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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의 옛 요사채. 백양사는 90년대 들어 불사가 시작되면서 대웅전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심산이 요양 차 머물렀던 장소로 추정되는 요사채 등이 모두 뜯겨 아쉬움을 주고 있다. | ||
함월산에 있는 백양사는 문수사, 동축사와 함께 울산을 대표하는 신라고찰이다. 이 사찰은 신라 경순왕 6년(932)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함월산에 사찰을 짓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종을 달면 나라가 평안해 질 것이라는 얘기가 민간인들 사이에 나돌아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과는 달리 신라는 백양사가 세워진 3년 후 망했는데 이 때문인지 백양사는 그동안 종소리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요즘도 울산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많은 신도들이 모여든다.
그런데 이 사찰을 찾는 신도들 중 일제강점기 영남을 대표하는 유림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백양사에 요양 차 와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1879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던 심산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가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처벌할 것을 성토했고 나라를 구하는 길이 교육에 있다고 보고 1909년에는 사립학교인 성명(星明)학교를 설립해 신지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영남 대표 유림
1924년 독립운동기지 건설 위해
군자금 확보하려 울산 등 방문
언양서 다쳤을때 손후익이 도와
함께 독립운동·사돈지간 발전
심산이 울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때였다. 3·1운동 후 전국 유림을 규합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프랑스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던 심산이 국내로 돌아온 것은 1924년이다. 이 때 그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군자금 20만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상해에서 국내로 온 그는 울산을 비롯해 경주·양산·청도·밀양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고 또 서신을 보내어 군자금 지원을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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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성균관대 총장 시절 심산의 모습. |
심산이 울산으로 온 것은 1925년 12월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진주와 밀양으로 사람을 보내어 군자금을 모금했지만 목표액을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직접 군자금을 모금키로 하고 양산에서 언양을 거쳐 울산으로 왔다. 그런데 울산으로 오던 중 언양에서 차가 굴러 중상을 입게 되었다. 이때 심산이 찾은 사람이 입암에 있는 손후익이었다.
손후익은 이런 인연으로 심산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펼쳐 울산이 자랑하는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나중에 둘은 사돈지간으로 발전한다.
당시 심산이 간호를 받았던 후익의 집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입암에 있다. 후익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외아들인 석원은 박정희 대통령 때 민원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군자금을 갖고 상해로 갔던 심산이 다시 울산으로 온 것은 대구에서 오랫동안 형을 산 후 요양을 위해서였다.
심산이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중국으로 들어간 것을 안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장남 환기를 고문해 죽이고 친지와 밀정까지 동원해 그가 조선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으나 심산이 그들의 권유를 받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왜경은 그를 중국에서 체포한 후 국내로 압송해 재판에 넘겼다. 그는 재판에서 14년의 징역형을 받았는데 재판을 받는 동안 심한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었다.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들 중 가장 높은 형이 3년인 것을 생각하면 14년 형은 가혹한 것이었다.
그가 재판과정에서 얼마나 고문을 받았나 하는 것은 그의 시에서도 알 수 있다.
籌謀光復十年間
性命身家摠不關
磊落平生如白日
何須刑訊苦多端
조국광복을 도모한지 10년/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한 내 평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럽게 할 필요가 무엇이뇨
그는 이런 악형에도 불구하고 옥살이를 하는 동안 조선 선비의 지조를 지켰다. 예로 1933년 새로 온 간수가 그에게 절하기를 강요했지만 일본 간수에게는 죽어도 절을 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또 어느 날 간수가 최남선이 지은 <일선융화론>을 가져와 읽은 후 감상문을 쓸 것을 지시했다. 이 책은 일본과 조선민족의 근본이 같은 혈통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을 본 심산은 최남선을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인 동시에 미친개라면서 책을 그 자리에서 간수 앞에 던졌다.
옥중 생활 7년째가 되는 1934년 일제는 심산의 건강이 나빠져 옥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행 집행 정지로 석방시켰다. 석방 후 신병치료를 위해 잠시 가족들이 머물렀던 성주로 갔던 그는 1936년 3월 요양 차 울산의 백양사로 왔다.
그가 울산으로 온 것은 사돈인 손후익과 이재락이 울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산으로 보면 손후익으로부터는 며느리를 얻었고 이재락으로부터는 사위를 얻어 울산에 두 명의 사돈을 두었다.
백양사 생활 역시 왜경의 감시 속에 있었지만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독립운동을 하면서 심신의 수양을 위해 많은 시를 썼다. 그가 백양사 생활을 할 때는 손후익의 딸로 그의 며느리가 된 응교가 수발을 했다.
응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 있다.
“내가 시집 올 때 17살이었는데 시아버지는 내가 20살이 넘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내가 백양사에서 하는 일은 주로 시아버지가 독립군들에게 전하는 문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백양사에 계실 때 나에게 이것은 누구한테 전해라, 또 저것은 누구한테 전해라면서 그동안 써 놓은 사찰을 주곤 했다.
시아버지가 백양사에 계시는 동안 독립운동원들 중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거지로 변장해 찾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거지들은 절에 오면 밥을 달라고 했는데 독립요원들은 꼭 밥을 ‘두 숟갈 주세요, 세 숟갈 주세요’하면서 숟가락 숫자를 얘기했는데 이것이 암호였던 셈이었다. 이 후 나는 시아버지를 돕기 위해 중국 심양까지 가기도 했다.”
심산이 회갑을 맞이한 것도 백양사에서 요양을 할 때였다. 1939년 7월 회갑이 되자 친지들은 술과 과일을 갖고 와 회갑 잔치를 열자고 졸랐다.
가족들에게 일찍부터 회갑 준비를 못하도록 했던 심산은 “나라 없는 백성이 회갑이 무엇이냐”면서 이들을 나무랐다. 당시 그가 회갑을 맞아 남긴 “내 어찌 차마 말하랴”라는 시가 있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옥살이에
아들 죽고 앉은뱅이까지 됐지만
백절불굴의 선비정신 지켜
1936년 요양차 울산 백양사 찾아
시 쓰며 꾸준히 독립운동
‘내 어찌 차마 말하랴/옛 우리 삼한 나라/눈물이 뿌려 질세/간담도 떨리어라/묻노니 2천만 동포여/무슨 낯이 있기에/좋은 강산이라 즐겨 노는가.//
눈을 들어 바라보라/거센 파도 몰아쳐/하늘에 맞닿은 것을/구멍 난 배에 실려/울부짖는 소리/한창인데.//
어기여차 배 젖는 일/사공에게만 맡기련만/ 두렵구나 삿대 잡은 자들/남의 손에 넘겨 줄 가를.’
심산의 시에는 꿋꿋한 선비 정신과 단심의 애국 혼이 들어 있는데, 우리는 이 시 속에서 나라를 빼앗긴 심산의 울분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한 평생 동요하지 않고 백절불굴의 선비정신을 지키다가 해방 후 성균관 대 총장을 지낸 후 62년 세상을 떠났다.
심산이 머물렀던 백양사는 그 동안 많이 변했다. 특히 90년대부터 함월산 전체가 개발되면서 사찰 주위의 자연경관이 많이 훼손되었다. 변화는 사찰에서도 볼 수 있다. 백양사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불사가 시작되면서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이런 변화에 대해 사찰측은 ‘불자들이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통해 정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에 앞장섰던 심산의 흔적마저 사라진 것은 아쉬움이다.
울산보훈지청은 최근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해 과거 선열들이 독립운동을 벌였던 장소를 찾아내어 학습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심산은 백양사에서 요양을 하면서도 왜경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평생 270수의 시를 남겼는데 이중 100수를 백양사에서 썼다.
이렇게 보면 일제강점기 심산이 독립운동을 펼쳤던 백양사는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줄 수 있는 좋은 학습 현장인데도 울산보훈처가 이를 알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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