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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아포리아, 번역의 아포리아
조 재 룡
너는 피의 책이다.
네 눈의 뜨거운 신경다발은 목구멍까지 이어져 있다.
얇은 낱장들이 내게서 펄럭였다.
한 권의 책에는 어떤 사건도 담기는 법.
너는 육신으로 기록한다.
내 몸의 모래 알갱이들,
발바닥을 찌르는 빛나던 유리잔,
토마토의 차가운 속살,
네 피는 붉고, 너를 서서히 채우고,
그리고 식는다.
바람은 어디에든 잠깐, 불어왔을 뿐.
네게는 너의 현재가 읽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 일도 도모하지 않기 위해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언젠가 피로써 번역되기를 바라면서.
하재연, <피의 책>
1. 아포리아의 아우라가 빛나는 곳
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객쩍은 말이 요즘 들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아니, ‘비주류 하위문화’(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데올로기다!)나 ‘주변문화’(어디가 주변인가? 그럼 당신이 있는 곳은 ‘중심’이란 말인가?)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채, 난삽한 패러디를 일삼으면서 제 처절함(처절하지 않은 시대도 있었던가!)을 드러내고자 설익은 공격성(세련된 재현이나 실험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을 표출하는 데 시가 집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난해함이라는 단어 주위로 몰려든 담론들은 지금 ‘주변부’나 ‘비주류’를 가장하여, 우리 시가 한창 시험 중에 있는, 오히려 이 경우 동의어에 가깝다고 해야 옳을 ‘새로움’이나 ‘낯섦’으로 충만한 언어의 운용을 부정하거나 기성 문화의 산지(産地)에다 애써 이것들을 붙들어 매면서 제 이데올로기를 관철 중이다. 그렇다면 시는, 이런 담론들에 이끌려 묘책도 없이 추상의 저 편 너머로 흘러가고 마는가? 사막 위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마냥 시는 모래 언덕에서 끊임없이 몰아치는 저 아포리아의 사풍을 그저 되받고만 말 것인가? 시가 아포리아인 것이지 논저들이 시에 아포리아를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아포리아의 연속이라면 번역은 시의 아포리아를 짚고, 시의 아포리아가 담지하고 있는 ‘아우라’를 드러내거나, 연속성과 현대성을 담보하면서 적어도 시로 인해 매개되는 문화의 접경지대에서 꽃피운 이 아포리아의 히스테리적인 발작을 우리에게 맛보게 해준다. 이 발작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의 힘’이라고도 부른다.
시는, 예컨대, 아포리아적인 제 성질로 인해서 시인 것이다. 아포리즘이 한 시인의 시세계에 헌정된 개별적인 시학을 산출하는 일에 보다 치중한다면, 아포리아는 한 편의 시에 제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는 역동적인 힘을 만들어낸다. 역사주의가 시대라고 하는 한시적 패러다임에다 시를 가두어 두는 데 비해, 역사성이 끊임없이 시를 추동하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시에 열어주는 것과도 같다. 모더니즘이 유행과 동시대성에 시를 종속시키는 데 비해 모더니티가 시에 자양분을 제공하면서 시가 나아갈 길을 터주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시는, 무엇이 되었건 간에, ‘이즘’에 갇히지 않는다. 시가 아포리즘, 역사주의, 모더니즘 따위에 갇히게 되면, 추상의 탈을 뒤집어쓰게 되고, 그러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시는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차이만큼이나 선연하게, 미끄러지는 제 속성으로 인해 생리적으로 언어의 미지(未知)를 향한다. 시가 도전인 까닭도, 기존의 통념에 대항한, 불편하고, 난해하며, 그리하여 낯선 모험인 까닭도, 일상을 사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그 일상을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다가 외람되게 펼쳐 보이고, 그래서 때론 느끼하고 스멀대며 뭉그적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주변을 다시 둘러보며 오늘을 되살아갈 힘을 망각의 바구니에서 끄집어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재적 기억’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번역은, 이런 일에 동참하고나, 적어도 일조한다.
하여, 시 번역을 둘러싸고 논의되었던 학술적 담론들을 정리해보는 데 할애되지는 않을 이 글은 대신, 시의 아포리아, 혹은 그 당혹감이 번역과 마주할 때 선명한 궤적을 그리면서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어, 번역(가)의 편에서 시를 읽고, 그리하여 읽기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을 지점들에 잠시 머물면서 문학과 번역, 시와 번역, 이론과 실천에 관해 궁리해보는 것을 궁색한 변명거리로 삼는다. 번역의 관점에서 시를 재해석한, 거의 최초라고 해도 좋을 뛰어난 글에서 황현산은 “두 문화는 번역의 유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을 공유”한다며, 최근의 시가 어떻게 “한국의 주류 시를 압박하고 거기에서 제자리를 모색하기 위해 번역 또는 의사번역을 가장 효과적인 통로로 삼는”지를 정치하게 밝혀내었고, 그 결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시를 읽을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 바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이다. 간혹 인용되는 외국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문장을 부디 용납해 주시길. 하나 더. 제사(題詞)를 제외하고 거개가 부분만을 발췌해 인용한 까닭에 시의 온전한 이해를 포기하고 만 이 글을, 더구나 번역에 관한 사유를 중심으로 시 구절을 가져다 쓴 무례함과 어설픈 탓에 엿가락처럼 늘어나 버린 분량도 너무 무람하지 마시기를.
2. 형식의 번역, 번역의 형식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나
나의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당신
텍스트의 당신은 텍스트의 나
당신의 나는 텍스트의 텍스트
텍스트의 나는 텍스트의 당신
당신의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당신은 텍스트의 텍스트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1 - 사랑하는 당신께>
이 시와 대면한 번역가는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번역에서 ‘형식’(forme)이라는 문제 전반을 들추어내면서도 결국 다른 걸 궁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러 문제적이다. 사실 이 글과 마주하여 우리는 번역에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자칫, 이 글을 반듯하게 제시해주는 ‘박스’(틀)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 난점이 있다. ‘박스’를 그냥 버리자니 원문의 구속력이 만만찮아 보이고, 그대로 옮겨보자고 결심해 놓으니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아 보여, 정복이 불가능한 산에라도 오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번역가라면 받게 될지도 모른다. 정형시 번역의 문제들이 줄줄이 딸려 나오는 가운데 시와 시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번역에서 ‘형식’이 껴안고 있는 생태적인 함정들이 제 몸을 드러내는 것도 바로 여기이다.
흔히들 말한다. 시 번역은 자유시(산문시를 포함한) 번역과 정형시 번역으로 나뉠 수 있으며, 후자에는 고려해야할 사항이 최소한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시 번역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노라고. 이렇게 해서 소급되는 논리의 중심에 시의 ‘번역불가능성’이라는 담론이 자리하고 있다면, 시의 번역불가능성을 진득하니 불가능성 속에 가두어두고자 어깃장을 놓을 때 시 번역을 둘러싼 논의들은 대부분 난센스로 귀결되고 만다.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의 시가 유럽전반에서 일으킨 파장을 언급하기에 앞서서 시 번역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거개의 견해들을 옥타비오 파스는 비꼬는 뉘앙스로 이렇게 말한다.
번역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최대의 비관론은 시에 집중되어 왔는데, 각종 서양 언어로 된 걸작 시들의 다수가 번역이고 그 번역시들의 다수는 또한 위대한 시인들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희한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걸작의 시들의 다수가 번역”이라는 말의 진의를 따져 보기도 전에 “최대의 비관론” 편에 서서 번역불가능성을 거들먹거리며 원본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에게 시는 형식과 음성의 조화, 음절의 규칙성에 의거해 탄생한 산물일 뿐이다. 원문의 규칙적인 음절수가 아름다움과 순수, 시의 작법과 원리를 간직한 비밀스런 열쇄일 거라 생각한 번역가는 한 걸음 나아가 제 손으로 이것을 열어보려는 수고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며, 번역가로써의 제 임무를 다짐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이트킨트가 “운문은 오로지 운문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번역해만 한다”라고 주장할 때, 그러나 정작 번역에서 의미와 형태가 결합하며 만들어낸 가치를 살펴보는 작업은 오로지 원문의 미적 효과, 예컨대 각운의 배치, 음절수의 규칙성 따위를 그대로 옮겨오는 이상적인 제안 속에 파묻혀버리고 만다. 형식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운문의 운문으로의 번역’을 성공적으로 해내었다는 안도감이지, 시를 옮겨보겠다는 모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음절의 규칙성이나 시를 가두고 있는 ‘박스’의 견고함도 한 몫 거들겠지만, 이것을 옮겨오는 게 과연 제 임무인지를 반문해보려는 비판적 저항감이 번역가를 그대로 놔두지도 않는다. 형식을 옮겨오는 데 집착한 번역가에게 중요한 것이 규칙적인 율격, 즉 시의 살점을 덜어낸 후 텅 빈 채 남겨진 앙상한 껍질이라면, 형식이 시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번역가의 직관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것은 오히려 껍질이 감싸고 있는 시의 속살을 번역에서 담아내어야 한다는 비판정신이다.
이 때 번역가가 포착해내고자 하는 이 살점은 ‘의미의 단위’를 구축해내는 통사의 운용이며, 이것을 옮겨보고자 할 때 비로소 시 번역을 꽁꽁 얽매고 있는 불가능성의 신화 중 일부가 빗장을 풀어 헤치기 시작한다. 운문을 가능하게 해주는 ‘외적 조건들’(율격이나 압운 등)이 시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번역의 성패 역시 운문 속에 존재하는 이 ‘외적 조건들’을 제외한 그 ‘나머지’를 파악하는 방식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니, 번역가는 운문의 성립조건인 형식적인 요소들을 제외하고 운문 속에 존재하고 있을 ‘또 다른 무엇’, 오히려 ‘운문의 비운문적인 요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그 무엇, 결국 운문이 시로 체현되게끔 부추기고 있는 무언가를 옮겨보려 고민할지도 모를 일이다. 운문일망정 일정 정도 형식을 빗겨나게 될 이 특수성이 ‘비운문적인 요소’들을 중심으로 형성될 거라고 번역가가 판단하기 시작하면 번역가는 심지어 시조 번역에서조차 율격보다는 의미생산의 경로를 옮겨보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별 어려움 없이 유추하기에 이른다. 숫자란 결국 ‘훈령(訓令)’, 즉 ‘메타’ 텍스트일 뿐, 시를 시로 옮겨보려는 번역가에게 실상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보들레르의 소네트가 소네트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시인 것은 아닌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번역에서 의미생산의 통로를 짚어내고 이것을 다시 쪼개어 언어의 살점을 보듬어보고자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조작에 착수하기 시작하면 이 때 번역가는 더 이상 언어전달자가 아니다. 이 사람은 바로 시인이다.
3. 번역의 심비구시(心非口是)
‘형식’을 고수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시 번역에서 예상 외로 교묘하고도 끈덕지게 작동한다. 김민정의 시 제목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과 마주하여 이론에 경도된 번역가라면 이게 뭘 뜻하는지를 채 헤아려보기도 전에 야콥슨이 ‘유음중첩’(paranomase)이라고 말한 현상, 즉 단어가 “선택의 축을 결합의 축으로 동시에 투사하는 원칙”이나 ‘시적 기능’을 떠올려 보고는 내친 김에 유머를 동반하는 이 효과를 옮길 채비를 꾸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되도 않게 유음중첩현상을 ‘그대로’ 전사(轉寫)해보고자 억지를 부린 이 번역가는 다음과 같은 작품과 맞닥뜨리게 되면 보다 착잡한 심정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제가 다니던 삼선 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은숙(恩淑)이, 애숙(愛淑)이, 양숙(良淑)이 현숙(賢淑)이, 경숙(京淑)이 남숙(南淑)이, 난숙(蘭淑)이, 미숙(美淑)이, 정숙(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 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 데로 이사 갔답니다
난숙이는 청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권혁웅, <쑥대머리>
한자로 된 고유명사의 속뜻을 풀어대어 여학생들과 얽혀 있는 소실적의 기억을 단출한 이야기 형식으로 유머러스하게 빗어대고 있는 권혁웅의 이 작품은 번역에서 형식을 고집하는 이론가들을 적잖이 곤혹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한다. 유사성의 원리에 기초한 “선택의 축”을 인접성을 바탕으로 한 “결합의 축”에다가 “동시에 투사하는” 방식에서조차 이 시는 야콥슨이 말한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환유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사, ‘恩 = 믿음’, ‘愛 = 사랑’, ‘良/賢 = 현명’, ‘京 = 서울’, ‘南 = 지방’, ‘蘭 = 청초’, ‘美 = 아름다움’, ‘貞 = 절개’라는 의미망을 그려본 후, 이것을 응용하여 가령 ‘Lovely’나 ‘Confidency’같은 단어를 지어 이름처럼 가장해 놓은 다음, 제 응용의 산물 앞에다가 어쭙잖게 ‘Miss’ 따위를 덧붙여 은근히 성공을 자부해 본들, 번역가를 괴롭히는 딜레마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번역가는 심비구시(心非口是), 즉 ‘마음은 아니면서 입은 그렇다’고 해야만 하는 제 처지를 번역불가능성의 탓으로 돌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시는 그것조차도 변변히 가능하지 않게 끔 오히려 다른 것을 좀 고안해보라고 시인이 일부러 주문하고 있는 인상마저 풍긴다. 번역은 유머의 진원지인 ‘동사’를 적절히 찾아내고, 동사의 환유적 기능에서 착안하여 고유명사를 다시 구성해보는, ‘마음이 그렇다고 하는 지점에서 입을 맞추어 보는’ 역(逆) 번역의 수순을 통해서 번역가능성을 잠시 타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번역가를 괴롭히는 ‘심비구시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하나를 더 꼽아보자.
아래 제시한 작품은 ‘구어’에 근접한 ‘서면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20세기 초, 중국전통의 ‘문언문(文言文)’을 당시 서양에서 밀려오던 ‘근대적 감수성’을 표현해낼 수 없는 사어(死語)로 치부한 신문학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던 자우위안런(趙元任)이 ‘백화문(白話文)’을 그 대안삼아 활용하는 과정에서 선보인 <시씨식사사'(施氏食獅史)>의 전문이다.
<施氏食獅史>
石室詩士施氏, 嗜獅, 誓食十獅。
氏時時適市視獅。
十時, 適十獅適市。
是時, 適施氏適市。
氏視是十獅, 恃矢勢, 使是十獅逝世。
氏拾是十獅屍, 適石室。
石室濕, 氏使侍拭石室。
石室拭, 氏始試食是十獅。
食時, 始識是十獅, 實十石獅屍。
試釋是事。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작품의 병음(竝音)은 아래와 같다.
<Shī Shì shí shī shǐ>
Shíshì shīshì Shī Shì, shì shī, shì shí shí shī.
Shì shíshí shì shì shì shī.
Shí shí, shì shí shī shì shì.
Shì shí, shì Shī Shì shì shì.
Shì shì shì shí shī, shì shì shì, shǐ shì shí shī shìshì
Shì shí shì shí shī shī, shì shíshì.
Shíshì shī, Shì shǐ shì shì shíshì.
Shíshì shì, Shì shǐ shì shí shì shí shī.
Shí shí, shǐ shì shì shí shī, shí shí shí shī shī.
Shì shì shì shì.
높낮이와 강세의 차이가 있긴 해도 발음상 모두 [shi]로 읽히는 이 작품은 번역불가능성의 컴컴한 터널 안으로 번역가의 등을 떠밀기에 만족할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듯하다. 음성의 조작을 통한 원문의 말장난을 제 번역에서 살려보려면 번역가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음성의 장난스런 효과를 그대로 보존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렇게 하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시의 번역불가능성 담론에서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음성조작의 경우, 도착어에서 음성의 등가물을 찾아내어야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함정일 수 있다. 성공한 번역으로 간주되려면 원문과 완전히 다른 음성구조를 지닌다 해도 번역에서는 도착어의 운용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음성 ‘외’의 요소들을 한꺼번에 조작해야만 한다. 예컨대 원문에서 발생한 이 유별난 효과를 번역에서 살려내는 길은, 비록 음성이 그 문제의 진원지라고 하여도, 그러나 음성의 조작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 작품에서 배열된 음성들조차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shi]로 읽히는 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높낮이와 강세가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실상 동일하게 읽힌다 해도 각각의 음소가 지니는 ‘가치’(valeur)가 작품 속에서 항상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가 음소 각각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이지, 음소가 시 안에서 제 항구적인 성질을 관철시키는 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시 전체(‘디스쿠르’의 다름 아닌)를 고려하여 근사치의 효과를 산출해보는 ‘창조적’ 방법 외에, 번역가에게 남겨진 해결책은 따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번역가능성은 유음중첩현상의 언저리에서 살아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머를 이끌어내는 가두리, 즉 문화적 힘과 풍자의 고리를 통째로 옮겨보려는 번역가의 노력에 의해 열리게 된다. 심지어 음성조작의 효과를 제거한 후 완전히 색다른 방식을 채택한 번역을 우리가 목전에 두게 되었다 하더라도, 원문과 전적으로 상반된 선택을 감행하였다고 이 번역을 단죄할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지적처럼 비록 시가 “늘 완벽하게 부정확한 작업으로 다시 쓰일 따름”이라 해도, 이 “부정확한 작업”이 반드시 번역에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원문의 전환을 제 기대치로 삼는 ‘동의어구’ 번역이 실현될 수 없는 이상적 가설일 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여기서 확인된다. 번역불가능성 담론이 활성화되는 데 일조한 쇼펜하우어의 또 다른 지적이다.
시는 번역할 수 없다. 시는 단지 바꿔 말할 수 있을 뿐이기에 항상 어색해진다.
이 지적은 번역불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 번역가에게 어떤 ‘단초’를 열어줄 화두에 더 가까워보인다. “단지 바꿔 말할 수 있을 뿐”임으로 인해서 오히려 원문에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거나 원문을 다양하게 해석해 볼 당위성이 번역가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황현산은 이 당위성에 대해, 매우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의 딜레마는 곧장 번역의 딜레마로 통한다. 번역의 대상이 텍스트이건 문화이건 번역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또다른 어떤 것”이지만 번역이 요구되는 지점도 바로 이 ‘어떤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어떤 것’은 한 문화의 맥락과 모국어의 육질 속에서 아우라를 지니지만, 그만큼 그 맥락과 육질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사실이며, 그것을 다른 언어로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일이다.
바로 이 “다른 언어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바탕으로 번역가는,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원문의 저 “순수언어”, “행간마다 잠재해있는” “시의 신비한 본질”을 옮겨오려고 도전장을 내밀게 되는 것이다.
4. 행갈이가 파놓은 지뢰밭에서
면박을 주는 주모
허름한 인생들을 받아 낸 그녀의 욕설에는
힘이 있다 야생동물 같은
신문지를 말아 쥐고 주모가 다가가자
부리나케 달아나는 거미의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동자
장경린, <몽유도원도 17>
외형상 단 한 줄에 해당하는 시구가 행갈이의 탄력을 지렛대 삼아 문법의 범주를 파괴할게 될 때, 대게 서술구조가 틀어지거나 기호의 단일한 속성이 다양한 의미의 변주로 거듭나게 된다. 이 때 작품 고유의 특수성도 제 문을 살며시 열어 보인다. 하지만 행갈이에서 울려나오는 아포리아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며 번역가가 “거미”가 아니라 “거미의”이라고 적혀있음에 당혹스러워하거나 “신문지”가 “야생동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기 시작하는 순간, 번역가는 난해함의 지뢰밭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기형도, <오래된 書籍>
나란히 앞뒤 행으로 미끄러지면서 한 단어의 품사를 둘 이상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단 한 줄일 수도 있는” 저 행갈이는 단일한 문법체계를 파괴하는 “읽을 수 없는 문장들”(기형도, <물 속의 사막>)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시인의 전략이다. 그것이 전략인 까닭은 이것을 옮겨 오는 일이 시구 한 줄을 벗어나 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거니와 충분한 외국어 이해능력을 갖춘 번역가가 비평적인 능력, 즉 아포리아의 아우라를 번역에서 담아낼 자질을 겸비했는지 여부를 살펴볼 좋은 예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학번역에서는 ‘언어상의 오류’나 ‘번역상의 오류’ 못지않게 ‘비평의 오류’가 제 성공여부의 목줄을 단단히 쥐고 있으니까. 해서, 번역가는 “피어나는”을 한 단어로 번역하여, 행갈이가 만들어 놓은 복합적인 의미를 문법의 고정된 틀에 가두어 버리는 대신, 두 번째 등장하는 “나는”을 ‘강조형’으로 처리하여 행 앞에다 빼내어 본 후 얻는 것과 잃는 것을 차근차근 헤아리며 조심스레 지뢰밭을 건너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산이 하나 있었다 펼쳐졌을 때 창피한
뙤약볕 아래 우산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해변에
인파 속에서 옷이 벗겨졌다 우산에 얼굴만 가려진 채
어린애가 뭐가 부끄럽냐고
새엄마는 내가 얼마나 조숙한 앤지 몰랐다
김이듬, <태양 아래 헐벗고>
“창피한”이나 “해변에” 같은 글귀를 제대로 해석해내기에는 행갈이의 탄력을 받아 생겨난 중의성이 역시나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번역가는 시인이 배열한 이 ‘망설임’의 언어를 제 번역에서 담아내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다. 아니, 이러한 난점은 오히려 번역가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번역가의 과제”(벤야민)란 시의 아포리아를 더듬거리면서(실은 눈이 빠질 정도로 읽고, 뒤지고, 분석하면서) 그것을 번역의 아포리아로 고스란히 살려내는 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제 모국어를 뒤틀어 쥐어짜게 되더라도 말이다. 이 때 원문이 머금고 있는 애매함은 번역가에게는 특수성 그 자체이며, 번역가의 시선에 포착된 이 아포리아는 시를 읽어내는 그의 비평 능력을 통해서 부활하게 된다. 물론 번역가가 주목해야하는 중의성의 아포리아는 비단 행갈이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내 혀를 잘라 먹으며 똥구멍을 과도하게 벌리는 바람에 통쾌하게 어릴 적을 떠올린다 나는 발가벗겨진 채 죽은 지 오래되어 나는 흰 티셔츠를 찾아 커다란 옷장 안에서 나는 어딨어?
김이듬, <망한 정신병원 자리에 마리 수선점을 개업하기 전날 밤>
이 시가 빚어낸 문장의 저 혼란스러운 배치는(혹은, 저 혼란스러운 문장의 배치는) 행갈이와는 무관함에도, 애매함을 곧잘 만들어낸다. 이 애매함은 김이듬의 시 전반에서 목격되는 ‘복수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나 버젓이 경계를 나누는 이분법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고스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이분법의 견고함을 뒤흔들고자 시인이 꿈꾸듯 표출한 언어에 가깝다. 앞뒤가 맞지 않은 덜 여문 시라고 여기는 대신, 여기서 번역가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실과 평행선을 그은듯하면서도 현실을 달리 늘어놓는 저 천연덕스런 알레고리, 현실에다가 기어이 불안과 공포의 범선을 띄우고야 마는 문장의 배열일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주었다. 귀머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에 목을이 달렸다 라미가 을의 생존을 물었고 분홍귀가 욜을 불러냈다 아슬이 나무의 우유 방울을 약속했고 동화는 저녁에 읽지 않기로 는의 손목을 잘랐다 라미는 투명을 흔들던 기괴한 한(寒)이 되었고
김경주,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 ― 베리에게>
우리말의 주격, 목적격 조사를 목적보어 삼아 낯선 문장들을 토해내는 이 글을 옮겨오고자 할 때 번역가는 십중팔구 제 능력을 탓하거나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오, 미안. 어쩌면 방법이 있을 수도. 그리하여 조동사의 일인칭 변화형(프랑스어의 경우)을 이용해보거나 전치사나 실사 따위를 생뚱맞게 배치해 이 난해함을 해결해보려 시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보다 중요한 것은 위 텍스트가 ‘번역적 의식’ 안에 사로잡히는 바로 그 순간, 시의 아포리아가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이게 바로 번역의 힘이다. 한국어의 권위를 해체해보이려는 저 야심, 시인의 작품에서 고르게 목격되는 메타언어의 사용, 혹은 번번이 호응을 빗나가는 문장의 배치는, 비트겐슈타인이 옳게 지적한 것처럼, 응당 요구될 법한 지점에서 불현듯 접속사를 생략해 버릴 때 야기되곤 하는 혼란이자, 번역가의 의식 속에 오래 머무를수록 새로운 고민거리들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의 게토이다. 문법의 사다리를 무턱대고 오르거나 또 내려가기를 서두르지 않아 아래로 굴러 떨어질 가능성을 줄여보려 애쓰는 번역가는 김경주가 배배 꼬아놓은 언어운용의 전략 한 가운데를 과감히 파고드는 인파이터일 수밖에 없다.
[...] 나는그녀에게다가오는그림자였고그녀도내가보지못한그림자를가진채누워있었다아이는울지 않았다나는그아이를안고내방으로천천히걸었다그녀가손을뻗어잠깐동안무엇인가알수 없는알타이어를중얼거렸지만이윽고그녀는조용히벽에비친내그림자만만지고있었다.
김경주, <비정성시(非情聖市)>
띄어쓰기(붙여쓰기)의 전략 역시 번역에서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구(字句)를 모두 붙여 적었지만 종결어미 ‘~다’의 속성 덕에 문장 간의 경계가 한국어에서는 비교적 용이하게 드러난다고 해도, 정작 번역가를 당혹하게 만드는 건 “울지 않았다”와 “알수 없는”처럼 시인이 그 안에다 한 번 더 설치해 놓은 이중의 장치이다. 이러한 난점, 즉 번역가가 이 아포리아의 발작을 제 번역에서 드러내고자 텍스트를 붙잡고 힘겹게 버둥거릴수록 번역은 ‘시의 힘’을 옮겨보는 실험에 가까워진다.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바로 그 지점에 번역의 가치도 함께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5. 문화적 ‘낯섦’의 아포리아
江邊살자, 江邊엔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가 있다 組暴
水準의 兒孩들만 쇠파이프 들고
사시미칼 들고
娼女에게서도 奸婦에게서도
그리고 少女에게서도 나는
그저 그저 엄마야
김영승, <엄마야 누나야>
우리가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아련한 상처와 폭력문화의 섬뜩함이 모순어법(oxymoron)의 형태로 이접(異接)되어 있기 때문에만 이 작품이 번역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 “누나”라는 칭호에서 풍겨 나온 애잔함이 “조폭”과 “창녀”라는 폭력적이면서도 비루한 이미지와 충돌하는 지점을 만들어내고, 거기에다가 우리의 습속과 기억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 치하의 아련함을 불러내 패러디 형식으로 얹어 놓은 형국이니, 이 글을 마주한 번역가의 심정은 좀 복잡할 것이다.
이 시는 항간에 논쟁거리로 등장하곤 하는 ‘번역윤리’를 둘러싼 거개의 문제들이 문화적 차이를 바라보는 번역가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면서, 번역의 아포리아를 낳는다. 고유문화의 번역 문제는 번역가의 모국어에서 합당한 ‘등가물’을 찾아내야한다는 주장(나이다, 혹은 그의 아류들)에서 ‘자민족중심주의’ 번역에 대한 질타(앙리 메쇼닉, 앙투완 베르만)에 이르기까지 그간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원문이 간직하고 있는 문화적 ‘낯섦’을 최대한 존중하여 옮겨보려는 번역가를 독자의 수용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하면서 이 낯선 문화를 텍스트의 ‘곁’(para)으로 밀어내야한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독자들은 우리의 염려와는 반대로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이렇게 말해보자. 개항(開港)이라는 저 혼란기에 성서번역이나 문학번역이 이 땅에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흡수되었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식민지 개척의 사명감에 충만한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고취되어 이루어낸, 광란어린 행위로 치부해버리기엔 우리 측의 흡인력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파장의 짙은 그림자가 너무나 자주 얼씬 거린다. 또한 조선 중인들의 정치적 신념과 계몽의 의지 때문에만 문학번역이 저 찬란한 빛을 발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 우리말을 고안해낼 수단이자 통로가 바로 번역이었던 것처럼 ‘낯선 것’을 마주한 독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나이브’하지 않다. 아니 독자들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낯선 것에 탄력적이고 성기게 대응한다. 독자들의 수용력과 그들이 활보하고 있는 문화지평은 이론가들의 우려 속에 매몰될 만큼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번역가들이여! 낯섦 때문에 가독성이 사라질 거라 너무 염려 말고, 이 낯섦의 아포리아를 그대로 옮겨보려 힘써볼 지어다. “언어들 상호 간의 낯섦과 전격적으로 대결하는 일종의 잠정적인 방식”을 한번 고안해볼 지어다. 허수경의 아래 시 역시 우리 언어의 낯섦을 등가어로 대치하거나 에두른 설명이나 불필요한 첨언을 통해 완전히 풀어내어야만 한다는 학자들의 섣부른 주장을 뒷받침하는 알리바이로 충분해 보인다.
기다림이사 천년 같제 날이 저물셰라 강바람 눈에 그
리메지며 귓불 불콰하게 망경산 오르면 잇몸 드러내고
휘모리로 감겨가는 물결아 지겹도록 정이 든 고향 찾아
올 이 없는 고향
문디 같아 반푼이 같아서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
주막이라도 차릴거나
승냥이와 싸우다 온 이녁들 살붙이보다 헌칠한 이녁
들
거두어나지고
밤꽃처럼 후두둑 피러나지고
허수경, <진주 저물녘>
번역가에게 토속어나 사투리만큼 곤혹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가 없다 손치더라도, 또 외국 독자들이 이 시의 사투리가 뿜어내는 감칠맛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도착어에 종속시키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사투리를 번역해보려는 시도가 반드시 불경스러운 오해를 빗어내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번역가는 제가 부리려는 언어에서 이 사투리와 토속어에 상응하는 가치를 찾아내어야만 할 것이다. 아니 이 경우, 번역가는 오히려 제 모국어에서 새로운 어휘를 ‘발명’해내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 필요성에 대해 루돌프 판비츠는 이렇게 말한다.
번역가의 근본적인 잘못은 외국어의 강한 충동에 자기 언어를 맡기는 대신, 자기 언어의 우발적인 상태를 고수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번역가가 자신의 언어와 아주 멀리 떨어진 언어로부터 번역을 할 때는, 언어 자체의 근본 요소로까지, 말과 이미지와 성조(聲調)가 합류하는 그곳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외국어에 힘입어 자기 언어를 확장하고 심화시켜야 한다.
“자기 언어의 우발적인 상태”에서 번역자의 모국어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이 번역의 ‘창조적 성격’은 그러나 원문을 완전히 벗어나 번역가가 마구 지어낸 언어의 유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번역의 창조성은 메쇼닉이 적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원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언어활동의 최대치의 주체성”을 찾아내는 작업의 다름 아니다. 시 번역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관계, 현대성, 신어(新語)생성의 정착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까닭도, 번역이 ‘닫힌 언어’나 완결된 ‘도착점’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언어활동이자 제 언어를 보다 풍요롭게 가꾸고 경직성에서 해방시킬 새로운 출발점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번역자는 생리상 새로운 표현을 창안할 수밖에 없는 비평가이자 창조자인 것이다. 문화적으로 역방향의 문제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래의 시는 새로워 보이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다.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빼고, 오디오의 플러그를 빼고, 가습기의 플러그를 빼고, 스탠드의 플러그를 빼고, 냉장고의 플러그를 한 번 더 꽂고, 커피메이커의 플러그를 빼고, 컴퓨터 옆에 꽂혀 있던 나의 플러그도 빼고, 사방의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들을 확인하고, 천장의 전등들을 올려다보고, 실내 온도 조절기의 버튼을 바꾸어 누르고, 가스 레인지의 중간 밸브를 확인하고, 앞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뒤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거실의 창을 닫고, 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을 닫고, 이중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 위로 블라인드를 내리고, [......] 가방을 들다 외출 시스템으 입력 오류를 범한 것을 인식하고,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이원, <사이보그 1 - 외출 프로그램>
여기에 제시된 어휘들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번역과 마주하게 되면 조금은 당황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문제가 여기서 불거져 나온다. “텔레비전”, “플러그”, “오디오”, “커피메이커”, “컴퓨터”, “가스 레인지”, “벨브”, “베란다”, “블라인드”는 분명 외래어라고 불리기에는 지나치게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이다. 그러나 외국 것을 음차해온 단어들이라는 평범한 사실이 번역에서는 미묘한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저명한 영국 시인이 우리 문화의 낯섦을 영어로 멋 부려 “I like Ondol”이라고 적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 문장을 “나는 온돌이 좋아”라고 옮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또 대부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시인이 ‘상습적’(?)으로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경우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혼성어’임이 분명한 “재부팅”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가 “re-booting”으로 번역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네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가는 차들의 광속 너머로
붉은 머리를 치켜든 라이트 사이로
너는 뛰어간다
네게는 무대도 코러스도 없다
하재연, <고속도로 위에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재연의 시가 뿜어내는 ‘속도감’이나 ‘촉각성’도 번역가에게 당혹감을 주기는 매한가지이다. 그저 ‘불빛’이 될 수도 있을 것을 “라이트”로, ‘합창’을 “코러스”라고 한 까닭은 물론 시인이 어설픈 외래어 예찬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외래어의 의도적 사용, 더구나 천연덕스럽게 툭툭 튀어나오는 이 외래어들은 시각적인 속도감과 청각적인 울림을 독특한 방식으로 체현해 내는 시인 고유의 언어운용이다.
미드나잇 트레인을 타고
네가 사는 꿈의 나라로
하재연, <미드나잇 트레인>
‘한 밤의 기차’ 대신 등장한 “미드나잇 트레인”도 번역가의 눈에는 같은 맥락 속에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영어번역이 단순하게 “midnight train”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번역가가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번역가의 머릿속에는 보다 복잡한 함수들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어찌 알겠는가?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의 기념비적인 재즈앨범『Midnight Train』이나 일본의 옛 그룹 오토코구미가 아라시도 콘서트에서 선보였던 「midnight train」을 반복하여 청하면서 시인이 “네가 사는 꿈의 나라로” 가고 있는지.
외국어의 낯선 배치는 경우에 따라 패러디와 결합하면서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젊은 날에 대한 자괴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폭로하는 기재가 되기도 한다.
혁명이 뭐겠어. 우리 결혼할래.
헬로와 헬로와 꽃들이, 헬로와 헬로와 우리들에게,
청첩을 돌린다면, 너와 나의 결합.
오래된 진리와 형체 없는 유행의 결합.
내 삶은 recycled life. 폐기해줘. 철폐해줘.
모든 법칙들을, 모든 용기를, 사랑의 만용을.
질풍노도의 시대. 그 시대의 아들이.
헤이 걸. 큰 젖을 가진 아가씨. 날 위해 울어줘.
이봐. 웨이트리스. 천 하나 더.
장석원,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
70-80년대를 풍미했던 장미화의 노래 <봄이 오면>의 한 구절 ‘헬로와 헬로와’의 등장을 목도하고는 ‘제길 헐’을 내뱉는 번역가는 낯섦과 마주하여 최소한의 망설임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의식을 갖춘 번역가일 소지가 농후하다. 프랑스어나 독일어라면 모면할 수 있는 거개의 문제들이 영어번역에서는 제 아포리아를 뿜어내고 만다. “내 삶은 recycled life” 같은 표현이 “My life is recycled life”로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 보이는 만큼, 시에 등장하는 또 다른 외국어 표현들이 “hello-A hello-A”(가사집에 수록된 것처럼)나 ‘waitress’라는 번역으로 충족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뻔해 보인다. 시인의 신산스런 과거 체험이 혁명의 대척점에 위치한 싸구려 술집과 천박한 유행가가 뿜어낸 이미지와 뒤엉켜, 단어 마디마디마다 감정의 골을 한층 깊게 파버렸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한 외국어의 번역 가능성은, 때문에 구어식 명령으로 표현된 “천 하나 더”(1000 CC가 아니라)나 퇴폐 속에 잦아든 절망감의 표현일 “큰 젖을 가진 아가씨”와의 연관 속에서 한껏 제 폭을 넓히고 만다.
6. 오오, 성스러운 일상이여!
시 번역을 신봉하던 나보코프는 1954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발표한, 발표라고 하기에는 좀 길어 보이는 글「번역의 난관 영어판『오네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자세한 각주가 달린 번역을 하고 싶다. 이 주석들은 마치 마천루처럼 이런 저런 페이지의 꼭대기까지 닿아서, 행 하나의 번득임만이 주석과 불멸 사이에 남게 될 것이다. 난 골자를 빼버리거나 군말을 붙이는 어떠한 행위도 가미되어 있지 않은, 그와 같은 각주들과 절대적인 축자적 의미를 원한다.
나보코프의 이 충고에 한껏 고무된 번역가는 문화적 낯섦이나 외래어 차용에서 비롯된 이질감 따위를 단박에 해소할 대안으로 ‘주석’을 꼽아보고선 흐뭇해하며 웃음을 머금을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권혁웅,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여기까지 읽은 번역가는 ‘이 정도라면 주석을 동원해 처리할 수 있겠군’하곤 안도감에 젖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시집을 한두 장 넘기게 되면 차츰 제가 기대어본 주석이라는 해결책이 유효할까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시집을 끝까지 읽어 본 후에는 결국 아수라장으로 범벅되고 만 자신의 번역기획을 완전히 수정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오방떡, 짱가, 그랜다이저, 애마부인, 안소영, 외팔이, 오수비, 청마(靑馬), 김부선, 권상우, 장승화, 김호진, 진주희, 변강쇠, 정인엽, 미키 마우스,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 아수라 백작, 헬 박사, 브로켄 백작, 헐크, 육백만불의 사나이, 시인과 촌장, 선우일란, 밤으로의 긴 여로, 독수리 오형제, 김완선, 겔포스, 무궁화 빨래비누, 데이트 세숫비누, 돌아온 외팔이, 소림사 지주승, 당랑권과 호권과 취권, 삼선교 칠공주, 괴수대백과사전, 용가리, 대왕오징어, 이미숙, 이대근, 뽕, 내사랑 유자 씨, 죽(竹)부인, 황금박쥐, 고스톱, 등등과 맞닥뜨리게 된 번역가는 그제야 시집 전체를 뒤발하고 있는 이 고유명사의 원뜻이 ‘특정한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부르기 위하여 고유의 기호를 붙인 이름’이라는 걸 새삼스레 떠올려 보고는 이 고유성이 파놓은 번역의 함정과 아포리아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될 것이다. 끈기 있는 번역가라면 고유명사가 머금고 있는 문화적 파장과 속성, 나아가 시인이 고유명사를 전략적으로 배치한 까닭을 캐물으러 시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번역가는 서로 다른 문학공간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작업이 난항을 겪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독특한 형태의 문화적 ‘각인’들이 보란 듯이 제 공간에서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번역가가 번역을 통해 서로 다른 문학공간을 성공적으로 매개하기 위해서는 이미 한물 건너간 이 대중문화의 패러디가 최소한 시인 연배의 사람들에게는 아래와 같이, 실소를 자아내고 마는 문화적 배경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릴 능력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평화로운 남해 해상. 갑자기 바다 속에서 괴수가 출현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공룡의 후예일 수도 있고, 방사능 오염으로 거대화된 미지의 생물일 수도 있다. 하여간에, 괴수가 출현한다면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약속. 괴수는 선박을 파괴하고 육지로 올라온다. 마침 그곳에는 국가의 중요한 동력 자원인 발전소가 있고, 괴수는 발전소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전력의 공급이 끊어지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한국. 즉각 군이 출동해 괴수를 막아보려 하지만 탱크와 전투기의 합동 공격에도 괴수는 꿈쩍하지 않는다. 괴수의 앞에는 오로지 파괴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 갑자기 서해와 동해에도 괴수가 출현한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도 하나의 약속. 괴수들은 불을 뿜고, 도시를 파괴하며 서울을 향해 모여든다. 그 와중에 괴수가 알을 깐다. 괴수의 알을 발견한 군은 즉각 전투기를 출격시켜 괴수의 알을 폭격한다. 한국연구소의 김박사는 “안돼, 그러면 안 돼!”라며 말리지만 결국 괴수의 알은 모두 파괴된다. 파괴된 자신의 알들을 보며 괴수는 눈물을 흘리고, 우워어어~ 복수의 집념이 가득한 괴성을 지르며 인간과 도시를 철저히 파괴히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도—괴수가 코앞에 서 있고, 본사에선 “빨리 대피하게, 빨리!”를 외치는데도 혼자 숙직실에 남아 “흑흑~ 사장님, 저는 최후의 순간까지 회사를 사수하겠습니다! 으악!”하고 괴수에게 밟혀 죽는 공장장과, 제작비 절감을 위해—괴수의 알이 터진 장면을 실제 프라이팬 위의 계란 프라이 클로즈업으로 깔끔하게 처리해준 그 영화의 감독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번역에서 수용되기에 낯설어 보이는 문화적 표현들은 특수한 역사적 체험이나 섬뜩한 억압의 기억,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나 빈궁함의 두려움 따위를 함유하고 있게 마련이다. 이 때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여 번역에 임해야한다는 평범한 전언은 실상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것을 번역가에게 생각해보라는 충고라는 측면에서 평범하지만은 않은 주문이 되어버린다. 이야기되지 않는 것의 저편에, 시가 탄생하는 장소인 시인의 문화적 무의식 속에, 떠돌아다니는 번역의 ‘침묵’과 아포리아가 함께 있다. 이 아포리아는 시인의 다른 작품들 속에, 혹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번역가는 시인이 자신의 문화적 무의식을 덜어내면서 우리에게 맛 보여준 환희와 고통을 번역 불가능성으로 환원하지 말아야 할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자명해 보이더라도 결국 “번역이 불가능했던 지점들은 역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문화적 효과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번역불가능성이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것(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 표현될 수 없는 것, 신비한 것, 천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을 1982년, 동아 완전정복에서 만났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그는 외쳤으나 연합군 가운데는 산을 넘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연합고사를 목전에 두고, 고지가 바로 저긴데, 친구 여섯이 낙오했다
권혁웅, <나폴레옹 이야기>
권혁웅의 시는 대중문화와 세대의 특수성을 패러디로 되감아내면서 번역에서 새로운 지점들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번역을 패러디의 또 다른 형식이자, 말을 뒤틀고, 언어의 불한정한 면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위대한 문화적 행위로 간주한 보르헤스의 지적을 떠올리게 한다. 탁월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보르헤스가『돈키호테』의 패러디의 천재성을 언급했다면, 범속하다고 할 일상문화에 대한 권혁웅의 패러디는 자신의 과거와 기억을 돌아보고자 시도한 “약전”(略傳)의 기술방식이자, 흔히 동의어로 여기곤 하는 진부함과는 전혀 다른 ‘일상성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아포리아를 만들어내는 원천으로 자리 잡는다. 이 “약전”의 기술방식을 번역에서 담아내고자 할 때, 번역가는 일상적이라는 말에 따라붙기 마련인 ‘쉬울 것’이라는 편견을 결국 시험대에 오르게 한다. 즉, ‘낯섦’(l'étranger)이 시련을 겪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권혁웅의 작품을 번역하고자 할 때 과도하게 따라붙을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주석은, 그러나 제 횟수를 늘려가는 만큼 아포리아를 아포리즘으로 치환해버릴 위험성을 동반하게 되는 ‘필요악’인 것이다.
7. 창조적 힘, 번역의 아포리아
당신은 쟝 쟝 쟝이라고 말하지 나는 쟝이 아닌데 당신의 그 알량한 쟝 때문에 온 새벽을 잉잉 질투로 몸서리치는데 당신은 그저 쟝 쟝 쟝뿐이지 나는 털끝만큼도 쟝이 아닌데! 빌어먹을 프랑스 놈, 오 메흐드 메흐드!
황병승, <프랑스 이모>
시의 번역은 ‘뜻’을 옮겨오는 일을 포기하지 않지만 시가 언어의 현란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연출하는 스펙터클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때로는 관념이나 의미보다는 리듬(메쇼닉)이나 ‘문자’(베르만)라고 불러도 좋을, 텍스트를 특수하게 얽어내는 물질적인 경로를 가져와야만 하는, 좀처럼 쉬이 풀릴 것 같지 않은 아포리아의 사막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이 공간이 그리 갑갑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번역의 단위를 음성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문장의 조직’을 의미하는 ‘디스쿠르’ 차원으로 옮겨와 고민해 볼 때, 실패를 예견하는 번역불가능성이 번역가에게 다양한 해석과 새로운 시도를 허용해주는 번역가능성으로 차츰 바뀌어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창조적인,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시를 쓴다는 것’(메쇼닉)의 다름 아니라 할, 시 번역의 본질적인 성격이 놓여있다. 번역은 시를 시답게 구성하는 요소들, 때에 따라 한 단어가 될 수도, 텍스트 전체가 될 수도 있는 지점들로 파고들어, 그것을 읽어내고, 다시 쓰는 작업인 것이다. ‘읽기-쓰기’의 일원론적 순환이 번역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시의 아포리아는 번역의 아포리즘으로 나락해 버린다.
시의 번역불가능성이 역설적으로 시 번역의 조건, 시의 아포리아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아포리아의 세계를 가늠해볼 가능성 자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시 번역은 불가능한 과업을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훔볼트의 지적처럼, 바로 시의 이 번역불가능한 속성으로 인하여 시는 계속 번역되는 것이며, 이 때 시의 번역불가능성이란 번역의 옮고 그름, 직역이나 의역, 오역이나 명역, 형식과 의미, 말과 사물이라는 이분법의 잣대에서 벗어나 텍스트의 특성 을 옮겨보고자 시도된 다양한 제안들의 믿을 만한 보증인이 된다. 시 번역에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할 합당하고도 당찬 이유가 바로 시의 번역불가능성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하여, 번역가가 아포리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매 순간,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아포리아의 연속이며, 이렇게 해서 시와 번역은 해석과 이해의 지평으로 수렴된 아포리즘을 거뜬히 거부하고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모더니티의 공간 속에 놓이게 된다. 시와 번역, 번역과 번역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이 바로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김수영을 번역하면서, 이상을 번역하면서, 황지우를 번역하면서, 외국의 “언어-문화”(메쇼닉)와 맞닥뜨리는 동시에, 시를 읽어내는 것 자체가 번역의 조건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의 “언어-문화”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시 번역에서 타자를 빌미로 내 것만을 확인해보는 작업은 타자를 잃을 뿐 아니라 결국 나도 함께 잃게 되는 첩경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의 지적을 하나 더 곱씹어보자.
산문분야에서조차, 가장 완벽에 가까운 번역이라 해도, 키를 바꾸어 악곡을 전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원문과 연결시킬 뿐이다. 음악가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안다. 모든 번역이 억지스럽고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죽은 문체가 되어 버리든지, 아니면 언어를 고수하는 제약에서 벗어남으로써 거짓말처럼 들리는 à peu près(그 부근, 혹은 그 정도)의 개념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번역된 서적들을 모아 도서관을 만든다면 모조품 그림(模畵)의 전시장을 방불케 할 것이다.
회의에 가득한 눈으로 번역을 바라보는 이 글은 역설적으로 원문에서 우리가 고수해야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에 그 의도에서 빗겨선 것이 분명한 또 다른 지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렇다. 비록 “억지스럽고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을 지언정, 번역에서는 단지 옮겨와야 할 것만이 있는 것이며, 옮겨와야 할 것을 파악할 힘이 늘 번역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번역은 다른 잣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번역은 충실성이라는 명분 아래 원문을 고집스레 베끼려 드는 모사(模寫)가 아닌 만큼, 수용 독자의 이해를 돕는 일에 눈멀어 가독성을 제 잣대로 번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을 쉬이 풀어대어야만 하는 서비스도 아니다. 번역은 텍스트의 특수성을 포착하는 언어행위이자 시의 아포리아를 번역의 아포리아로 되살려내려는 지난한 노력일 뿐이다. 시의 아포리아가 우리에게 중요한 까닭도, 최근 시에서 목격되는, 일관되지만 상이한 특성들이 우리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힘겨운 몸짓이라고 여겨지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월간 <현대시> 2009년 8월호에서
• 조재룡: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 1994년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2002년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석ㆍ박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비평』지에 평론을 내면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학과 번역 이론, 프랑스와 한국의 비교문학을 연구해왔으며, 저서로 『앙리 메쇼닉과 현대비평 : 시학ㆍ번역ㆍ주체』, 번역서로 『시학을 위하여 1』, 『앙리 메쇼닉 : 리듬의 시학을 위하여』, 『시학입문 : 문학이론에 접근하는 방법론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