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 화백의 생가 자리인 충남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에는 초가지붕을 얹은 집과 노출콘크리트로 된 건물이 있다. 이 두 공간을 일컬어 ‘이응노의 집’이라 한다. 이응노의 생가를 재현한 초가와 그의 예술을 기념하는 건물 모두 땅의 굴곡을 닮았다. 자연에 순응하며 땅에 밀착된 채로 내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건축이 풍경이 되는 순간, 한 인간과 그의 예술이 오롯하게 드러난다. 글과 사진 최예선(예술칼럼니스트·작가)
풍경이 되는 건축, 예술이 되는 공간
어떤 건물은 도무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징 없는 재료로 외피를 감싼 채 땅에 가깝게 몸을 숙이고 있다. 바깥에 내부의 풍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도 모든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건물이 비밀스러운 미로라도 품고 있는 듯하다.
이응노의 집 공간 중 하나인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 그랬다. 콘크리트의 긴 뼈대를 중심으로 네 개의 네모난 박스가 붙어 있는 이 건물은 땅의 굴곡에 따라 몸을 낮추고 무심하게 존재한다.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언덕길을 한참 지나서 건물의 옆으로 돌아가야 보인다. 보통 건물에는 건물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는 정면, 즉 ‘파사드’가 있기 마련이고 출입구는 대부분 파사드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이 건축물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건축적 특색을 지우고자 애쓴 것만 같다.
건물은 소나무 숲에서 자연의 한 부분처럼 서서히 솟아나고 밀려 나와 맞은편 용봉산을 향해 서 있다. 노출콘크리트 외벽에 황토를 두껍게 바른 건 이 건물이 땅의 흐름을 연결했음을 부각하려는 의도다. 더 높이 지을 수 있었으나 단층으로 한 것도 주변 산등성이에 폭 가라앉은 건물이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런 공간에 바쁘고 빠른 움직임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느리고 느슨하게 움직이며 건물 주변에 서거나 앉아 있었다. 그것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건물 앞에 서 있는 키 큰 활엽수 한 그루가 고요한 건물에 생동감을 준다. 건물은 주인공이 아니라 좋은 배경이다. 연잎이 펼쳐진 연못에서도, 너른 잔디밭이 있는 억새 정원에서도, 자연이 그 계절감을 빛내고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만 보일 뿐 건물은 없는 듯 존재하는 배경이었다. 한 예술가의 예술혼을 담은 전시관이자 격동적인 현대사를 겪어온 예술가를 위무하는 기념관이 되려면, 어쩌면 이처럼 비우고 덜어낸 모습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건물이 지향하는 겸허한 태도가 이곳을 한층 고즈넉하게 만든다.
[돌아오지 못한 고향에 세워진 집]
고암 이응노 화백은 1904년 이곳 중계리에서 태어났다. 시절도 어렵고 형편이 좋지 않아 학교 공부를 이어갈 수 없었던 그는 열아홉 살에 그림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서울행을 택했다.
당시 미술계의 최고봉이었던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화를 배우고 서화가로 나섰지만, 고암은 서양 화풍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동서양의 화풍을 두루 섭렵하며 현대미술가로 거듭났다.
1950년대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펼치던 그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에 연루돼 투옥된다. 이 사건은 고암의 인생을 그 전과 다르게 만들었다. 감옥에서도 그 예술혼은 식지 않았고 문자 추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민중의 뜨거운 열기를 표출하기에 이른다. 특히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계기로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그린 <군상> 연작은 그의 역작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꺼지지 않는 예술가의 창작열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시대를 봉합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응노를 기념하는 공간은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먼저 예술의 노정을 보여주는 대전 이응노미술관과 동백림 사건 이후 몸이 상한 고암이 머물던 충남 예산 수덕여관이 있다. 여관 앞마당에 자리한 너른 바위엔 이응노가 새긴 추상화된 문자들이 가득하며, 수덕여관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된 작품들이 그 옆에 세워진 선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그리고 홍성 생가 자리에 세운 초가와 기념관인 이응노의 집은 귀향하지 못하고 파리에서 영면에 든 예술가의 영혼이 쉬는 곳이자 시대를 통과하며 한국적인 미와 정신을 그림 속에 표현했던 예술가를 기념하는 곳이다. 끝끝내 돌아오지 못한 고향에 세워진 집인 셈이다.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조성룡 건축가는 마을 사람들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자리한 기념관인 만큼, 이곳이 농촌의 일상 풍경과 어우러지기를 바랐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낮은 콘크리트 건물과 초가를 세우고 완만하고 둥근 길을 만들었다. 기념관 앞에는 목재로 만든 북카페가, 대숲 길 뒤쪽으로는 자료실이 자리한다. 초가는 화가의 옛 그림에 담긴 고향 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실제 그 집은 복작복작한 살림집이었지만 되살린 초가는 넓은 누마루가 있어 마을 이웃이나 관람객이 쉬어 가는 자리가 됐다. 건축물뿐 아니라 넓은 마당과 길, 숲을 포함한 풍경 전체가 기념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숲도, 건물도, 사람도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화처럼 보였다.
[일상의 편안함이 담긴 예술 풍경]
기념관 내부는 중앙의 긴 가림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동선으로 5개의 전시실을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바깥으로 돌출된 콘크리트 박스는 전시실이다. 이응노 화백의 유품과 유족들이 기증한 작품들이 걸린 전시실도 있고, 고암에게 헌정한다른 예술가의 작품도 걸린다. 콘크리트 박스는 길쭉한 중심 공간에 박혀 있는데, 긴 통창을 통해 바깥의 빛이 잘 새어 든다. 빛은 회색 콘크리트 벽을 따라 흐르며 내부를 은근하게 밝힌다. 콘크리트 공간조차도 바깥의 자연을 담는다. 나무 판을 덧대어 시공했기에 나뭇결이 살아 있다.
땅의 굴곡은 기념관 내부에도 이어진다. 실내는 층을 구분하기보다는 완만하게 경사를 둬 뒤로 갈수록 차츰차츰 높아진다. 조금씩 시야가 높아지면서 전시실에도 자연스러운 서사가 생긴다. 앞쪽 전시실에서 이응노의 삶을 이해한 후, 홀에 전시된 영상을 통해 이응노의 작업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번에 방문했을 땐 그다음 전시실부터 고암에게 헌정한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있었고, 마지막 전시실에선 동네 아이들의 작품 세계가 펼쳐졌다.
바깥마당에서는 어린이 그림 대회가 열려 여러 가족이 모여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기념 공간은 이렇듯 마을의 커뮤니티 시설이자 지역의 어린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다. 유아차를 끌고 온 방문객들은 초가의 누마루에 오랫동안 머물며 담소를 나눴다.
그 모든 풍경은 화려하지도 떠들썩하지도 않았으며 일상의 공간처럼 자연스럽고 느긋했다. 예술의 풍경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축 역시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우리의 일상이 다채로운 풍경화로 남을 수 있는 배경이 돼준다면 충분할 것이다.
이응노의 집 앞에 서서 멀리 용봉산과 월산을 응시해본다. 고암이 유년 시절 자신에게 많은 이야길 들려줬다고 고백했던 그 산들, 그 안의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상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던 바로 그 산들이 의연하게 서 있었다.
<전원생활 2022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