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고구려 강토에 대한 연구는 중국에서 알려준 몇 개의 고구려성과 그들이 편의대로 왜곡한 지명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제 위성 탐색으로 고구려 모든 영토에 대한 자세한 탐사가 가능해졌으니 고구려 역사 연구 방법이 새로 개척되었다. 그 첫번째 성과로서 고구려 졸본성과 동명왕묘를 새로 찾아밝힌다.
고주몽은 광개토왕비문에서 비류수에 홀본성을 지어 건국하였고, 다음해 비류왕인 송양의 항복을 받고, 3년후에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궁궐을 지었는데, 이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졸본천의 졸본성이다.
졸본성은 주몽왕과 고국천왕, 고국원왕이 묻혔다. 고국원왕 때는 황성(黃城)이라고 했는데 눌현성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이는 누루 황(黃)의 우리말에서 비롯된다. 고국원왕이 황성으로 옮긴 후에, 고구려왕은 졸본부 행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전까지 졸본부 행차 기록이 없다.
수성왕갈석비문에서는 유리왕이 비류수의 위나암에 정도하며, 고주몽의 졸본부 황성은 천부(天府)라고 불렀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서 고려고국(高麗故國)으로 기록된 발해 압록부 서경성 녹주(綠州), <신당서(新唐書)>에서 신주(神州)로 기록된 것이 고국원왕이 천도하였던 황성이며, 본래 고주몽의 졸본성이다.
그런데 발해 압록부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遼河)인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환인현 오녀산성을 오늘까지 주몽왕의 졸본성으로 잘못 알아왔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서경성은 석성으로서 폭이 무려 20리(8km)였던 대성인데, 요나라 때 반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어서, 그 뒤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요동행부지>를 남긴 금나라 문사였던 왕적(王寂)이 심양시 북쪽 현재 개원시에 설치되었던 함평부에 가서, 하루는 부근에 굉장히 큰 성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가니 입구 마을 사람이 고구려 폐성이라는 했는데 직접 보니 성중에 함원전이 있고, (성을 세운 주몽이) 만세지계(萬世之計)을 세웠다가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강토를 도둑질 당하여 국파천년한(國破千年恨)을 왕적이 느낀 곳이었다.
금나라 왕적이 보았던 발해 신주, 고구려 천부였던 졸본성은 대체 개원시 어디에 있는가? 위성 사진으로 탐색한 결과 개원시 북쪽 창도현 천두진(泉頭鎭) 동쪽 소가둔(邵家屯)의 광대한 성터였다.
▲ 졸본부황룡성도
ⓒ 구자일
신주의 위치는 고구려, 발해의 압록강이었던 요하(遼河) 하구로부터 물길로 830리라고 <신당서>에 기록되었는데 천두진이 그 위치로서 대략 맞다. 일반 지도 상에는 천두진 동쪽에 소가둔이 표시되어있고, 그 남쪽에 황정자(黃頂子), 소가남구(巢家南溝)가 표현되어 있고, 그 남쪽에 초가구(肖家溝) 유원지가 있다.
▲ 개원시 창도현 일반지도
이를 위성으로 들여다보면 자세하게 고구려 졸본부 황성터가 보인다. 지도상의 천두는 고구려 천부나 발해 신주가 변한 말이다. “주”“두”의 발음은 구개음화 이전인 고대에 혼용되었다.
황정자는 황성의 변음이고, 소가둔(邵家屯)은 <수서>에서 소열제(昭列帝)라고 불렀던 고국원왕의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며 소가남구(巢家南溝)도 역시 고국원왕 이름인 쇠(釗)의 남쪽성이란 뜻이다. 또한 초가구는 소수림왕이 세운 초문사(肖門寺)에서 비롯된다. 이중에서 소가남구가 졸본부 성이다. 거기에 동북으로 황성이 보태졌다. 두 성은 합쳐서 폭이 대략 8km다. 성둘레는 20km 이상이다.
▲ 졸본성주변도
고주몽이 죽어, 용산에 묻혔는데, 그 동명묘가 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산 이름은 황룡산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주몽의 장지인 용산인 것이다. 황성 동남쪽에는 유리왕이 골천에 세웠던 이궁인 위원보산성이 있다. 골천은 지금의 구하(寇河)다.
동명왕묘 남쪽의 류가구는 금나라 문사 왕적이 신도비를 보러 놀러갔던 당나라 장수 류인공 7세손의 집이다. 그 바로 곁에 동명왕묘가 있었건만, 당시 왕적은 이를 알지 못했으니, 고구려 역사 유적이 요나라 이후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이제 고구려 역사는 처음부터 다시 씌어져야 한다. 졸본성으로부터 서북 380리에 비류수가 있었고, 홀본성과 국내성이 그 비류수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태종의 역사 왜곡부터 시원이 된 중국의 떼거지식 동북공정에 맞서서 우리는 21세기 방법으로 고구려 본색을 올바로 찾아내어 그 역사 정신을 후세에 똑똑히 가르치고 만대에 전해야 한다.
위성으로 본 고구려사
글쓴이/구자일
▲ 평양성전경 남측관점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패수에 있고 물과 산을 따라 굴곡하여 동서 길이가 6리라고 기록되었다.
<주서(周書)> 都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요사지리지>에 북위국의 사자가 장수왕을 만나러 온 곳은 바로 요양시라고 기록하였다.
▲ 고구려 평양성 위치
ⓒ 구자일
기록과 같은 성터가 요양시 동쪽 궁장령구 안평진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구련동(九連洞)이라고도 하는데 평양성에 천도한 장수왕의 이름이 바로 고련(高漣)이다. 평양성의 서북쪽에 평주토성(平州土城)이 남아있고, 거기서 북쪽으로 태자하를 건너면 잘 알려진 연주산성인데 평양성의 외곽 방어성이 된다.
평양성 북쪽 구릉은 팔도구라고 하는데 광개토대왕이 세운 평양 사찰과 관련되어 수나라 장수 래호아의 수군이 들어와 약탈한 나곽일 것으로 추정된다.
▲ 요양시 평양성 주변도
위성사진으로 평양성으로 추측되는 성벽을 측정할 때, 동서가 정확히 3km로 기록과 일치한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북성의 서벽만도 5km에 달한다.
▲ 평양성 북쪽에서 관측할 때
ⓒ 구자일
또한 동북쪽에도 거대한 성터가 보여지는데 이는 평양성의 외성으로서 장안성일 수도 있다. <주서>에서 고구려왕은 평양성의 측에 산다고 하였는데 그 측성일 수 있다.
<주서> 王別爲宅於其側
▲ 평양외성(장안성)
고구려 문자왕비문 발견
▲ 문자왕비문
고구려 역사 자료가 한 점이 아쉬운 차에 고구려 문자왕의 묘비로 보이는 비문이 입수되었다.
높이 20cm 정도로 홍토 흙을 구워만든 사각기둥에다가 한면에 3행씩의 약 105개의 글자가 새겨져있고 그중 90% 이상의 자구가 해독이 가능하다.
전문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1면
古鄒大加 助多時 在丙申年
□□□□□□造立碑 玄
□□□□□□者文曰
2면
天動 王恩排僞 使持節
都督 遼海諸軍事 征
東大將軍 領護東夷
3면
中郞將 遼東郡 開國公
與羅人 戰於浿水 陷保犬
牙城 (興邦)宜豊役 (功)恩
4면
國民永恩 奴客不忘
生世授國 安生善战
碑銘於墓前
(□는 깨져나간 부분,()는 불명확한 글)
위의 명문을 초석하면
“고추대가 조다(장수왕의 아들이자 문자왕의 아버지)가 병신년(456)에
(낳은 문자왕을 위해) 비를 세웠다. 비문에 말하기를
하늘이 움직여 왕은 사지절도독 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 개국공(고구려왕)에 책봉되었다.
신라인과 패수에서 싸워 견아성을 함락하여 보전하고, 국민을 위해 의풍성을 세웠다. 국민은 영원한 은혜를 입었으니 국민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세상에 나오셔서 나라를 이어받아 안정하고 전쟁을 잘 하였으니 능묘 앞에 비를 세워 글을 새긴다.“
위에 보여진 비석은 능묘 앞에 세우기에는 너무 작아서 능묘 앞에 세운 비석을 본따 만들어서 능묘 안에 부장한 것으로 고려된다.
위 비문은 출토지가 집안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문자왕의 수도는 대동강이 아니라 장수왕 이래로 요양시 평양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또한 비문 중의 의풍역의 문구가 다시 요양시 평양성을 지지한다.
의풍(宜豊)이란 나라의 국가 창고 성을 의미하는 고어이며, 의풍역(宜豊役)은 의풍성을 짓는 대역사를 문자왕이 일으켜 완공했다는 것이다. <주서(周書)>에서 평양성은 전쟁물자 등의 비축 창고 역할이 있었다. <周書> 城內唯積倉儲器備
에서 평양성의 북성과 남성 사이에 상당히 큰 성벽이 존재하는데, 이는 장수왕 때인 427년에 요양시 평양성과 남벽이 세워졌고, 70년 지난 후에 문자왕에 의해서 그 남벽의 남쪽에 의풍성이 세워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남성의 위치를 요나라 때에는 연주(衍州) 의풍현이라고 불렸으며 현재는 요양시 궁장령구 안평진이다. 궁장령이란 궁장령(宮墻嶺)으로 해석하면 궁벽이 있는 고개마루다.
위 비문으로 둘째 동해안의 견아성과 살수, 패수 등이 확정된다.
▲ 함경남도 원산 북쪽의 견아성과 패수, 살수
ⓒ 구자일
[삼국사기]에서는 494년 신라와 살수 견아성 전쟁에서 고구려가 공략에 실패하고, 이어진 496년 니하 우산성(牛山城) 공격도 실패했지만 497년에 비로소 우산성 공격이 성공했는데 이때 살수, 혹은 패수의 견아성이 고구려에 함락되어 보전된 것을 알 수 있다.
견아성은 원산 북쪽 진술성(鎭戌城; 술戌은 개를 의미)으로 고려되고, 패수는 비류수라고도 하던 금야강으로 고려되는데 평주(平州) 성에서 내려온다. 평주- 패수- 니하는 서로 연관되는 말이며 동해안에 있던 고대 진한(辰韓) 12국의 존재와 관련된다.
살수는 전탄강(箭灘江, 전箭은 화살의 살을 의미)과 만나는 덕지강으로 고려되는데 덕지는 당시 고구려와 싸운 신라 장수 이름이다.
또한 패수 금야강과 살수 덕지강이 하류에서 서로 이웃하므로 [삼국사기]에서 살수 견아성이 문자왕비문에서처럼 패수 견아성이 될 수 있고, 패수는 [삼국사기]에서 니하라고도 하였는데, 이 금야강이 훗날 신라와 발해의 동쪽 경계 니하에 해당되기도 하는 것이다.
고구려 양원왕 때의 연호가 새겨진 금동판이 신포시에서 발견되었던 바가 있지만, 이후 다시 신라의 영역이 되어 황초령과 마운령 등에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다.
고구려 환도성
고구려 수도성은 너무나 거대한 인공 축산대성이었다. 암산의 사이를 흙으로 메꾸어 높은 고지대 평원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그 위에 수도성을 지었다. 이러한 축성법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먼저 환도성을 찾아본다. ‘위성으로 찾는 고구려 강역시리즈 1’에서 고구려고국이었던 졸본성(즉 창도현의 천두진의 두 산성)을 밝힌 바가 있는데, 뒤에 발해 신주였고, <요사지리지>는 이로부터 서남 200리에 고구려 환도성이 있다고 하였다.
▲ 고구려도성위치
이를 위성사진으로 찾아보니 법고시 서북쪽 교외인 자은사 뒤편으로서 현재 지명이 한대산(韓大山)이었다. 즉 환도산이다.
▲ 환도성과 구도성(동천왕성)위치도
이곳의 성은 상상 외로 거대하였다.
▲ 환도성 전경
동성과 서성, 북성으로 구별된다. 동성은 평지로부터 암산에 기대어 3단의 토성으로 되어 있다. 먼저 평면적으로 외성과 중성 내성의 3단을 그렸다. 하부 기단은 동남벽은 5km, 동북벽은 4km였다.
▲ 동성 동남방관측도
▲ 동성설명도
이를 동남방에서 먼저 바라보았다. 자은사 뒤로 1단의 성토대가 보인다. 1단의 성토대 위에 다시 2단의 성토대가 있다. 그 2단의 성토대 위에 조정백관이 살던 궁궐터가 보인다. 이를 동북방 관점에서 보면 높은 토대의 비탈이 뚜렷하다.
▲ 동북방관측도
동성 중앙에 인공 수로도 보이는데 비탈면의 수로는 산비탈이 1700년간 무너지지 않게 설계한 것이다. 오른쪽은 북성, 즉 외라성인데 능원이 보인다. 동성의 정문은 동남쪽 끝이다. 옆에 서성의 정문이 이웃하고 있다. 서성 오른쪽 골에 청나라 공주묘가 만들어졌다.
▲ 서남방관측도
서남방에서 서성을 중심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은 동성과 별개로 3단 토성이다. 꼭대기에 '바후산성'으로 잘 알려진 3000m 규모의 석축 산성이 남아있다. 이는 246년 관구검, 342년 모용황에게 유린당해서 패호(敗胡) 산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서성은 산상왕이 지어서 태자성이 되고, 동성은 고국원왕이 세워 왕궁이 된 것이다.
▲ 서북방관측도
환도성을 서북방에서 바라보았다. 북성이 관찰된다. 1단에는 병마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2단에는 병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3단은 전쟁 지휘소가 된다. 고국원왕이 모용황 침입 전에 지었을 것이다. 반면에 동성은 모용황 침입 후에 지었다.
비록 성벽은 무너지고 토대도 군데군데 함몰되었겠지만 바깥에 토대가 잘 남아있는 것은 토대부터 판축법(흙을 한층 쌓고 땅을 다지고 다시 흙을 한층 쌓고 다지는 방식)으로 쌓았을 것이라는 추정된다.
그래서 성벽을 돌로 쌓은 석성, 성벽을 흙으로 쌓은 토산성에 대비되어 산골을 흙으로 메꾼 축산대성이라는 이름이 가당하다. 암산의 골이 많이 패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돌과 흙을 파다가 평평한 토대를 만드는데 가져다 썼기 때문으로 보이고 그 골 자체가 방어 요새가 되며 더러는 1500년 동안 함몰된 것도 된다.
저 거대한 고구려 환도성은 세계 1등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참고로 법고시는 뛰어난 청동기 문명이 만주 최초로 있던 곳으로서 단군 시대 초기 청동검이 많이 나온 곳이고, 위만이 점령했던 곳이며, 한사군 설치 시에 낙랑군이었다. 고구려에 의해 거대수도로 개발되고, 발해가 압록부로서 지켰으나, 이후 요나라는 발해인을 다 내쫓고 거란인들의 목장을 두었고, 금, 원 시대에는 지명조차도 거의 없었으며, 명나라 때는 아예 국경 밖 변외였다.
청나라 이후 법고왕이라는 지방왕이 있었는데 개발도 없었고 이름 모를 한국의 두메산골과 같은 처지다. 즉 고구려 이후 현재까지 저 거대한 인공 축산 공정을 일으켰을 시기나 기록 등등이 저 고장에는 역사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첫댓글 아이들에게 꼭 도움이 되는 글로 생각되네요... 충주전통문화회 까페지기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우와~~~~ 잘봤어요. 고구려 역사를 새로 써야 겠군요 ㅎㅎ 너무 멋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