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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입법의회와 국민공회(6)
6. 산악파의 혁명 이념
왼쪽의 에베르파와 오른쪽의 당통파를 없앤 로베스피에르는 이제 양쪽에서 오는 반대에서 모두 해방되었다. 국민공회도 이제는 시끄럽지 않고 공안위원회와 치안 위원회의 제안에 고분고분 동의하고 중대한 명령도 토론없이 가결해 주었다. 정부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내각에 해당하는 임시 행정위원회가 폐지되고 12인의 집행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이 위원들은 공안위원회의 추천에 의하여 국민공회가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12인 위원회는 엄격히 공안위원회에 종속되었다. 국민공회이ㅔ는 21개의 위원회가 있었으나 실제로 정치권력을 행사한 것은 공안위원회와 치안 위원회 둘뿐이었다. 공안위원회의 위원은 그것이 당초 발족한 1793년 4월에는 아홉 명이었으나 그후 18명으로까지 늘었다. 11명으로 줄었다. 이 11명의 손아귀에 혁명정부의 독재권이 완전히 집중되었다. 치안 위원회는 경찰 업무와 혁명재판소를 지휘했는데, 이것 역시 공안위원회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방에 파견되어 있었던 파견 의원들이 소환되고, 그들의 감찰권도 공안위원회에 일원화 되었다. 지방에 설치되어 있었던 혁명재판소와 혁명 위원회를 폐지하고 혁명재판을 일체 파리에서만 행하게 하였다.
6월 10일의 프레리알(Prairial) 22일법은 혁명재판에서 피고의 변호와 예비 신문을 폐지하고, 배심원의 결정은 심증만으로도 충분하게 하고, 혁명의 적에 대한 범위를 한결 더 확대하였다. 프레리알 22일법 제6조는 “애국심을 박해하고 중상하여 프랑스의 적의 계획을 도운 자, 사기를 떨어뜨리고 풍속을 타락케 하고 혁명 원리의 순수성과 에너지를 부패시키려고 한 자,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건 또 어떠한 외관의 그늘 밑에 숨어서건 공화국의 자유와 통일과 안전을 손상시키고 공화국의 굳건한 건설을 방해하려고 한 자“라고 적시함으로써 인민의 적을 낱낱이 열거하고 있다. 프레리알 22일법이 제정되기 이전 45일 사이에 처형된 후 로베스피에르 일파의 독재가 몰락할 때까지 45일 사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자는 1,285명이다. 프레리알 22일법이 얼마나 무서운 독재의 수단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수치이다. 1793년 10월 말 지롱드파 21명이 처형된 훈부터 처형자 수는 꾸준히 늘어났으나 그래도 한 달 평균 60-70명에 머물러 있었는데, 에베르파가 처형되는 1794년 3월에는 그 수효가 121명, 당통파가 처형되는 4월에는 258명, 5월에는 345명, 6월에는 688명으로 급증하였다. 프레리알 22일에 파리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는 7,321명이었고 45일 후에는 약 7,800명이었다.
당통의 몰락 후 재건된 혁명정부는 빨간 모자 밑에 숨어 있는 부정부패 혁명가들을 철저히 숙청하는 한편 적극적인 경제정책에 의해 생산과 상업을 촉진시켰다. 4월 15일 생쥐스트는 연설을 통하여, 혁명정부란 전쟁이나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선으로, 부패에서 성실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혁명정부의 성격을 다시 천명한 후, 혁명정부는 시민을 판권의 남용에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혁명정부의 지배자들은 공화국의 건설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건설한 궁극적인 세ㅣ력이 배고픈 민중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2월 말에서 3월 초에 생쥐스트에 의하여 제정된,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는 방토즈(Ventose)법의 실시를 서두르고 있었다.
동시에 혁명을 신속히 수행하려고 4월 16일 제르미날(Germinal) 27법을 개정하여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치안 위원회를 공안위원회에 종속시켰다. 그 법에 의하여 공안위원회는 음모자를 신문하고 혁명재판에 회부하는 문제에 치안 위원회와 동등한 권한을 획득하고, 모든 공무원에 대한 감독권과 공무원에 관한 보고의 명령권 및 권력 남용의 혐의가 있는 공무원에 대한 신문권을 얻었다. 여기서 공안위원회는 곧 치안본부(Bureau de police generale)를 설치하여 행정 사찰과 치안 업무를 지휘하였다. 책임자는 생쥐스트였고 그가 출장 중에는 쿠통이나 로베스피에르가 대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안위원회의 독재권이 완전히 확립되었던 것이다.
혁명정부의 재건 사업은 문화 면에도 미쳤다. 교육에서는 청년과 군대의 혁명화를 위하여 마르스 사관 학교를 신설하여 농민, 직인, 의용군의 자녀 3,000명을 입교시켜 군사교육과 공민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기에 앞서 국가의 것“이라는 생쥐스트의 사상에 따라 1793년 말 초등교육의 의무제를 세계 최초로 제정하였다. 교원의 봉급을 국고에서 지불하고 교원 양성을 위해 사범학교 설립안을 만들었다. 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의무교육의 실시가 당장 전국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1794년말까지 180군에 실현되었다. 근대국가 통일에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언어이다. 언어의 통일 없이는 국가의 통일이 어렵다. 혁명 프랑스의 통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새 요인은 연방주의인데, 정치적 연방주의에 못지 않게 해로운 것은 언어의 연방주의였다. 프랑스에는 아직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변경 지방이 많았다. 알자스 지방은 독일어, 바스크 지방은 스페인어, 코르시카 섬은 고유의 방언, 니스 지방은 이탈리아어, 브르타뉴 지방은 켈트어, 플랑드르 지방은 플레밍어를 각각 사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어는 자유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모든 지방이 모두 프랑스어를 말해야 한다.“ 이러한 언어 정책은 교육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혁명정부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종교 정책이었다. 혁명력의 일주일은 10일이고 그 끝날은 데카디(decadi)였다. 데카디에는 일주일이 7일로 된 종래의 달력에서처럼 교회에서 예배를 보기로 되어 있었으나 잘 이행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기독교적 교리에서 해방된 자유주의자나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기독교의 교리나 예배 없이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에 대한 신앙은 사회의 기초라는 생각이 아직은 광범한 통념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의 영혼을 보살피고 지도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국가가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정부의 직무 태만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6월 4일 국민공회의장에 선출된 후 ‘최고 존재(Etre Supreme)' 와 ’자연‘에 드리는 예배를 집전하고, 전국의 공화 전당의 정면에 ”프랑스 인민은 최고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인정한다“고 써붙이기ㅔ 하였다. 그리고 7월 14일, 8월 10일, 1월 21일, 5월 31일을 4대 국경일 곧 공화절로 정하였다.
이렇듯 당통파의 숙청 후 혁명정부의 재건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었으나, 혁명 정부의 독재는 대중적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혁명 당국과 상퀴로트의 직접적이고 우애적인 접촉이 없어지고, 공포정치의 관료주의가 곳곳에 침투하여 혁명의 활력소가 메마르고,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 사라져 어용신문만이 메아리 없는 선전의 함성을 높이고,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많은 언론인이 사형에 처해졌다. 공안위원회는 겉으로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혁명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생쥐스트가 <공화국 제도에 대한 단상(Fragments sur les instituions republicaines)>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혁명은 얼어붙어“ 있었다.
전쟁 물자의 징발과 수송에 고통을 받는 농민, 최고 임금제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 특히 군수공장 노동자, 최고가격제로 파산에 직면한 상인, 아시냐의 폭락으로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보는 금리 생활자 등, 이들의 마음속에는 불만과 불평이 깊이 발효하고 있었다. 더구나 방토즈법에 따라 빈민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도록 한 조처가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공포정치에서 이익을 얻은 자는 새 감투를 얻은 공무원과 군수 사업가뿐이었다. 혁명의 앞날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로베스피에르의 반대 세력이 은연중에 형성되어갔다. 이 세력은 주로 에베르파와 당통파의 음모에 가담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애원하면서도 그가 무서웠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려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만일 개인적인 야심이 있었더라면 그들을 규합하여 자기 개인에게 충성하는 인의 장막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치사한 인간들을 경멸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문자 그대로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부정이나 부패와의 타협을 일체 거부하였다. 그는 그 타협이 정치적으로 현실적인 이익을 가져오더라도 원리 원칙에 맞지 않으면 거절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반혁명의 과거를 가진 자들은 로베스피에르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들의 접근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길은 그를 제거하는 길밖에 없었다. 드디어 5월 22일과 23일 로베스피에르와 콜로 데르부아(Jean Marie Collot d'Herbois)의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위에서 언급한 프레리알 22일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방토즈법의 실시를 위하여 6개 집행부를 설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공안위원회와 치안 위원회가 고의로 설치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쿠통은 변호인없이 혁명재판을 할 수 있는 법을 서둘러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앞서의 제르미날 27일법도 그랬지만 이 프레리알 22일법도 치안위원회와 협의하지 않고 공정에 제안하여 전격적으로 가결시켰다. 여기서 공안위원회에 대한 치안 위원회의 불만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졌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치안 위원회는 제르미날 27일법에 의해 권한을 공안위원회에 빼앗겼는데, 이제 또 프레리알 22일법에 의해 그 권한과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공안위원회에 대한 치안 위원회의 불만과 두려움과 불신은 극에 이르렀다. 4월 이래로 두 위원회의 반목과 대립의 씨가 이제는 깊이 뿌리를 내려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다. 두 위원회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로베스피에르파에 대한 반대파의 음모도 한결 더 격화되어 갔다. 이제는 로베스피에르의 생명을 노리는 암살자들의 그림자가 그의 주위에서 암약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7월 3일 이후 공안위원회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공안위원 11명은 모두 성격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공적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여 남의 그림자 밑에서 자기 모습이 희미해지기를 원치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본래 인기가 대단히 높았는데 에베르와 당통의 몰락 이후로는 지나치게 높아졌다. 한편 로베스피에르는 격정적이고 진지한 성격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하여, 동료들의 자존심을 잘 어루만져 주지 못하였다. 특히 에베르나 당통 같은 동지들에게서 배신당하는 일이 자주 있은 후부터는 좀처럼 친구들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옛 친구들에게도 진심을 털어놓지 않고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정히 대하였다. 이러한 대인관계가 오해를 낳아, 그는 매우 타산적인 인간이거나 야심적인 인물로 비쳤다. 그런 오해는 그의 정적들에게 다시 없이 유리한 선전 재료가 되었다.
테르미도르(Thermidor) 4일과 5일에 공안위원회와 치안 위원회의 합동 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 생쥐스트는 ”적의 하수인들만이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라고 선전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군 통수권도, 재정권도 행정권도 쥐고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라고 로베스피에르를 변호하였다. 이에 반대파의 비요바렌은 ”우리는 로베스피에르의 친구들이다. 언제나 함께 걸어오지 않았는가?“라고 답함으로써 두 파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화해를 반가워한 비요 바렌은 국민공회에서 ”악의에 찬 인간들만이 정부 안에 분열과 불화가 있거나 혁명 방침에 변화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고 말하였고, 쿠통도 자코뱅 클럽에서 ”두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국을 위하여 최대의 희생을 각오한 열성적이고 정력적인 사람들로서 그들 사이에 다소 분열이 있었다고 해도 혁명 방침에는 전혀 분열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이제 로베스피에르와 반대파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사라지고 화해가 이루어진 듯하였다. 그러나 두 파가 완전한 화해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치사한 반대파의 불투명한 태도를 너그럽게 용납할 성격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테르미도르 8일일에 국민공회에서 자기를 중상모략하고 음모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중대한 연설을 감행하였다. 이 연설이 그의 마지막 연설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는 자기를 뱃속이 검은 독재자라고 중상모략하는 자들, 단두대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양민을 괴롭히고 공포정치를 격화시키는 자들, 혁명재판을 미워하고 파괴하려는 자들을 모조리 혁명정부의 신용을 추락시켜서 혁명을 실패로 만들려는 반혁명의 사기꾼들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공안위원회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치안 위원회를 사기꾼 집단이라고 비난하고, 또 공안위원회에 대해서도 그들의 전쟁 정책, 외교정책, 재정 정책을 비난하고 숙청을 제의하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공회는 연설문을 인쇄하여 전국 코뮌에 배포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그 실수란, 그가 비난한 의원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비난은 정곡을 찌른 것이고 시의적절한 것인 만큼 그의 비난에 대하여 뭔가 양심이 찔리는 데가 있는 자들은 모두 그의 비난이 자기를 향한 것이라는 위협을 느꼈다. 만일 로베스피에르가 비난의 대상자들 이름을 밝혔더라면 위협을 느낀 자가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반대파의 수를 늘리고 그들의 위기의식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로베스피에르가 무서웠다.
그가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협을 느낀 자들은 온건한 평원파 의원들을 회유하여 다음 날 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칠 계획을 세웠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회의 과반수 획득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선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실수였다.
이튿날 테르미도르 9일, 공회에서 생쥐스트의 연설이 저지되었다. 비요 바렌이 등단하여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파, 당통파, 귀족들, 사기꾼들을 보호하고 애국자들을 박해하고 프레리알 22일법을 혼자 작성한 자로서 한마디로 폭군이다“라고 외치자, ”폭군을 죽여라“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로베스피에르가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탈리앵(Jean-Lambert Tallien)이 단도를 휘두르면서 로베스피에르와 일당을 체포할 것을 제안하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체포가 가결되자 그의 동생 오귀스트 로베스피에르는 형을 따르겠다고 자진 치ㅔ포를 요구했고, 쿠통과 생쥐스트의 체포가 가결되자 르바(Phillipe Le Bas)가 자신도 동행할 명예를 달라고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방청석으로 내려오면서 ”공화국은 망했다, 악당이 이겼다.“고 소리 질렀다. 오후 5시였다.
밤 사이에 파리 코뮌이 봉기하였다. 감금된 로베스피에르를 석방시키고 시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코뮌파의 실수였다. 그들은 시청을 점령할 것이 아니라 공회를 점령했어야 했다. 봉기의 주도권이 석방된 의원들에게 넘겨지기는 했으나, 공회는 석방 의원들의 법률적 보호의 해제를 가결하는 한편 온건한 구의 시민들의 힘을 빌려 반격에 나섰다. 로베스피에르파와 반대파의 싸움은 코뮌과 공회의 싸움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코뮌파에 배신자가 있어 암호가 공화파에게 새나갔다. 한밤중인 2시께 공화파 부대가 코뮌파의 암호와 로베스피에르 만새를 외치면서 시청으로 밀려왔다. 코뮌파는 자기편의 봉기 부대로 알고 방심하고 있다가 일시에 습격을 당하여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날이 밝자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일파 22명이 곧바로 형장으로 끌려가고, 함께 체포된 코뮌파 70명도 그 뒤를 따랐다. 이 사건이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이고, 이 쿠데타를 주동한 자들을 테르미도르파라고 부른다.
최고 임금제에 불만을 품었던 노동자들을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을 최고 임금제와 동일시하여, ”최고 임금제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테르미도르 쿠데타의 진정한 성격을 알지 못했다. 생쥐스트의 공화국의 이상도, 시민 제도도, 방토즈법도 이제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몰랐다.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시민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을 성취하고, 그 독립을 기반으로 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세우려던 평등과 덕의 공화국 프로그램은 산산이 깨졌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의 민주 공화주의를 100년간 후퇴시켰다. 테르미도르파의 지배하에서 뒤늦게 그 쿠데타의 성격을 깨달은 노동자들이 최고 임금제의 부활을 위하여 봉기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자코뱅의 노동정책이 노동자들의 불만의 요인이 되어 로베스피에르 일파의 몰락을 재촉했으나, 그 정책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20에서 24리브르인데 반해 군수공장의 임금은 최고가 16리브르였고 최하가 3리브르였다. 최고 임금제에 묶여 있는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고, 또 전쟁의 확대는 군수공장의 증대를 가져왔으므로 노동자의 불만도 그만큼 광범해졌다. 그러나 혁명을 수행하려면 군수공장의 확대도 불가피했고 최고 임금제도 불가피하였다. 최고 임금제를 폐지하면 생활필수품의 최고가격제도 폐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노동자와 빈민의 이익에 반할 뿐만 아니라 혁명이 여태껏 쌓아올린 경제구조의 전면적인 붕괴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였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혁명의 실패를 바라고 있었을까?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의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고 임금제의 진정한 성격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당장의 물질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그 불만을 혁명정부 자체에 돌리게 되었다. 그것이 곧 혁명의 적에게 이용되었다.
노동자들이 이 사실을 깨닫게 도니 것은 권력이 자신들 적의 수중에 들어간 후였다. 그들은 새삼 로베스피에르 일파의 몰락을 애석하게 생각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테르미도르파도 얼마 안 되어 곧 자신들이 스스로 저지른 반동의 인질이 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엉뚱한 곳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도 로베스피에르의 살해를 후회하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테르미도르 9일로써 막을 내리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나폴레옹의 제정과 부르봉 왕가의 복위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러나 국민공회가 로베스피에르의 엄격한 권위에 따라 1793-1794년에 세운 자코뱅적 전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국민공회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적과 잘 싸웠고, 국내의 반혁명을 철저히 분쇄했으며, 새로운 민주사회의 건설을 위한 창조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다. 산악파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철저한 민주적 공화국의 건설을 명확히 자각하여 중대한 3대 목표를 내세웠는데, 그 3대 목표란 조국의 방위와 혁명의 수호와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
이 목표들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산악파가 정권을 담당한 시기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연합하여 인권의 나라 프랑스의 국토와 국민공회가 세운 공화제도를 위협한 시기였다. 프랑스라는 요새는 사방에 포위되고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산악파의 정권은 1년 미만에 적군을 물리쳤다. 공화국 프랑스가 유럽의 모든 인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주려던 꿈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으나 제 힘으로 제 나라를 훌륭히 구출할 수는 있었다. 자코뱅파는 무엇보다도 먼저 애국자였다. 그들에게 민족자결의 권리란, 제 손으로 세운 고오하국을 제 힘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1870년 독일의 침략을 받고 강베타(Leon Michel Gambetta)가 철저한 항전을 외치면서 프랑스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일어키려 했을 때 그가 믿었던 것은 바로 이 자코뱅의 애국적 전통이었다. 조국 방위라는 자코뱅적 전통은 그 후에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자코뱅파는 조국 방위의 어려운 일을 수행하면서 국내의 완강한 반혁명 세력을 타도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의 원리에 거역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자유의 수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혁명이 자유의 가면을 쓴 적의 음모에 희생당하려 했을 때, 혁명정부는 공화주의와 자유를 구출하기 위하여 자유가 수립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자코뱅의 독재정치는 일시적, 잠정적인 것이었다. 자유를 구하기 위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과제이다. 자유의 억압을 정당화할 만큼 자유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국민공회와 자코뱅의 전통은 그 기준을 대외 전쟁이라는 명백한 사실에서 찾았는데, 1917-1918년 클레망소(Georges Clemnceau)가 펼친 자유 억압 정책의 기준도 바로 대외 전쟁이었다. 이처럼 자코뱅의 전통이 남긴 독재의 특성은 자유의 일시적인 억압이라는 정당성의 기준이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는 사실이다.
자코뱅파가 자기 파의 인기와 생명을 걸고서라도 자유를 억압한 것은 자유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정확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자코뱅의 독재는 그들이 끝까지 자유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잠정적 조처였다. 그 사실을 밝혀주는 것이 방토즈법에 구체화된 사회적 요구였다. 방토즈법은 대담한 토지 재분배에 의하여 아무리 비천한 국민에게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하게 하려고 하였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민이 저마다 소생산자인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자코뱅의 신념이었다. 민주주의의 사회, 경제적 기초를 인식하는 점에서만큼은 자코뱅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자코뱅의 민주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제한한 독립적인 시민들의 토대 위에 자유를 수립하려는 것으로서,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이었으나 재산의 평등 따위의 비현실주의로 달리지는 않았다. 다만 재산의 격차가 민주주의 건설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소유의 극단적인 불균형이나 무산 시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시민은 정치적으로 시민 구실을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시민이 광범히 존재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할 것은 명백하다. 자코뱅의 평등주의는 소유의 평등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를 세우기 위해 무산 시민을 없애고 소토지 생산자층을 형성하려는 평등주의였다. 이러한 제한적 평등주의의 이상은 자코뱅적 전통에 일관하여 흐르고 있다. 이 전통은 프랑스 사회주의에 깊이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민주주의 이상에도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자코뱅의 세 번째 전통은 참 민주주의 이상이었다.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이며,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자코뱅이 제정한 1793ㅕㄴ 헌법의 제5조는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면 봉기는 인민 전체에게도, 인민 각자에게도 가장 신성하고 불가결한 의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 수호의 최후 수단으로서의 민중 봉기를 국민의 권리로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코뱅의 자유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어느 정도의 것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