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당을 정예화 하는 데 그 많은 살집을 어찌 할꼬
군당 연락부 지도원 주승도 동지는 군당 ‘트’ 하고는 제2선을 통해 겨우 선을 회복하고 상부 조직과 조직 선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선은 당시 김종원의 백골대의 정보대(주1)에 의하여 단장면과 산내면의 면당과는 단절되고 있는데, 그 회복은 거의 불가능한 상대라고 했다. 일단 부북, 무안, 청도, 밀양읍의 읍•면당을 장악하고 있는 부북면 면당과 하남, 초동, 상남, 삼랑진읍의 읍•면당을 장악하고 있는 하남면 면당의 상황 그리고 지도원 동지가 직접으로 장악하고 있는 산외면과 상동면의 면당을 파악하고 조직을 확보할 방도를 결정하여, 조직을 재정비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1947년 「미•소공위」 재개 이후 당원 배가, 5배가, 10배가라고 하면서 막대한 무의식대중을 끌어들여 비대해진 당을 이제는 그 대중을 내던지고 정예화해야 한다고 하니 이들 당원대중을 어찌해야 할는지 감당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당시 한 소년 연락원에 불과한 나로서는 당을 정예화•전투화 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될 수는 있지만 그 핵심을 꾸리는 문제에 대한 인식과 방도는 없었고, 다만 당이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무의식 대중을 끌어안고 있는 당 조직이 살인적 탄압을 맞아 살아남을 수 있는 당 조직으로 정리•정예화하려면 당 내의 무의식 대중을 당의 지도하에 있는 대중조직이 흡수하여 강력한 당의 후방부대로 꾸려야 하겠는데 이 대중조직을 담당할 당의 조직책이 변절하여 당 산하 대중조직이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고, 이를 통하여 당의 핵심에까지 탄압의 침투될 우려가 생기고 있었다. 그야 말로 앞길이 캄캄한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단 군당 산하의 읍•면당의 현황을 파악하고, 그 다음에 제기되는 문제를 찾고 그 해결 방도를 시급히 찾아 산하 읍•면당을 지도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나에게 제기되는 과업은, 먼저 ‘현황파악을 하라’는 과제를 전달하는 일과, 파악해서 정리한 현황을 조속히 군당에 제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군당과 그 상부조직에서 문제해결의 방도를 결정한 조직지도방안을 산하 읍•면당 조직에 전달하는 일이다. 이것이 연락부의 레포가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를 위하여 세 번의 레포활동을 해야 하는 일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것도 잡히면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다가 종내 생매장을 당해 세상에 살았던 흔적조차 없애는 위험을 안고서 말이다. 그리고 산외면의 면사무소와 경찰지서의 소재지 동내인 다원에 있는 군당 연락부의 ‘트’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인지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 8.15해방 이후 우익조직이 발붙이지 못하고 있는 내내 민주부락이지만, 그러나 내내 마음은 불안했던 것이다. 그해 1948년의 초겨울은 일찍부터 추위가 몰아쳤다. 그해 1월 말에 밀양에 올 때 이모가 형의 교복과 내복 그리고 외투까지 방한용 장갑과 양말 일체를 장만해주신 덕으로 겨울을 지내기는 어렵지 않으나 숨어사는 신분이 동내 집의 작은머슴이라 함부로 학생복을 입고 다닐 수도 없고 내복도 밖에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지도원 동지의 알뜰한 보살핌으로 솜을 두텁게 놓은 바지저고리에 안에다 토끼털을 댄 조끼는 정말 따뜻했다. 도곡에서 다원으로 오고부터는 한쪽 어깨에 메고 다니던 망태가 아닌, 장날 등짐장수가 메고 다니는 멜빵을 단 등짐자루에다 두터운 털실목도리까지 갖추어서 얼음구더기에서도, 맞바람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을 만큼 차비를 차려주었다. 이러고도 지도원 동지는 늘 나를 바라보면서 말씀하시는 말은 60년이나 먼 세월의 그늘 속에서도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했다. “덕출이 동무, 동무를 보고 있으면 한참 공부하고 집안 어른들에게 고임 받을 나이 어린 소년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집에 가도록 하고 싶지만...... 일을 내 맘대로 할 수도 없거니와 동무도 받아들이지도 않겠지만...... 정말 가슴이 답답 하구만.” 이런 말씀을 한두 번도 아니게 들었다. ‘이 고생 그만하고 집으로 가라.’는 듯이.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대답했다. “지도원 동지, 지난 봄, 2.7투쟁 때 함께 투쟁했던 동무들이 모두 투쟁대열에 여기저기 들어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맹세한 일도 있고, 비록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만 조직적으로는 일심동체인데 목숨이 붙어있으면 바로 한 몸으로 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몸으로 된 제가 이탈하면 몸이 찢어지는 것인데 맹세한 그 동무는 어쩌라고 나만 투쟁의 대열을 떠나겠습니까! 지도원 동지 그런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다.” 라고 하자, 지도원 동지는 내 손을 잡으면서, “덕출이 동무, 동무 같은 동지가 있어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 힘냅시다.” 하시곤 손을 힘차게 흔드시었다.
「5·10단선」을 앞두고 인민들을 투표장으로 몰고 가기 위하여 경찰의 협조기관의 성격을 띠고 조직되었던 「향보단」이 우익테러의 하수인들의 주동으로 활동하고 이를 경찰이 지원하고 있었는데, 민간 유지들에게 기부금을 배당하여 강요하는 등 행패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거 직후 5월 25일에 해산되었지만, 바로 그 다음 달에 더 규모를 크게 하여 이름을 바꾸어 「민보단」(民保團)이라 하고 등장했다. 경찰은 이를 그들의 보조단체로 하여 경찰이 직접으로 민폐를 끼치지 않고 이 민보단을 통해서 경찰 후생비 등 기부금을 강요하고, 심지어 협조하지 않는다면서 테러를 하고, 이러한 불법을 취재하는 기자를 폭행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저이들이 한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자위와 테러방지를 내걸고, 불순분자침입방지 등을 명목으로 내걸어 그 경비를 내라고 인민들에게 할당하는 고지서까지 발부하는 불법도 일삼아 하고 있었다.(주2)(주3)
12월 10일 쯤 되어 나는 첫 번째 과업으로 삽개에 있는 부북면당의 연락‘트’와 하남면당의 파서막 정미소의 연락‘트’를 찾아가기로 했다. 미농지에 쓴 문건 2장을 미농지 봉투에 넣어서 조끼 안의 토끼털 안쪽에 붙여서 바늘로 꿰맸다. 이번 행정은 갈 때는 몸에 문건을 지녔기에 걸어서 가기로 하고 올 때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는 파서막에서 8시쯤에 타고 밀양읍에서 내리는데 장날을 택하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러고 보니 간 날이 12월 6일인 것 같다. 밀양장날은 2일7일장이다. 그래서 돌아오는 날이 7일이었다. 긴늪 다리를 건네줄 덕실아재와 함께 밤이 어둡기를 기다려 밤 8시쯤 출발했다. 이미 이때쯤에는 긴늪철교에는 「민보단」이 죽창을 가지고 지키고 있고 또 감내 공굴 다리도 「민보단」이 서 있었다. 마침 날씨가 추웠다. 그래서 추위를 피해서 다리 곁에 서까래나무 네데 개를 얽어 짚 이엉을 둘러친 움막 안에 들어가 있어서 경비가 그리 엄하지는 않았다. 긴늪 다리는 덕실 아재가 데리고 가서 그냥 무사히 건넜다. 감내 다리는 그냥 건널 만하기는 해도 만약을 위해서 다리 못 미쳐 다리에서 보이지 않은 곳을 택해 발을 벗고 건넸다. 강물은 생각보단 덜 찼다. 그냥 제방 밑까지 맨발에 타이어신만 신고 가서 거기에서 양말을 신고 신을 신었다. 제방을 넘어 좀 넓은 논두렁길로 해서 무안으로 가는 자동차 도로를 건너고 도로 밑에 나있는 농로를 따라 제대리 못 아래쪽으로 해서 삽개로 가는 길을 잡았다. 삽개‘트’ 사립문 앞에 도착해서 문에 걸린 요롱을 보고 안심하고, 요롱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안에서 ‘트’지기 월산 어른이 나오셨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삽개‘트’는 읍당 연락선이 연계되어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이로써 부북면, 밀양읍의 당 핵심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방로 들어가서 월산 어른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끼를 벗어 토끼털 한쪽을 떼고 미농지 봉투를 꺼내어 드렸다. “문건을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 「조직책 변절사건」으로 파괴 또는 건재 여부를 조속히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선 알고 가야 할 것은 당 조직의 건재 여부입니다. 문건을 보시고 보고하실 것과 제기하실 문제들은 며칠 후에 제가 올 때 서면으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보고를 보고 사태를 정확히 인식한 토대 위에서 조직재건의 방도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서면 보고를 받은 다음에 재건할 구체적 일반적 방도를 제기할 작정이라고 합니다.” “알았습니다. 당의 핵심조직에는 아직 탈이 없습니다. 그러나 산하 대중운동의 조직에서는 이탈자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탈분자들이 대개가 당원 배가운동 때 들어왔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확고한 자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탈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 후과로 조직선이 노출될, 물론 대중조직의 조직선이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이 있어서 그 문제에 대한 방도를 지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밖에는 없습니까?” “이번 일을 당해서 알게 되었지만 당이 앞으로는 정예를 내세워서 정리해야 할 것으로 보아집니다.” “예 알았습니다. 각 면당에서 현황과 제기하실 문제들을 반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음 연락은 밀양 장날 12일 저녁에 오겠습니다. 준비는 12일 오후 8시 전에 마치시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월산 어른과 함께 업무를 토론하고 있는 사이에 저녁 밤참이 나왔다. 저녁 밤을 먹고 2시간 넘어나 걸어 왔고 또 앞으 산길을 2시간 반 넘어 걸어야 했기에 열심히 먹었다. 월산 어른은 잘 먹는 나를 보고서 한 말씀했다. “참, 맛있게 먹네. 보는 사람이 즐겁도록 말일세.” “예, 저의 할배가 음식 앞에 놓고 맛을 가리거나, 먹는 데 열중하지 않으면 복이 달아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저는 음식 먹을 때 맛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식은 먹어야 힘이 난다고 보고 먹습니다. 그러니 모든 음식이 다 맛이 있습니다.” “허 허, 먹는 데도 철학이 있네. 껄 껄....” 삽개를 열시 좀 지나 출발했다. 반달이 좀 덜 찬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밤길에다 산길인데 길을 환하지는 못해도 바로 앞은 잘 비추어주었다. 남산리로 가는 능선 길을 밤길에 찾기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단 쉽게 찾았다. 파서막은 밤 12시 반 쯤에 도착했다. 2시간 반 넘어 오는 동안 사람도 짐승도 하나 못 보았고, 동네를 지날 때도 개소리, 닭소리도 나지 않는 정말 고요한 밤길을 걸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그날 밤은 정미소 옆에 딸린 방에 잤는데 방이 뜨거워 엉덩이가 불에 댈까 걱정이 되어 이불자락을 요 위에다 더 깔고 잤다. 그래도 땀이 났다. 아침 5시 반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소여물통 같은 나무구더기에 오줌을 한 줄기 깔기고 앞을 여물고 돌아서니 동산 어른이 계셨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나는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인사를 했더니, “벌써 일어났는가?” 두 사람은 함께 내가 잤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부랴부랴 이불을 걷어 개고 요를 걷으려고 하자, 동산 어른은 말했다. “아직 좀 더 자지.” “아닙니다. 많이 잤습니다.” “그리 자고 되겠는가? 어제 저녁에 1시 넘어서 잤는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조직책 변절사건」 후 다른 데는 별 일이 없지만 수산에는 하남면 민청책이 검거되었고, 그로 해서 민청원 두 세 사람이 더 잡혀갔는데, 민청책 한 사람만 아직 잡혀있고 다른 사람은 모두 나왔다고 했다. 하남면당의 동산 어른과는 어젯밤에 도착하자 바로 문건은 전달했고 토론은 날이 새면 하기로 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토론 결과, 제기되는 문제도 같지만, 문제는 당원 배가, 5배가, 10배가 운동으로 당원이 된 무의식대중들의 일부가 공포를 느끼고 분위기가 매우 안 좋다는 것이다. 동산 할배는 의견으로 말씀하셨다. “이참에 그 당시 당원 배가운동으로 가입한 당원을 아예 모두 가입무효로 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라고 생각의 꼬리를 달고 말씀하셨다. “아무튼 이 문제는 시급히 정리 되어야 한다.” 라는 데는 이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방도를 제시해줄 것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은 부북면당의 월산 어른의 입장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무튼 12일 9시쯤에 다시 와서 제기되는 문제를 서면으로 제기하여 반영하기로 결론을 얻었다. 8시 반에 수산에서 출발하는 밀양행 버스를 파서막 정미소 앞 도로가에서 기다리다가 버스가 오자 나는 동산 어른께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9시 좀 넘어 읍내의 버스정류소에 도착했는데 장은 아직 완전히 서지 않았다. 장군 속에 묻혀서 산외면 다원으로 들어갈 작정을 했는데, 그러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슬금슬금 동문 밖으로 나가봤는데 거기에는 민보단이나 다른 무엇도 없었다. 그래서 초장이지만 장을 일찌감치 다보고 가는 사람인양 하고 선불로 해서 돌다리를 건너 살내 앞으로 나가 다원 앞 띠다리를 건너 다원의 나의 ‘트’로 무사히 도착했다. ---------------------------------------------- <주>
(1) 당시 마산에 있는 제5연대 제1대대 G2에서 밀양 경찰의 남로당 수색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는 밀양사람에게는 백골대(白骨隊)라고 부르는 공포의 대상으로 알고 있었다.
(2) 『조선일보』1948년 6월 6일자 참조
(3) 『한성일보』1948년 10월 19일자 기사 “국내치안 사정은 약간의 틈도 용허치 않는 바이며, 더구나 공산계열의 악질분자들은 우리 정부를 일조에 전복하려고 책동과 음모를 치열히 전개하고 있는 현상이므로, 과거 군정시대보다도 금후의 치안사정은 더욱 중대하고 또 염려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따라서 우리 경찰은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날로 늘어가는 도난사건과 적구배(赤寇輩)의 파괴음모를 완전히 예방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금번 상사(上司)의 승인과 서울시장의 협조 아래 각 동단위로 민보단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민보단의 역할과 성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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