래는 본래 가수 한정무씨가 취입했으나,
한씨가 교통사고로 타계하자 안다성씨가 재 취입해
60년대 말부터 '극장식 술집'에서 십년 넘게 불러 유행시킨 노래이기도 하다.
2005년, 그는 50여 년 만에 꿈을 이룬다.
그의 데뷔 초기 취입곡 '청실홍실'과 '꿈은 사라지고'를 비로소 자신의 육성으로 음반을 출반한 것.
우리 가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지금의 한국가요, 즉 'K-Pop'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작곡가 손석우 선생의 음악생활을 기념하는
'손석우 노래 55년' 음반에 이 노래가 비로소 수록된 것이다.
이 노래를 첫 취입한지 무려 50년 만이다.
그는 분위기 있는 노래 위주로 활동했던 만큼 다른 한편으론 분위기를 띄우는,
일종의 신나는 템포의 곡은 거의 없다.
심지어 지나치게 서정적인 노래로 인해 곤혹을 치른 적도 있을 정도다.
전성기였던 50년대 말, 경남 사천비행장 항공대원들을 위한 공연에서
그는 대표곡인 '바닷가에서'를 부르는 도중 갑자기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를 받았다.
말하자면 신나고 빠른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문의 야유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앙코르가 나오고 또 다른 한 쪽에선 야유가 계속되면서
급기야는 객석을 가득 메운 장병들이 두 패로 나뉘어져 싸움이 났다.
야유가 나오면 무대 뒤로 들어가고 앙코르가 요청되면 다시 나오고...
두세 번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지금은 웃으며 회고하지만 당시 가수 입장에서는 식은 땀나는 노릇이었을 터.
"얼추 잡아도 그동안 5백여 곡은 족히 불렀던 거 같은데 말이지,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무대에서 내 노래를 부르는 후배들을 보질 못했어요.
그만큼 내 노래가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 안 그런가?"
-그가 내게서 동의를 끌어내려는 듯, 계면쩍게 웃어보였다.
글ㅣ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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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사천비행장 공연을 마치고. 앞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가수 안다성씨.
첫댓글 그렇지요~ 60년대 말 70년대에는 무교동에 즐비하게 극장식 술집들이 있어서 그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가수들이 많았었죠. 하룻밤에도 여러집을 돌며 밤무대에 노래를 부르곤했지요.
가수 이은하가 아주 어린 나이에 "엠파이어"라는 술집에 나와서 '최진사댁 세째딸'을 부르는 것을 보았어요..
안다성씨의 노래는 '사랑이 메아리칠때' '바닷가에서'등이 생각납니다.
근 60년 간 음색과 창법에 큰 차이를 못느낄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한 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변하지 않는 것에 때로는 감동이...^^
바닷가에서의 노래 자주 들어 보았던것 같습니다. 당시 서정적인 노래를 많이 불렀던 분으로 기억이 나는군요
실제 성격도 노래를 닮아 서정적인 분인 듯합니다.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