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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1부대의 생체실험 장면 [통일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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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는 정말이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 세균실험을 자행했다. 주사기로 세균을 인체의 각 부위에 주입한 뒤 신체변화를 관찰했다. 세균을 입에 들이붓거나, 음식에 섞어 식용이라고 속여서 먹게 한 뒤 그 변화를 관찰했다. 백신연구를 위한 혈청을 얻기 위해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 죽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세균실험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생체를 해부했다. 인체에 세균을 침투시킨 후 해부를 통해 세균의 침투정도를 기록으로 남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거나 실험에 필요 없게 된 사람들은 소각로로 보내졌다.
실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행되었고, 임산부에게까지 시행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는 산 사람들에게 마취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마취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731부대는 세균무기 실험을 위해 전염병을 옮기는 쥐와 파리, 모기, 빈대, 이 등을 번식시켰고, 인간 생체실험을 위한 혈액재료를 얻기 위해 말, 소, 낙타, 원숭이 등을 사육하는 동물사육반을 설치·운영하였다. 731부대 노무자의 증언에 의하면 731부대가 세균을 전파하는 매개물인 이를 얻기 위해 나이 많은 노무자를 음침한 방에 가두고 겨울이든 여름이든 옷을 갈아입지 못하게 하고 목욕을 못하게 하면서 그들의 몸에서 이가 번식하게 하였다고 한다.
731부대는 세균전을 실험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개발된 세균무기를 실전에 투입하기 전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성능실험 까지 진행했다. 사람들을 야외 나무말뚝에 묶어두고 탄저병, 콜레라, 페스트균 등의 세균이 담긴 폭탄을 투하했다. 야외 세균무기 실험으로 일부 사람들은 사지가 찢겨져 죽어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부대로 끌고 와 해부를 하고 세균폭탄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관찰했다.
실제 전투에서도 세균무기를 사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1940년 10월 27일에는 난징(南京)의 1644 세균전 부대와 함께 중국 닝보(寧波)에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하게 하였고, 1941년 봄에 후난성(湖南省)의 한 지역에 페스트 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중국인 400여 명을 희생시켰다. 1939년 일제가 몽골과 소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에 대해 도발하다 대패하자, 소련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강물에 장티푸스균 등을 실제로 살포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 외에도 731부대에서는 갖가지 잔인한 실험들이 진행 되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긴 채 영하 30~40도 혹은 그 이하의 온도로 동상실험실에 집어넣고 각종 변화를 관찰했다. <미디어오늘>에 실린 “하성봉의 중국이야기”를 보면, 731부대는 사람과 말의 피를 서로 수혈하거나, 소장과 식도를 접합하고 팔과 다리를 절단해 교차 접합하는 실험도 했다. 사람을 고속회전기에 넣어 돌리는 실험과 폐에 담배연기를 주사하는 실험도 했다. 사람의 뇌를 직접 바늘로 찔러 인체의 다른 부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는 실험도 진행됐다.
전범 731부대장에게 면죄부를 준 미국
이렇게 끔직한 일을 저지른 일제가 패망을 했으니, 731부대의 지휘관들과 성원들은 전범재판에 회부되고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731부대 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 (石井四郞)를 포함한 대다수 박사들은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했다. 이시이는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부사령관이었던 기타노 마사지는 미도리주지 설립자가 되었고, 또 다른 생체실험 부대 책임자였던 와카마쓰 유지로는 니혼이야쿠 공장장이 되는 등 모두 일본 제약업계를 주름잡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우리는 보통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면 '정의로운' 미국이 포악한 제국주의 '독일', '일본'을 무너뜨린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떠 올린다. 하지만 미국 역시 해외원료기지 확보 등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개입했고, 전후 처리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일제의 세균전 연구경험과 기록을 활용하고 싶어 했다.
미국은 이전부터 생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2015년 6월 13일 <한겨레신문> 기사(“메르켈처럼 정색하고 따질 문제”)에 따르면 미국은 1차 세계대전 때 아주까리에서 뽑은 독을 포탄에 실어 나른 뒤 1920년 화학전국(CWS)을 만들어 생물무기 개발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3년에는 육군 생물학전실험실을 메릴랜드의 포트디트릭에 설치해서 생물무기 개발의 심장부로 삼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세균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미국으로서는 731부대의 실험 결과들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직접 살아있는 인간을 통해 실험한 자료를 얻을 수 있으니 그야 말로 금상첨화였다.
1947년 미 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의 세균전 증거를 전범재판소에 넘기지 않고 관련자들을 기소면제 하는 대신 세균무기실험 자료들을 미국의 정보기관에 넘기기로 731부대장 이시이와 거래를 했다. 2005년 일본 가나가와 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치 교수가 미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2년 후 731부대원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재판 기소를 면제해 줬으며, 총 15만∼20만 엔의 돈을 부대원들에게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돈은 2005년 화폐가치로 2000만∼4000만 엔(약 4억 원)에 달하는 것이다. 미국은 731부대원들에게 돈 외에도 음식과 선물, 향응 등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이시이 등 일본의 세균전 관련자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힘썼다. 스티븐 엔디콧 등의 저서『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에 따르면 미국 화학전부대와 극동사령부, 군무국장, 합동참모본부, 전쟁부, 국무부, 법무부, 전쟁범죄 담당 수석검사 등 모두가 이시이와 그 공범자들을 전범 기소에서 면제시켜 주는 데 한몫씩 담당했다. 이시이 개인에 대한 미군 정보 장교들의 평가는 그를 전범에서 면제시키기 위한 길을 닦아 주었다. 정보 장교들은 1947년 한 보고서에서 이시이를 "학구적이고 솔직하며, 인정 많고 친절하다"고 묘사했다. 나아가 "이시이는 친미적이며, 미국의 정신문화와 자연과학을 존경한다"고 적었다.
소련이 731부대원들에 대한 전범 기소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1949년 12월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을 별도로 열어 일본 패망 후 신병을 확보한 생체실험 실무 관련자 12명 전원에게 최고 2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두고 ‘보여주기 식 재판’, ‘이미 지나간 이슈’ 등으로 평가 절하했다.
일본과 관련된 전범재판은 2년 반에 걸쳐 진행됐고, 수많은 전범들이 중형을 받았다. 하지만 731부대의 총책임자 이시이 시로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당시 전범재판 총 책임자였던 맥아더 장군은 이시이에 대해 면죄부를 줬다. 1980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윌리웜 파월은 맥아더 장군이 미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등의 관련자들과 주고받은 비망록을 입수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의 검은 커넥션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시이는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첨단 시설이 갖춰진 육군기지 ‘포트디트릭’에서 세균무기 개발에 참여한다. 이 기지 정문에는 ‘731’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731부대 데이터
이시이 등 세균전 실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그 대가로 미국이 가져간 것은 무엇일까?
미국은 모두 4차례에 걸쳐 731부대에 대한 비밀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1945년 9월 미군 정보장교 머레이 샌더스 중령이 작성한 1차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공격용 세균무기 개발은 인정했으나 생체실험은 철저히 은폐했다. 1946년 3월에 나온 2차 톰슨보고서에는 세균폭탄 설계도와 제조법, 세균의 대량 배양기술 등이 담겨 있었다. 1947년 4월 로버트 펠에 의한 제3차 펠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이 시기에 일본의 생체실험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후 1947년 12월 에드윈 힐이 조사해 작성한 제4차 힐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731부대의 생체실험 표본 및 각종 실험 데이터를 완벽하게 확보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는 인체에 세균을 투입했을 때 세포가 변하는 것을 기록한 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이시이의 검은 커넥션에 따른 이시이의 진술 등은 미국이 731부대의 세균 실험결과를 완벽히 입수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의 내용에 따르면,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이용 가능한 기록을 보면 이시이 장군과 그의 부하 과학자들에 대해 최소 24차례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시이는 자신이 직접 연구한 보툴리누스 중독증, 브류셀라증, 가스 괴저, 비저, 인플루엔자, 페스트, 천연두, 파상풍, 야토병 등에 대해 보고했다. 키타노 마사지 중장은 출혈열, 선페스트, 탄저병, 진드기 뇌염, 발진티푸스, 이질, 장티푸스 등에 대해 진술했다. 파상열, 콜레라, 복어 독, 뮤신, 살모넬라, 쓰쓰가무시병(털진드기병), 결핵 그리고 각종 식물 병 등에 대한 진술도 있었다.
일본 과학자들은 35건 이상의 보고서를 미국에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8백 차례 이상 실시된 인체실험 관련 슬라이드 8천여 개가 딸려있었다고 한다. 인체실험과 관련해서는 350쪽에서 800쪽 이상 되는 비저병, 페스트, 탄저병 등에 대한 3건의 검시 보고서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3천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9년간의 방대한 실험결과를 송두리째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 실험결과를 입수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생화학무기를 실제 사용했다는 주장들이 이곳저곳에서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