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와 나눈 많은 세션을 돌이켜보건대, 연민은 공감,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더불어 영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삶의 가르침이다. 영원한 영혼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연민으로 깨닫기 원한다. 연민인 자신을 깨닫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이미 받은 선물이자 앞으로 줄 선물인 연민의 느낌에 눈뜨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물질계에서 연민을 표현할 때마다 더욱 깊어진다.
사회는 청각 장애를 결점으로 본다. 결점을 가진 존재로 보이는 것은 그런 결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들 – 이른바 ‘모자란’ 존재로 낙인 찍힌 이들 – 에 대해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기회다. 이런 식의 이분법은 비물질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영혼도 모자라지 않다. ‘모자라다’는 개념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물질계에서 이처럼 공허하고 뜻 없는 개념이 마치 무슨 의미라도 지닌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연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다.
페넬로페는 어느 정도의 연민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청각 장애인의 삶을 계획했다. 또 그녀는 듣는 이들의 세계와 듣지 못하는 이들의 세계가, 서로 반대되는 사람들의 무리가, 서로 충돌하는 문화들이 더욱 가깝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침묵의 나라에서 태어난 그녀의 연민은, 그녀가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세상에 커다랗게 울릴 것이다.
여성, 소수인종, 청각 장애인, 이들은 하나 같이 역사적으로 권력에서 배제되어 왔다. 나는 페넬로페의 말을 들으며, 그녀의 내면에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커다란 힘이 있는 반면 그녀가 속한 계층에는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하다는 그 불균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외부적으로 권력을 갖지 못한 환경을 택해 들어감으로써 내적 힘을 키우는 원동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처럼 연민을 경험하기 힘든 환경을 고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자신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연민을 쌓을 기회도 그럴 동기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외부적인 권력에서 배제된 환경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강력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질계에서는 연민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자아가 자기는 다른 이들과 분리된 존재라는 감각을 만들어 낼뿐더러, 때로는 두려움에 굴복되기 때문이다. 비물질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페넬로페의 전생 계획 세션에서는 전생에 페넬로페의 어머니를 죽인 영혼을 향해서 연민이 표현되었다. 분노도 미움도 복수도 없다. 다만 용서와 이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전생에서 페넬로페가 자살한 것에 대해서도 연민이 있을 뿐 그 어떤 판단도 내려지지 않았음을 주목하자. 그녀는 어떤 점에 대해서도 비난받거나 책망받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지난 삶에서 계획했던 배움을 완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자살로 생을 마감하도록 이끈 어려움과 관련해 다른 영혼들은 연민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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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생에서의 전생 계획도 마찬가지다. 페넬로페의 어머니는 지난 생을 계획할 때 장차 남자 친구가 될 영혼이 폭력적으로 행동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몸으로 세상에 와 있는 동안 그에게 자존감을 키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가 비록 여러 차례 환생에서 깊은 분노를 표현했다고 해서, 영혼의 단계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기를 염원한 그녀의 소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 두 영혼은 아마 또 다른 생에서 함께할 것이다. 그 생에서 그에게는 분노를 내려놓고 사랑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삶을 계획한 영혼들을 사랑한다. 이 지구 위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걱정을 안기기도 하고, 심지어 우리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이 땅 위에서는 서로 미움 속에서 살아가는 부부, 학대하고 학대받는 부모와 자식, 죽일 듯이 싸우는 직장 동료일지 모르나, 기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아끼는 사이이며, 때로 전생에서 못다 마친 배움을 끝마치게 해주려고 다시 함께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물질계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영혼이 꼭 몸을 얻어 태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테이시와 세션에서도 보았듯이 몸을 입고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도 페넬로페의 이전 삶들에서 페넬로페를 크게 도와주었다. 비물질계에 있는 영혼들은 우리에게 사랑과 영감을 보내주는 방식으로 도움을 준다. 그들은 꿈으로 우리와 의사소통하고, 깨어 있을 때는 감정을 통해 우리와 접촉한다. 몸을 입은 모습으로 있느냐 아니냐와 늘 우리와 함께 한다. 마음으로 이어진 끈은 영원하다.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이는 사랑과 연민을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사고로 몸을 다치거나, 병을 얻거나, 장애를 가지고 살기로 영혼이 생을 계획하는 것은 – 늘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장애자를 생각해보라 – 사랑을 표현하는 누군가로부터 절대로 달아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영혼들은 과거 삶에서 타인이 주는 따뜻한 보살핌을 잘 못 받아들인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 이러한 배움을 얻을 수밖에 없도록 거의 자발적으로 시련의 삶을 계획한다.
나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명상 속에서 미래의 자기, 즉 미래생에서 환생한 모습을 만났다는 한 청년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미래의 자기가 자기에게 말하기를, 미래의 사람들은 지구에서의 이 시기를 ‘두려움의 시대’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말의 뜻을 곰곰이 되새겨보자.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무한한 수식어 중에서 그들은 ‘두려움’을 골랐다. 두려움은 우리 시대에 만연한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 일상 깊숙이 파고들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수 백번의 전생에서 치유되지 않고 넘어온 두려움이 개인과 집단의 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는 수 밖에 없다. – 어떤 에너지든 저항하면 더욱 강해질 뿐이다. –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쪽을 택해서 나아가야 한다. 삶의 시련은 의식상에서든 무의식상에서든 그러한 두려움을 치유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두려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과 마찬가지로 거짓된 믿음 역시 치유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페넬로페의 어머니를 죽인 영혼은 몸을 얻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 혐오가 당연하다거나 자기가 곧 분노라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 영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우는 쪽으로 미래의 삶을 계획할 것이다. ‘모자란’ 사람이라는 딱지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한테는 더더욱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상태에서 다시금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 역시 ‘반대를 통해 배우는’ 삶, 곧 내면의 자기 혐오를 뚜렷이 직시하는 쪽으로 삶을 계획하고 올 것이다.
페넬로페는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지금도 청각 장애라는 경험을 통해 성장했음을 뚜렷이 느끼며, 자신의 영적 성장에 감사해하고 있다. 감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만약 쇠막대 두 개가 비슷한 진동수로 맞춰져 있다면 둘은 공명할 것이다. 즉 하나로 된 울림을 낼 것이다. 이와 같이 감사는 자신을 신성한 지성(Divine Mind)에 맞추는 것과 같다. 감사는 사랑과 용서, 기쁨, 연민과 더불어 높고 신성한 파동이다. 감사는 고통받는 것을 ‘즐거워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련의 결과가 혹은 시련의 어떤 측면이 고맙게 여길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