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의 강을 건너 만나는 남정국 시인
故 남정국 시인이 타계 46년 만에 유고시집 《불을 느낀다》가 발간되었다. 그의 불같은 짧은 생애에 남겨진 시편은 작지만 고귀한 남정국 시인의 발자취를 기억하고자 시인의 대표시와 이재욱 ‘문학뉴스’ 대표, 노혜경 시인의 기억 담을 싣는다.
남정국 시인(1958년~1978년)
-1958년 부산출생
-1978년 2월 부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여의도고등학교 졸업
-1978년 3월 고려대학교 인문학부 입학
-1978년 11월 4일 경기도 북한강에서 타계
-부산 전원문학회, 고대문학회 등에서 활동
--------------------------------------------------------------------------------------------------
대표시|남정국
흑선풍 이귀 외 4편
일진광풍 대작할 제
흑선풍 이귀의 쌍토끼가 춤추나니
피를 찾아 울부짖나니
내 목숨에 가득한 피야
마를 새 없이 흘러 흘러서
이제는 정직하고 싶구나.
남색하는 놈의 야릇한 웃음 같은
나의 하루 세 끼가 부끄러워서
이 낮도깨비 같은 봄에 도끼날을 사모한다
목을 쳐다오
거짓 없는 진흥빛을 콸콸 쏟으며 죽게 해다오
허기와 가설이 질펀한 이곳에서
그만 돌아가게 해다오, 흑선풍아.
(1978년 4월)
---------------------------------
어떤 풍경
시든 꽃, 버려진 자, 버림받은 자들이
희망처럼 나부끼는 모든 종류의 수사법을
불태우고, 저희도 또한 타면서
이제는 저희도 타면서 황천길로 떠나가누나.
변변찮은 식사와 겹친 피로
해진 의복, 덜 익은 한 잔 술
이웃에게 권할 것 없는 살림살이를
억울해 하며
황혼의 들녘, 그 언덕받이를
막 숨 거두는 투우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버티어 선
내 이웃, 내 형제, 나의 사내여
우리는 다 같이 황천길의 동행.
이 세상 시든 꽃
버려진 자, 버려진 자들이
그네들의 수족과 짐을 묶어서
떠나는 마차 행렬
그런 풍경을 보았다
마음이 언짢았다.
(1978년 5월)
---------------------------------
밤
밤은 어디에서나
눈을 치뜨고 나를 감시한다
10년된 류마치스처럼
끈덕지게 날 쫒아와서는
꼭 내가 죽어버리겠다고 결심을 할 때쯤이면
능청을 떨며 잠시 몸을 숨긴다
간악하고 잔인한 놈, 살쾡이 같은 놈
나를 죽여라. 이젠 죽야다오.
빌어먹을 새끼야 날 죽여다오
시대에도 밤이 있고
나 같은 별볼일 없는 놈에게도
밤은 더욱 지긋지긋하게 있다
이것이 사실이다. 나의 소식이다. 안부다
류마치스 같은 밤
너의 온몸에 배를 깔고는 회충처럼
엎디어서 진액을 빨아먹는 밤. 밤.
(1978년 5월)
-----------------------------------------
돌아오라 쏘렌토로에 부친 하나님의 말씀
아들아 내 아들아
돌아오너라 쏘렌토로
너의 면전에 북적대는 아픔들을
어찌하여 내가 모를까
여기의 동산은
향기로운 꽃이 만발하엿으니
너의 곤한 목숨이 쉬일 곳이로다.
흑암이여
내 아들의 사지를 처매는
장막 같은 흑암이여
나는 태양의 아버지, 아들의 아버지니라
가문 날씨에 비를 보내듯
여기에 내가 빛을 내리나니
수고하고 짐 진 아들아
돌아오너라
쏘렌토로, 돌아오라 쏘렌토로, 돌아오라.
(1978년 4월)
--------------------------------------------
죽음이 오네요
참말로 죽을 것을 알면서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줄을 알면서
그러면서 나는 사랑도 해보았네.
죽음이 거꾸로 서서 내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눈 앞에 선한 이즈음에도
나는 사흘 내리 먹고 자기만 하면서
시원한 고함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래요
죽음이 오네요
질긴 그물을 손에 쥐고
완강한 걸음으로 신작로를 걸어오네요.
그리하여 아무도 모르는 채
또 한 사람이 사라져갈
저 익숙한
정경.
(197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