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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9학년 마음공부. 악수하면서 상대방 얼굴 바라보기. 너희가 이것 하나 할아버지한테서 배웠다 해도 좋다고 했다. 달걀을 깨뜨려 ‘생명’을 보게 한다. 생명은 끊임없는 변화다. 변화가 멈추는 걸 죽음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죽음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송장도 썩는다. 그렇게 변화한다. 너희 모두 생명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라. 하늘의 명(命), 질서(order), 법을 몸으로 살리는[生] 그것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천명(天命)을 모르면 아직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마지막 판에 목영과 금강이 깜박 졸았다. 졸았으니 내 얘기를 들었을 리 없다. 두 녀석을 깨우고 말해준다. 졸음이 쏟아지는 건 천하의 영웅도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졸릴 때는 자도록 해라. 하지만 정신만큼은 결코 잠들지 마라. 정신이 잠들었으면 그 사람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2017. 6. 16)
⎈ 스리 니사르가닷타의 말. “머리(mind)는 수렁을 만들고 가슴(heart)은 수렁을 덮는다.” 수렁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 빠져봐야, 실은 빠졌다는 착각을 경험해봐야, 평범한 들판이 얼마나 낙원인지를 알 수 있기에, 그래서 비로소 낙원을 즐길 수 있기에… 머리(생각)는 시간에 살고 가슴(느낌)은 순간에 산다. 이제는 머리를 가슴 아래로 내려야겠다.
오전에 두더지, 반디, 신난다와 함께 홍빈 군 자취방에 들렀다가 함께 현장으로 가서 효선이 주문해놓은 콩국수와 수제비로 점심. 엄청 많이 나온 음식을 모두 비웠다. 조금 남은 콩국수에 전라도식(?)으로 설탕을 타서 먹는다. 별미다. 하지만 처음부터 설탕을 탔더라면 좀 곤란할 번했다. 달콤함은 좋지만 담백함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다. 간맞추기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소금. 이십여 년 전에 만나던 승식 씨 내외가 학교에 왔다. 제천에서 한의원을 운영한다는데 거리에서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캄보디아인가 어디에 가 있던 토벽도 정성스레 덖은 차를 가지고 왔다. 두 객이 하루 묵는 모양이다. 효선은 천장을 칠하는데 석양을 받아 은은한 황금빛이 황홀하더라고 흥분한다. (2017. 6. 17)
⎈ 정교하게 계획된 ‘학습’이었다. 아침 일찍 집수리 현장으로 간 효선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11시 5분 버스로 갈 참인데 버스가 고장으로 서 있다. 다음 버스를 타면 집으로 올지 모르는 효선과 어긋날 것이다. 그냥 기다리기로 한다. 어쩐지 자꾸 불안하여 전화를 걸어보지만 벨은 울리는데 받지를 않는다. 갈수록 고약한 상상이 기승을 부린다. 결국 바람빛 새집에서 예배드리다 말고 일어선다. “집사람하고 연락이 안 돼서 불안하다. 지금 여기에 마음을 불러오려고 애써보지만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현장을 확인해봐야겠다. 마음은 엉뚱한 데를 헤매면서 몸만 여기 있는 것은 우선 나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정직하지 못한 짓이다. 미안하다.” 소리샘이 차를 달려 현장으로 가는 동안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현장에 가보니 효선은 자기 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열중해 있다. 핸드폰에서는 음악이 울려나오고 자기도 모르게 묵음처리가 되어 전화가 걸려오는지 몰랐단다. 돌아서서 심호흡을 하는데 한 마디 들려주신다. “알겠느냐? 네 생각을 네 맘대로 좌우하는 것,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아니다. 아직은 네 힘으로 불가능이다. 그러니 다만 기다리며 기도할 뿐.” 덕분에 연습 한번 오지게 잘했다. 언제고 닥쳐올 그날을 대비하여! (2017. 6. 18)
⎈ 집사람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내 마음을 가라앉힌다. 소음이 고요를 선물할 때가 있다. 토벽이 정성껏 덖은 차(茶)에서 우러난 맑은 에너지가 내 몸의 세포들 속으로 스며든다. 그저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침에 ‘천사들의 말’을 옮긴다.
네 주변의 모든 대상, 모든 존재가 너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네가 ‘줄 수 있는 것’만 요구한다.
가련한 자, 무능한 자에게서 누가 무엇을 구하겠느냐?
누가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구하겠느냐?
무화과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그 나무에서 무화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
흔들리더라도 걱정하지마라.
아무도 엉겅퀴를 흔들지 않는다!
푸른솔이 뜰의 나무에서 땄다며 복숭아 몇 개를 가져다준다. 크기가 저마다 다르고 모양도 울퉁불퉁 각지각색이다. 벌레 먹은 놈도 있고 오야만큼 작은 놈도 있다. 하나를 칼로 저며 입에 넣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난다. “아, 복숭아!” 맞다. 이게 복숭아다. 천연의 복숭아, 사람이 일삼아 가꾸지 않은 복숭아! 그동안 농장에서 재배된 복숭아, 시장에서 상품화된 복숭아로 길들여진 입에 친숙하진 않아도, 풋풋하고 달콤하면서 오히려 단단한 자존감마저 느껴지는 이 맛! 함부로 먹어치울 수 없다. 저절로 솟는 고마운 마음!
영암 김태옥 목사가 목우당과 함께 현장에 왔다가 6인분 점심을 대접한다. 이름을 태옥(泰玉)에서 태연(泰然)으로 고쳤다기에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보이는 ‘돌’이 비켜난 자리를 보이지 않는 ‘그러함’이 채운 셈인데, 부디 새 이름으로 새 삶이 펼쳐지기를… (2017. 6. 19)
⎈ 부산 맨발동무도서관에서 미구엘 루이즈의 ‘톨텍, 네 가지 합의’를 책으로 펴냈다. 아담하고 예쁘다. 앉은자리에서 읽어보는데 잡지로 읽을 때와 맛이 다르다. 음, 정말 좋은 양식이다. 이 작은 선물로 많은 사람이 지옥에서 천국을 사는 비결에 눈을 떴으면 좋겠다.
“개인의 자유를 이루는 마지막 방법은 자기 죽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다. 저승사자가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사는 것이다. …저승사자는 우리에게 날마다 그날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오늘 초면인 손님에게 말했다. 세상에서 더 경험해보고 싶은 게 이젠 별로 없다고, 음식도 먹어볼 만큼 먹어보았고 경치도 구경할 만큼 구경해보았고 아픔도 아플 만큼 아파보았고 기쁨도 슬픔도 맛볼 만큼 맛보았고 사람들도 겪을 만큼 겪어보았다고, 그런데 한 가지 꼭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아마도 이것이 내 인생 마지막 수업일 것 같다고, 뭐냐 하면 어제와 내일에서 해방되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거라고,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게 내 능력만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거니와 위에서 내려주시는 선물로 받아서 ‘경험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고, 이 진실을 바로 엊그제 깨달았다고… (2017. 6. 20)
⎈ 타라 브라크 번역. 이런 문장이 있었다.
지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내가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둘 사이에서 내 인생이 흘러간다. ―스리 니사르가닷타
7학년 마음공부 시간. 말의 힘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들어서 힘이 나는 말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들어서 힘이 빠지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2017. 6. 21)
⎈ 오전 버스로 공사현장에 가서 즐거이 칠하고 있는 효선과 자장면으로 점심. 돈이 바닥났는데 한님이 누구를 시켜서 알맞게 보내주셨단다. 그러니까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다짐을 나눈다. 둘러보면 볼수록 그저 감사할 것뿐이다.
‘톨텍’을 다시 한 번 읽는다. 정말 좋은 책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급히 적어둔다.
오늘 나는 내 안에 있는 두 인간을 죽인다.
하나는 나를 심판하는 준엄한 판사요,
다른 하나는 그의 심판으로 벌을 받는 죄인이다.
둘이 남긴 빈자리는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을 그저 그냥 받아줌으로써
그녀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젖먹이 아들로 채운다.
저녁을 구슬댕댕이가 정성껏 차려 대접한다. 지금까지 먹어본 갈치조림 가운데 오늘 먹은 것이 최고라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두더지와 민들레가 자리를 함께… (2017. 6. 22)
⎈ 박진호 교사가 8, 9학년 강의하러 열차로 내려왔다. 신난다와 마중 나가는 길에 천지인 아이들이 지난 번 사건(?)을 스스로 훌륭하게 매듭지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깔끔히 처리된 사건 마무리에 모두들 흡족했다고. 바야흐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앞에서 선도하던 시절이 저무는 모양이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활이 화살을 앞에서 당길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흐름에 동승하려면 모든 의심을 지울 수 있는 든든한 믿음이 필요하다.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아이들을 세상에 보내신 우주의 한님에 대한 믿음이… (2017. 6. 23)
⎈ 박 교사와 아침 산책. 와온 해변을 걷다. 밀물이 멀리에서 밀려오는데 몇 마리 황새가 젖은 갯벌 위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문득, 사방이 고요하다. 내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기는 내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고, 그러니 다만 기다리며 말없이 기도할 따름이라고… 효선은 새벽에 현장에 갔다가 와서 아이들 수업하고 점심 먹고 박 교사 수업에 참석하고 아마도 내가 낮잠 든 사이에 다시 현장으로 간 모양이다.
‘천사들과 말하다’ 번역. 순결(純潔)에 대하여 말해달라는 릴리의 요구에 천사가 한 마디로 답한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이것이 순결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은 제 자리에 있지 않은가? 내 눈엔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순결하다. (2017. 6. 24)
⎈ 소리샘 아버지 황 아무 목사가 17년간 담임으로 있던 교회에서 은퇴하는 날. ‘마지막 설교’에 열정의 땀을 쏟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는 오직 한 우물을 판 고집스러운 사람이라고 그의 온몸이 말한다. 효선이 대나무 젓대 달퉁이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는데 어두운 내 귀에도 음색이 참 깊고 간절하다. 소리샘이 아버지보다 더 허전해하는 느낌이다. 오후 늦게 현장을 청소하러 간 우리를 광주 송정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나 돼지불고기 멍게비빔밥으로 저녁을 대접한다. 이번에도 ‘안수집사 이 아무개’가 내는 거란다.
타라 브라크를 번역하는데 한 대목이 나를 잠시 얼어붙게 한다.
―티베트 스승 최걈 트룽파가 한번은 교실에서 포스터 용지에 V 자를 그리고 학생들에게 자기가 그린 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많은 학생들이 ‘새’라고 답했다. 그가 말했다. “아니다.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는 허공이다!”
새에서 허공을 보는 눈. 소리에서 침묵을 듣는 귀. 아멘! 실로 한님은 당신이 만든 것들 안팎으로 숨어계신다. 그래서 인생은 이토록 고단하고 눈부신 숨바꼭질인가? (2017. 6. 25)
⎈ 일부와 동행하여 서울에서 옛날 예수살기 동료들 만남. 철원 정경석 목사와 이천 홍건의 목사님을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은퇴하여 작은 농장을 가꾸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역시 오늘도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은은한 미소만 짓는다. 명중 목사가 주님의 노동현장과 교회에서 고되고 보람찬 훈련을 받아 더욱 단단하진 느낌이고 강릉의 대선과 종주, 인천 춘우, 파주 석태… 모두들 제 자리에서 착실하게 자기 길 걷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허리를 다쳐 불편한데도 모임을 주선하고 제 몫의 일에 성실한 범일 또한 여전하다. 모두들 선하고 고마운 추억의 주인공들이다. (2017. 6. 26)
⎈ 교보문고에 들러 달라이 라마 책 한 권 산다.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니 사람들이 길게 줄 지어 대기하고 있다. 부근 샐러리맨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모양이다. 좀 한가해 보이는 월남 국수집으로 들어가는데 역시 거기도 정신이 없다. 좁은 주방에서 어떻게 주문한 대로 음식들을 마련하는지… 아마도 전쟁하듯 숨 돌릴 겨를 없이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을 게다. 종업원들 대부분이 베트남 사람으로 보이는데 서툴지만 한국말도 제법 알아듣는 것 같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들 살고 있는 것일까? 일부는 광주로 나는 순천으로 버스터미널에서 헤어졌다. 돌아오는 차에서 정신없이 자다보니 어느새 순천이다. 뜻밖에 남호 목사가 새로 파트너 되었다는 여인과 함께 저녁 대접하겠다며 찾아왔다. 이런저런 아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눈다. 풍기에서 과수원 농부로 되었단다. (2017. 6. 27)
⎈ 7학년 마음공부.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적어보아라. 생각하기, 노래하기, 숨쉬기… 저마다 노트에 적어 내려간다. 묻는다. 공기가 없는데 숨을 혼자서 쉴 수 있느냐? 솔비가 답한다. 아니요, 나무가 숨을 쉬어서 사람이 숨 쉴 수 있어요. 거봐라, 나무 없으면 사람이 숨을 못 쉰다. 숨을 못 쉬면 생각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지. 그런데 무얼 혼자서 할 수 있겠느냐? 기억해둬라.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공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배웅하던 소월이 묻는다. “할아버지는 친구를 한 마디로 설명하라면 뭐라고 하실 거예요?” 대답한다. “내가 무슨 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그래서 온 세상이 나를 등지고 떠날 때, 내 곁에 있어주는 그 사람이 내 친구다. 평상시에 가깝게 지내다가도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를 떠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차라리 헤어지는 게 좋다. 누가 어려움을 당할 때 네가 그 사람 곁을 지켜준다면 너는 그에게 친구가 되어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고 그래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러니 참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복도 끝에서 이 말을 나누는데 콧등이 시큰해진다. 소월이 고맙다. 서남풍 바람에 목덜미가 시원하다. (2017. 6. 28)
⎈ 목포 여(呂) 선생께서 요 며칠 이 목사를 찾는다는 말이 들리기에 아침나절 일부 차로 가 뵈었다. 처음엔 버스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일부가 굳이 차로 모시겠단다. 두어 번 버스를 고집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두어 번마저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게 아직은 잘 되지 않는다. 여 선생은 내가 오는 줄 모르고 있다가 보고 싶은 마음이 통한 것 같다며 반가워하신다. 곧장 이야기로 들어가 점심시간까지 계속된다. 죽음에 대하여, 그것은 마침이자 시작이라고, 태아가 죽어 신생아로 사는 것처럼 죽음을 관통하여 들어갈 새로운 천지가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뭐 이런 이야기들을 카를 융을 인용하며 유식한 척 늘어놓는다. 선생이 흥미롭게 듣는데 얼마나 기억하실는지 그건 미지수다. 전에는 죽음이 엄청 무서웠지만 지금은 거의 안 무섭다고, 아주 조금 무섭다고 하신다. 평생 일 더미에 묻혀 사신 분이 아무 일 못하게 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드신 모양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렸다면서 시방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단다. 점심 먹고 돌아오려는데, 흡사 어린아이 떼쓰는 것처럼, 꼭 오늘 가야 돼요? 낼 가면 안 돼요?―를 되풀이하신다. 효선이 허락해주면 자고 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하니 이건 허락할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자고 오시라고 한다. 허락이 떨어졌어요, 하자 흥, 꼼짝 못하시네? 하신다. 그렇다고, 한평생 내 맘대로 살아왔기에 남은 생만큼은 거꾸로 살아보고 싶다고, 웃으며 답한다. 일부 먼저 보내고 오후 3시에 다시 만나 6시까지 이야기 듣고 저녁 먹고 8시까지 앉아 있다가 퇴근하는 종순 언님 차를 타고 자매회 모원으로 가서 고단한 잠자리에 든다. (2017. 6. 29)
⎈ 새벽. 밭에서 풀 뽑는 옥태 언님을 등 뒤로 한참 바라본다. 뭐라고 이유 없이 위로의 말을 들려주고 싶은데 그럴 자격이 없는지라 입도 벙긋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본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인생이다. 하긴 어찌 옥태만 그러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위로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냥 짠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
어제 일부 차로 돌아갈 예정이었기에 차비를 따로 마련해오지 않았다. 종순 언님에게 얻은 돈 만원으로 순천 가는 버스표 살 생각을 하고 있는데 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준 목우당이 굳이 표를 사주는 바람에 결국 만원을 번(?) 셈이다, …ㅎㅎㅎ. 돈 벌기 참 쉽다.
지금여기교회 장 목사 일행이 순천만 구경 마치고 저녁식사를 대접해준다. (2017. 6. 30)
⎈ 오늘은 전기공사를 한단다. 하동군이 ‘생태해설사’를 양성하는데 와서 한 마디 하라는 요청이 있어 가는 길에 잠간 현장에 들렀다. 바쁘게 일하는 것 보고 곧 돌아서서 하동군으로 간다. 보리밥이 왕복 길에 운전기사 노릇으로 수고가 많다. 늘 하던 말 하고 내려왔지만 그런대로 눈길을 교차하며 친근한 소통은 있었던 것 같다. 전에 이 부근 어디에서 조 아무가 자연농업학교(?)를 운영했던 게 기억나서 수소문해보니 이사했단다. 한 젊은이가 자전거로 땀을 흘리며 나를 만나러 멀리 어디에서 왔다고 했는데 끝나고 나서 따로 만나볼 것을 깜박하고 그냥 왔다. 나중에 얘기 듣고 미안했지만 어쩔 것인가?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지겠지. 돌아오는 길에 보리밥이 메들리로 무슨 노래를 끊임없이 부른다. 처음엔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는 줄 알았다. 보리밥이 노래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무슨 노래를 그렇게 가사도 까먹지 않고 연속해서 부르는 거냐고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강의 중에 인용한 용아화상(龍牙和尙)의 시(詩)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말해준 것 같다고 한다. 옳다, 사람이 한 그루 나무처럼만 산다면 그게 바로 지인(至人)의 삶 아니겠는가? (2017. 7. 1)
⎈ 보리밥 차로 현장에 가서 전기(電氣) 기사, 잡역부 최 사장님(효선이 그를 부르는 호칭)과 함께 점심 먹다. 밥값을 보리밥이 낸다. 중년을 넘겼을 최 사장님, 잡역부라고 하지만 웬만한 일 다 한다.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정성껏 한다. 효선은 그를 향하여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표정을 짓거나 짜증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단다.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일이 모두 끝나면 그에게 감사패 하나 정성껏 만들어주자고 했다. 감사패란 게 그게 무슨 사장이나 이름에 ‘사’자 붙는 인간들의 독과점은 아니잖은가?
용화사 예배. 부산에서 온 아몽 내외가 함께 한다. 두더지가 변산 모임에서 오는 길로 예배에 참석한다. 왜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스스로 묶여서 지금 당장 즐길 수 있는 순간을 괜한 걱정과 근심으로 보내는 걸까? 이런 이야기 끝에,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고 이건 이러면 안 되고 저건 저러면 안 되고… 이 따위 ‘반드시’(must)에서 해방되라는 천사들의 말을 소개한다. 그런데 부산 사람들이 천일기도를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 무심코 말하기를, 기도할 때 하느님을 속이면 안 되니까…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말을 고친다. 아니, 하느님을 속여도 돼. 모두 웃는다. 신난다가 말을 받는다. 하느님이 속아요? 아마 속지 않을 걸? 사람이 하느님을 속일 순 있지만 그에 대한 값은 본인이 치러야겠지. 자업자득이란 말이 그거겠죠? 그렇지. 행동도 습(習)이고 생각도 습이다. 행동의 습보다 생각의 습이 더 지독하고 더 고약하다. 그렇다.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 안 되는 건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그러니 뭐가 됐으면 될 수 있으니까 된 거다.
작업 마치고 돌아오는 효선의 표정이 밝고 환하다. 전깃불이 들어오자 온 집안이 생각보다 황홀하게 빛나더란다. 사람의 단순함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2017. 7. 2)
⎈ 고단한 몸으로 겨우 저녁을 먹고 나서 효선이 혼잣말을 한다. 하루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고. 오늘은 문짝과 문틀이 잘 맞지 않아 작업하는 데 지장이 컸던 모양이다. 실제로 힘든 건 목수였을 텐데 겪어보면 그게 그렇다. 힘든 일을 당하는 본인보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더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 정향이 한참 고통스러워할 때 저 사람과 내가 입장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가? 그게 그를 위한 생각이라기보다 나를 위한 이기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 한 사람에게 가슴과 등이 있듯이 장점과 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 또한 지금 앞에 있는 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겠다. 소리샘이 서울에서 귀가하는 길로 작업복 갈아입고 달려와서는 ‘최 사장’과 함께 싱크대 타일을 붙인다. 이곳이 자기에게는 무슨 피난처 같단다. 반디가 오늘 유럽에서 돌아오는데 소화불량으로 고생했다는 소식이다. 속히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다. 강원도 쪽에 폭우가 쏟아지나보다. (2017. 7. 3)
⎈ 오랜만에 강원도 정선 땅을 밟는다. 우편함에는 젖어서 곰팡이 핀 우편물이 가득 차있다. 임자 없는 집에 오는 우편물은 비에 젖어도 할 수 없다. 아무도 간수해주지 않는다. 효선은 도착하는 대로 아궁이에 불 때고 자리에 눕는다. (2017. 7. 5)
⎈ 오전 내내 효선이 이삿짐을 싸서 승용차에 싣는데 나는 구경만 한다. 점심을 백복령 휴게소에서 감자전과 막국수로 때우고 트럭에 실을 나머지 짐 챙기고 나니 왕산이 도착한다. 곧 이어 광주 장 목사 일행이 와서 무거운 냉장고부터 차에 싣고 나머지 짐을 싣는데 왕산이 익숙하게 지휘를 한다. 수없이 이사를 다닐 때마다 자기 손으로 짐을 쌌단다. 저렇게 건강한 몸으로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이 이제는 약간 부럽다. (2017. 7. 6)
⎈ 아침을 우리식당에서 콩국수로 먹고 정선 경유하여 돌아오는 길에 효선이 누적된 피로로 졸음운전을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멈추고 잠든 모습을 차창 밖에서 지켜보는데 가슴이 짠하다. 순간순간 한님이 지켜주시니 살아가는 줄 알지만 어서 일을 매듭짓고 편안히 쉬고 싶다. 순천 집에 도착. 소리샘이 반갑게 웰컴 투 홈이라며 마중한다. 아직 손볼 데는 많이 남아있지만 청소가 잘 돼 있어서 짐을 들여놓으면 오늘이라도 잘 수 있겠다. 트럭을 빌려준 스컹크가 와서 짐을 내려주고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돌아간다. 고맙다. 왕산 소리샘 함께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로 효선은 세수도 하지 않고 무슨 나무토막처럼 요 위에 쓰러져 단숨에 잠들어버린다. 오는 길에 보니 환하게 불 켜진 꼬맹이들 교실에 아이들과 부모들이 둘러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 2, 3학년 여름학기를 마감하는 시간이란다. 불빛에 비친 웃는 얼굴들이 평화로워 보였다. 모든 것이 그저 고맙습니다, 한님. (2017. 7. 7)
⎈ 오늘은 텔레비전과 냉장고와 세탁기가 들어오는 날이다. 하루만이라도 쉬었으면 좋겠는데 효선은 그게 안 되나보다. 뭐가 정리되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그 ‘아무것도’라는 말 속에는 물론 ‘쉬는 것’도 포함된다. 전에 정향이 그러더니 효선도 그런다. 어쨌거나 잘 정돈된 집에 사는 것이 내 팔자인 모양이다. 정작 본인은 깔끔이라는 단어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지저분 인간이면서… 하지만 내 인생 마지막 순간만큼은 완전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맞고 싶다. (2017. 7. 8)
⎈ 용화사 예배에 두더지, 반디, 신난다, 보리밥이 모여 앞으로의 교육이 왜 아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 일용할 양식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웃으며 환담.
밤에는 수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시내 집에서 댕댕이 내외, 버럭 내외, 보리밥, 바람빛, 대구에서 달려온 소리샘 등이 모여 축하 와인 파티. 이야기들이 한참 재미있게 펼쳐지는데 재수 없게 설교를 늘어놓으려고 하는 나를 보았다. 다행히도 금방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아, 망할 놈의 버릇이여! 아무리 좋은 말도 청탁 없으면 하지 말 것! (2017. 7. 9)
⎈ 아침 명상 마치고 곧장 시내 집으로. 오늘은 부엌살림 들어오는 날. 세 명의 전문가들이 땀을 흘리며 작업한다. 효선은 부품 사러 철물점을 몇 번씩 왕래하고 그 동안 나는 텔레비전으로 육상경기, 축구, 배구, 농구, 격투기를 구경한다. 격투기는 정직한 놀이 같아서 재미있다. 금방까지 죽일 듯 싸우던 둘이 승자와 패자로 갈려 피 묻은 몸을 부둥켜안고 뭐라고 귓속말을 나누는 장면이 가끔 보이는데 바로 그 장면이 나를 감동시킨다. 저거야말로 이 땅에서 인간들만이 할 수 있는 ‘먹고 사는 데 도무지 쓸모가 없는’ 짓거리다. 음악이 그렇고 미술이 그렇고 스포츠가 그렇다. 바로 이 먹고 사는 데 쓸모가 없는 짓, 짐승들은 그래서 결코 하지 않는 짓,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가? 부엌살림이 들어오니 부엌이 금세 배불뚝이처럼 되었다. 명랑한 소리샘이 오후에 와서 일을 거든다. (2017. 7. 10)
⎈ 민들레가 면담을 신청한다. 며칠 뒤로 다가온 천일기도 회향하는 날, 제비뽑기로 촌장과 교장을 선출하기 위하여 그동안 추천을 받아왔는데 자기가 촌장과 교장 후보자로 천거되었단다. 교장은 혹 모르겠으나 촌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아닌 것 같아 밤새도록 잠 한 줌 못 잤는데 어쩌면 좋겠느냐며 눈물을 글썽인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한님이 나를 제비로 뽑아주셔도 나는 거절할 거라고, 그러니 촌장 후보 명단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고, 안심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밝히라고… 민들레 얼굴이 밝아지며 그래도 되는 거냐고 묻는다. 일단 제비에 뽑히고 나서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거니까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전에 미리 나를 뽑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거야 당연한 권리 아닌가? 게다가 한님은 결코 억지를 부리지 않거늘. …무슨 대단한 자리도 아닌데 서로 차지하겠다며 스스로 후보로 나서서 자기선전을 해대는 요즘 세상에 이런 일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흥미롭고 고마운 현상인가? 이 이상한 파문(波紋)이 널리 확장되어 언젠가는 국민의 추천받은 후보자들 가운데서 대통령도 제비로 뽑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제대로 된 하늘과 땅의 협치가 이루어질 텐데.
오늘 한전 직원이 계량기 달아주는 것으로 전기공사가 마무리된다. 효선이 내일까지 부엌을 정돈하고 그동안 못해준 밥을 맛있게 해주겠단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문자 그대로 젖먹이가 되는 것인가? (2017. 7. 11)
⎈ 이삿짐 정리하는 일로 효선이 분주한데 뭐라도 도움 될 수 있을까 해서 현장에 와보지만 정말로 내가 할 일이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어지럽다. 하지만 이렇게 약해진 늙은 몸을 도로 젊고 힘 있게 하려고 무슨 수를 써볼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다. 그런 건 생각만 해도 싫다. 그냥 이대로 시들어 가리라. 그분이 쓰실 만큼 쓰셨으면 그만이다. (2017. 7. 12)
⎈ 새벽에 꿈을 꾸었다. 목사들이 모여 무슨 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장소 문제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결국 예배가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후배들이 들려준다. 그들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여기서 예배드리자. 모두 좋다고 한다. 한 후배가 묻는다. 프랑스의 어느 귀족이 죽으면서 자기 전 재산을 하느님께 바친다며 교회에 기증했는데 그것이 최후심판 자리에서 ‘불경죄’로 다스려졌다고 한다. 무슨 얘긴가? 내가 말한다. 당연하지. 그가 그것을 다른 누구한데 줬다면 불경죄로 심판받진 않았을 거다. 후배가 다시 묻는다. 어째서 자기 재산을 모두 하느님께 바친 것이 불경인가? 내가 흥분하여 말한다. 자, 네가 내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나에게 주며 내 전 재산이니 받아달라고 하면 그게 나를 모욕한 것 아니냐? 후배가 어리둥절하여 입술을 내민다.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다.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어, 무엇이 도대체 네 것이란 말이냐? 소리 지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2017. 7. 13)
⎈ 어제 오늘, 기력이 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전에 이런 일을 겪어본 기억이 없다. 밥도 잘 먹고 잠도 푹 자는데 왜 이럴까? 곰곰 생각해보니 하나 짚이는 게 있다. 닷새째 책을 읽지 못했고 무엇보다 번역을 한 줄도 못했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었을 거”라던 정생 형이 생각난다. 그렇다. 그에게는 글쓰기가 고역이 아니라, 삼십대 중반에 얼마 못살 거라던 그를 칠십 넘도록 살아있게 한 에너지원(源)이었다. 나도 그런 것 같다. 닷새째 글 한 줄 못쓰니 아무래도 그래서 이렇게 기운이 달리는 모양이다. (2017. 7. 14)
⎈ 새벽에 꿈을 꾸었다. 사람이 일분 전 과거와 일분 뒤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를 수학과 물리학과 철학이 총동원되어 밝혀내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환각에서 깨어나 너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인 지금 여기를 살라는 게 그냥 해보는 근사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고 간결하게 학문적으로 입증되어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는 그토록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알던 것이 깨고 나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일 아니라면 내일 걱정 말고 오늘 하루 살라고 말씀하신 예수가 거짓을 가르친 셈이다. 그분을 거짓교사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선물로 주어지기를, 어차피 내 노력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오늘도 믿음으로 기다릴 따름이다.
기림이 제주 여행길에서 제 남편을 통해 폴 틸리히의 ‘영원한 오늘’을 부쳐왔다. 60년대 말, 신학생 시절에 심취해 읽던 책을 반세기만에 다시 보니 반가웠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우선 그가 책 제목으로 삼은 설교 ‘영원한 오늘’(The Eternal Now)을 읽는다. “우리는 과거의 어쩔 수 없는 희생물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를 그냥 과거로 남겨둘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회개’(repentance)라고 부른다. 진정한 회개는 과거의 잘못된 행실을 뉘우치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로부터 자기를 떨어뜨려놓는 행위, 그것들을 더 이상 현재에 간섭할 수 없는 무엇으로 과거에 던져버리는 행위다. ……모든 것을 소멸케 하는 시간의 힘을 능가하는 유일한 힘이 있다. 영원이신 분, 과거에 있었고 지금 있고 앞으로 있을 분, 처음이자 끝이신 분, 그분이 우리에게 지나간 것에 대한 용서를 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용기를 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의 영원한 현존 안에서의 안식을 주신다.”
연극인 이상직 씨 초대로 구례군 유곡마을회관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마당. 처음엔 넷이 시작했는데 뒤로 세 사람 더 와서 일곱이 되었다. 재미있고 다정한 모임이었다. 효선이 밤길을 운전하여 다녀오는데, 오가는 길이 비에 젖어 조용하고 나지막하다. (2017.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