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8.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 최상훈 티모테오 주임 신부님 강론 말씀 ♣
오늘은 2026년 딱 반이 된 날입니다.
2026년 시작하시면서 여러분의 계획과 여러분의 삶의 태도가 지금까지 잘 이어오고 계신지 아니면 흐트러지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그러지는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2026년 아직도 반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롭게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내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첫 일성부터 우리를 좀 주눅들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제 속마음은 안 본 걸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두 번째,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세 번째,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오늘 복음은 부담스럽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안 본 걸로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요.
교우님들 이 말을 고지곧대로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면 우리는 큰 오류를 범하는 거라고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최우선에 두라는,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도 간직하고 싶어 내가 그렇게 원하는 것 그게 자식이건 뭐건 간에 그것에 집착이 되어서 자유를 빼앗기지 말라는 뜻이겠죠.
내가 그렇게도 집착하는 것에 족쇄가 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신원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으뜸 제자 베드로마저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예고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안 됩니다. 주님” “맙소사 주님”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반응은 예수님답지 않습니다. 아주 싸늘하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길 안에 포함된 십자가를 지기에는 너무도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져라 라는 말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할 수 있는지 정답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십자가를 져라는 말이 있는데 세상은 현대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를 살고있는 우리 시대는 십자가의 포화 상태입니다. 어디를 가도 십자가가 보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서울에 왔다가 그 느낌을 이렇게 신문 기사를 쓴 내용이 있습니다.
자기는 한국의 조선호텔에 묵었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커튼을 열었더니 서울 시내가 온통 빨간 십자가로 뒤덮였다는 겁니다.
온통 십자가 빨간 십자가 온통 뒤덮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대한민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날카롭게 한국 사회를 짚은 내용이 보도가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십자가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당에 오면 이렇게 대형 십자가가 걸려 있고요. 여러분 집에 가면 거실에 각 방마다 아이들이 잘못될까 봐 혹시라도 아이들의 책상 위에도 탁상 십자가를 비치해 놓습니다.
게다가 내 차 안에 내 몸에 지닌 수많은 악세사리 십자가 지금 잠깐 보실래요?
내가 지닌고 있는 십자가가 몇 개 있나요? 내 주머니에는 묵주에 있는 십자가, 내 목걸이 십자가, 내 반지 묵주에 그려져 있는 이 십자가 온통 십자가로 우리는 도배가 되어 있겠죠.
그런데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인 그 십자가의 의미를 오늘 예수님은 묻고 있는 겁니다.
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라고 우리는 고민하는 오늘이라는 것이죠.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는 성당에 들어와서 아니면 여러분의 방에서 십자가를 걸어놓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염원합니다.
그리고 손을 모으고 기도합니다. 뭐를요? 건강과 재물, 자녀들의 편안함, 우리 식구는 병들지 않은 것 따위를 추구합니다.
인간의 본성상 아마도 고난과 병고를 청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픔을 청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바람과 욕구는 다른 신 앞에서도 가능합니다.
우리 어릴 때 집 앞에 큰 나무가 있었어요. 느티나무가 있었어요.
그 느티나무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새끼줄을 둘러메고 그 앞에서 이렇게 염원했어요.
건강을 주시고 병고를 없애주시고, 우리 애들 취직 잘되게 해주시고, 우리 애들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그 나무 앞에서도 빌었어요. 나무 앞에서 빌었어요.
도대체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아니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다른 신의 신앙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기꺼이 짐으로써 십자가를 향하여 바로 서 있음으로 인해서 고난을 넘어서는 것, 희망을 찾는 것 이게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의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명한 신학자 한 명이 있습니다. 나중에 책을 읽으실 때 이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베리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베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짓 종교와 참 종교를 구분하는 차이는 이것이다. 들어보십시오.
거짓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어라. 그러면 더 두려운 일이 너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참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리의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두려워하는 일이 너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진실을 대면하여 십자가를 져라.
제가 신부로서 젊었을 때 통일교 세미나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한 종교를 비하하고 나쁘게 말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게 아니라 오늘 복음 말씀을 설명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에 대한 연구 과제를 한 탁명환 목사님께서 강의하시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통일교는 일본에서 그 어마어마한 재원, 돈을 벌어들이는 종교입니다. 신기하죠. 일본에서.
방법은 이겁니다.
어느 회사나 어느 마을이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통일교 신자가 갑니다.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을 찍습니다. 그리고 위아래로 훑어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던집니다. 아이고 액운이 꼈어요.
당신 가족 중에 큰일이 날 조짐이 있어 라는 말을 던지고 그냥 갑니다.
이 사람은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쁩니다. 불안합니다. 두려움이 점점 커져옵니다. 그날 밤 잠을 못 자고 꼬박 셉니다.
그다음 날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음을 굳힙니다.
너에게 닥쳐온 그 엄청난 일들을 없애주겠다 그것은 이거다 하고 조형물을 보여줍니다.
그 조형물은요. 제가 봤는데 얼핏 보면 다보탑처럼 생기기도 했고요.
엄청난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고 그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사가지고 옵니다.
너의 우환과 너의 문제와 네가 겪는 그 십자가의 어려움을 없애주겠다고 말한 겁니다.
그래서 통일교가 된 거예요. 물론 교리를 설명하기에는 오늘 시간이 짧습니다.
그 통일교가 그러니까 거짓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어려움과 난관과 결정적으로 십자가를 없애주겠다 는 생각이고 논리입니다.
우리 교회는 말합니다.
진실을 대면하는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대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이겠죠.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싫어요. 저에게 그게 안 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대면하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 「대지」라는 작품을 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노벨상을 받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겁니다. 「대지」 누굽니까? 펄벅입니다. 펄벅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펄벅에게 자폐 아이가 있었습니다.
자폐란 자신을 자신에게 감춰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대인관계가 어렵습니다.
펄벅은 자기같은 이 위대한 여인이 이렇게 똑똑한 여인이 정신 발달 장애가 있는 딸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자기 딸이 지금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병원 투어를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모든 병원을 그 아이를 데리고 옮겨 다니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나 같은 여자한테서 네가 나올 수 있어 라는 생각이겠죠.
어떤 의사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장밋빛 희망만을 얘기해 주었겠죠.
점점 더 그 여자는 더 다른 곳으로 더 많은 곳으로 병원 투어를 다녔습니다.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한 의사를 만납니다. 그는 정확하게 펄벅의 눈을 바라보고 잠깐 제 진료실로 오십시오 하고 데리고 들어갑니다.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보면서 잔인한 진실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요. 사모님 잘 들으세요. 아이는 절대 정상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한 평생 자폐하며 살 겁니다. 펄벅 여사님 스스로 자기 스스로를 속이시면 안 됩니다.
그 의사는 그녀의 희망을 산산히 조각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요.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진료실에서 그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을 내 평생 감사해야 될 순간으로 느꼈다.
진실을 즉시하라는 말에 그 즉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고통 속에는 선물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없지만 내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지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폐아와 그 가정을 위한 강연에 나섭니다.
미국 전국을 돌면서 자폐아를 가진 가정에 대해서 그 가족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단체를 만들었고요. 지금도 있습니다. 미국의 최고의 자폐 연구 기관을 만들어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죠.
그런데요. 계속 행복한 거, 항상 기쁜 거 이런 삶이 가능하고 존재할까요?
계속 행복한 거 그리고 항상 기쁜 것 우리는 그렇게 살다가 조그마한 십자가의 걸림돌에 넘어지면은 분노하고 욕지거리하고 남을 비난하고 하는 데 혹시 열중하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고난과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무엇인가요?
계속 행복하기 위해서 항상 기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분 세례 받으셨습니까?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의학적으로요 계속 행복하고 계속 기쁜 것 이건 병입니다.
큰 병입니다. 심리학 용어로 경조증, 조울증, 우울증 한순간에 우울하다가 한순간에 좋아지고 우리 가끔씩 그런 친구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웃고 다녀요. 하루 종일 떠 있어요. 하루 종일 좋아요.
이렇게 사이클이 이만큼 떠 있어요. 그게 행복한 걸까요?
도대체 우리는 신앙 안에서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십자가를 제거 하는데 열중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겁니다.
말씀드리지만 저도 싫어요 십자가가 아까 말했지 않습니까?
너희에게 십자가가 올 거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걸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이게 그리스도교의 진리예요.
우리는 문제가 생긴거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시는 나의 주님이 내 주님이 그분과 그 길을 함께 가게 될 것이라는 것 교우님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우리는 모두 산꼭대기에서 살고 싶어 해요. 산꼭대기에 그 멋진 별장을 짓고 그 많은 동네 그 힘들게 사는 동네 그 어려운 동네를 내려다보면서 “이야! 행복하다” 가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은 그 산을 올라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힘들지만 땀이 나지만 그 산을 올라갈 때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속속들이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 단순한 진리. 십자가를 지고...
사제는요. 예수님 돌아가신 날이 성 금요일인데요.
사제는 가려진 십자가를 조금씩 벗기면서 노래합니다.
“보라 십자가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라고 노래합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러분이 지닌 십자가 지금 몇 개입니까? 도대체 몇 개예요? 내 몸에, 지금.
그 십자가를 지닌 의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 때문에 짊어지는 책임입니다. 이 복음의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복음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교황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교황님을 위해서 함께 이 미사 중에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멘.
** 주임신부님의 강론 말씀과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을 수 있습니다. 양지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