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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라남도 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덕산방
오준선과 한말의병
전남대 노기욱
Ⅰ. 머리말
Ⅱ. 가계와 학문
Ⅲ. 오준선의 의병관
Ⅳ. 의병들의 오준선 인식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의병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맞아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이다.1) 의병항쟁은 1904년 일제 침략이 본격화된 이후 일제를 상대로 한 민족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정미7조약·군대해산 등의 사건으로 의병전쟁이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한국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일제는 의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고, 일제의 군경 및 일제의 앞잡이들이 의병에게 죽거나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을 전후하여 군대를 동원한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악랄하게 실시하였다. 항일의병이 전사하거나 체포되고, 남은 의병들은 장기 지속적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근거지 이동 혹은 세력연합 등의 새로운 항전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2)
남한대토벌작전중 일제와 맞서 싸운 호남의병의 치열한 전투지역이 지금의 광주광역시 (光州廣域市) 광산구(光山區) 일원으로 넓은 평야에 풍부한 물산과 서당․서원에서 배출한 문도들이 많은 고장이다.3) 문생들은 주저함이 없이 의병으로 구국활동에 나가고 지리적으로 익숙한 산, 강학의 장소를 이용해가며 일제와 싸우게 되었다. 사재(私財)를 투자하여 무기를 구입하거나 무기 공장을 만들어4) 장기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용진산(聳珍山), 석문산(石門山), 대명산(大明山), 어등산(魚登山)은 의병전적지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면(三道面), 본량면(本良面), 임곡면(林谷面)에 속한 곳이다. 용진산에서 81세의 일기로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친 오준선(後石 吳駿善)은 한말 의병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통로이다. 오준선은 의병의 스승으로 정신적 지도자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오준선의 문집《후석유고(後石遺稿)》를 보면〈의병전〉에 4명의 의병장이 언급되어있는데, 일제강점기에 금서 처분을 받을 만큼, 의병사의 생생한 기록을 담고 있다.5)
오준선은 634명이나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그중에 이기손(錦齋 李起巽, 1877~1937), 오상렬(義齋 吳相烈, 1879~1907), 오성술(竹坡 吳成述,1884~1910), 전수용(海山 全垂鏞,1878~1910)은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다.6)
오준선에 대해 금장태(琴章泰)와 고광식(高光植)은오준선은 절의와 예도를 지키며 의리정신으로 살았다고 언급하였다.7) 홍순권은 심남일(沈南一)의 의병 상황을 설명하면서 오준선의 글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또, 오준선의 <기삼연(奇參洐)전>을 언급하면서을미의병의 해산 이후 기삼연이 적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전주로 잡혀 간 일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광주 양암정(羊岩亭)에서 포군 정원집(鄭元執, 1887∼1909)8)을 데리고 왔다라고 하면서 오준선이 쓴 <전해산전>을 언급하였다.9) 김상기는노사학파(蘆沙學派)에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과 의병투쟁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라고 오준선을 평가하였다.10) 한편 위정척사운동이 의병운동과 근대 민족주의 원동력이라고 오영섭은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선비정신을 조명하였다.11) 호남 의병을 연구한 홍영기는 오준선을노사학파 중 노사의 학설에 깊이 신뢰하고 따른 문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12)고 하였다.
그동안 오준선에 대해서는 절의와 예도를 지키면서 기정진의 학설을 따른 문인으로 의병전의 찬술자로 거론되었을 뿐, 그다지 크게 조명받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오준선과 한말의병의 관계를 추적하고자 한다. 오준선의 문집《후석유고(後石遺稿)》13)을 기초 자료로, 오준선의 스승인 기정진(蘆沙奇正鎭, 1798~1879)의《노사집(蘆沙集)》14), 동문수학생 기우만(松沙奇宇萬, 1846~1916)의《송사집(松沙集)》15)을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본고에서는 노사학파 중에서 위정척사운동의 구체적 실현에 나선 주도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오준선의 의병관은 어떠했고 의병들은 오준선에 대해서 어떠한 인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가계와 학문
고려 혜종(惠宗, 914~945)의 모친 장화왕후(莊和王后, 생몰년 미상)는 나주오씨(羅州吳氏)의 역사인물이다. 오씨족보(吳氏族譜)는 오희도(吳希道, 1583~1624)가 필사하여 전하게 되었다.16) 나주오씨는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 생몰년 미상)을 1세로 하고, 5세손 오자치(吳自治 생몰년 미상)는 세조13년(1467)에게 영정을 하사받고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17) 오준선의 8대조로 병조좌랑을 지낸 오이익(吳以翼, 1618∼1666)은 오희도(吳希道)의 아들이다.18)
오준선은 조선 철종 2년(1851년) 음력 12월 6일 오하규(吳夏圭, 1829∼1872)와 금성나씨(錦城羅氏, 생몰년 미상)의 3남 중 장남으로 당시 나주군(羅州郡) 삼도면(三道面) 도덕리(道德里)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면(三道面) 도덕리(道德里) 도림마을(道林)에서 태어났다.19) 유년기에 백부 금사 오항규(錦沙 吳恒圭, 1824∼1874)와 백모 순천박씨(順天朴氏, 생몰년 미상)에게 입후하였다.20) 자는 덕행(德行)이며 호는 후석(後石)이다. 오준선은 평소 형제간의 깊은 우애가 깊었는데, 동생인 오영선(吳泳善, 1854∼1872)과 오유선(吳裕善, 1857∼1886)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영선의 양아들 오동수(吳東洙, 1878∼1945)와 유선의 아들 오남수(吳南洙, 1884∼1933)를 친자식처럼 기르고 가르쳤다.21)
오준선이 태어나고 살았던 삼도면 도덕리 도림에는 오준선의 생가와 초기 수학했던 지어제(志於齊), 사당인 도림사(道林祠)가 남아 있다. 또 본량면(本良面)에는 오준선이 중년에 강학했던 동호리(東湖里) 석문산(石門山) 빙설당(氷雪堂), 명도리(明道里)의 대명산 영사제(永思齊)가 있다.22) 만년의 강학장소인 용진정사(聳珍精舍)는 삼도면 왕동리(三道面 旺洞里) 용진산에 있다.23)
용진정사는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 1853∼1937)의 편액 글씨가 있고, 영당에는 오준선의 영정이 있다. 오준선의 영정은 1924년 당시 77세인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48~1941)이 74세였던 오준선의 모습을 상복을 입고, 고종황제를 위해 거상을 하는 초상화로 용진정사도와 함께 그렸다.24)
오준선은 유년기에 족숙 오태규(臨履公 吳泰圭, 1843~?)에게 수학하였다.25) 당시 오준선보다 8세 연장이며 오태규의 손자인 오계수(難窩 吳繼洙, 1843~1915)와 동문수학하였다.26) 1868년 오준선이 18세 되던 해에 당시 71세의 기정진을 찾아가 예법과 경전 등을 탐구하게 되었으며 기정진의 기대를 받았다.27) 이때 기우만, 고광순과 동문수학하였다.
오준선은 24세(1868년)에 학문의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은 임헌희(全齋 任憲晦, 1811~1876)와 송근수(立齋 宋近洙, 1818~1903)를 찾아 배알(拜謁)하였다. 임헌희는노력하여 사람의 마음에 하늘의 기를 얻는 것(明德)을 숭상하라, 이것이 나의 바램이다는 글을 적어 주었다.28) 임헌희는 낙론(洛論) 계열로 이이(李珥, 1536~1584)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통을 계승한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석학이었다.29)
오준선이 충청도로 찾아가 배알한 송근수는 을미의병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을 후원한 인물이다.30) 오준선은 50세 때인 1900년과 그 이듬해에 연이어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 송병순(心石 宋秉珣, 1839∼l912)을 찾아 선대의 행장이나 문집(文集) 서문(序文)을 청하기도 하고 강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31) 사림 영수들을 방문하는 것은 오준선의 활동 무대가 호남에 머무르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오준선은의(義)를 통한 마음(心田)을 쟁기와 보습으로 갈듯하면 인간 본성을 실현한다고 농은설(農隱設)32)에서 선비의 자세와 의를 강조하였다. 또, 보만설(保晩設)33)에서 식민지 현실을 혼돈으로 보고공직자는 혼돈속에서 잣나무 모습이나 소나무의 푸르름과 같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위정척사를 위하여서양의 물질문명이나 유행음악 등을 멀리하자고 광산설(狂山說)34)을 제시하며 전통 도덕과 이념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바른 선비자세와 공직자의 도덕적 가치 의로운 전통이념으로 오준선은 생각하고 학문적인설로 주장한 것이다. 이상적인 학문의 법도는학자가 자기 몸을 반성하고(修身) 생각하는데 행(行)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야한다는 이이의 말을 사법(師法)으로 삼고자 하였다.35) 오준선은마음의 본성과 근본은 조화와 본원이 이(理)에 있기 때문에, 태극은 이(理)에 중점을 두어 음양을 생성한다36)라고 하였다. 본성은 마음의 이치고, 마음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본성이다는 것이다. 오준선은 마음은 기(氣)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理)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주장 한 것이다.
기정진은〈납량사의(納凉私議)〉를 완성한 후 중인(衆人)의 눈에는 모두 기(氣)이고 성인의 눈에는 이(理)라고 말하였다37) 기정진은 기(氣)를 비판하고 이(理)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기정진의 학설은 기호 학맥의 원류인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였다하여 송병선과 전우(田愚, 1841~1922)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8) 이때, 오준선은기정진이 이이에게 심복하면서도 다만 이기설에서는 이견을 보였는데, 그것은 이이를 비판한 것이 아니고, 후현이 선현의 이론을 변론(辯論)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39)
오준선은 기정진이〈외필 (猥筆)〉에서이(理)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氣)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理)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오준선은무조건 스승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40)고 하였다. 기호학파 중 이일원론을 전개한 스승 기정진의 주리론적 입장을 따른 오준선은, 기정진의 설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은 명령을 내리는 자가 주인이고, 주인은 바로 이(理)요, 명령을 받은 자는 종이니 종은 바로 기(氣)다는 것이다. 오준선은 이이의 이기론적 입장에는 비판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Ⅲ. 오준선의 의병관
오준선은 고종이 승하하자, 문도들과 서울까지 올라가 인산에 곡하고고종 승하의 변란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41)하며 오준선은 임종 때까지 백립을 쓰고 원수를 갚는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았었다.42) 오준선의 부인은 의병의 가문으로 이름을 빛낸 상산김씨(商山金氏)였는데, 기정진 문하에서 오준선과 동문수학하였던43) 의병장 김용구(金容球, ?∼1918)의 가문이다44)
오준선은 1896년 봄 장성에서 기우만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생모 나주나씨의 거상중이어서 의병에 참여하지 못하였다.45)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신 토죄와 늑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구순양모를 봉양해야 하는 오준선은 의병에 참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 할 모의(募義)를 기우만, 고광순과 함께 논의하였다.46) 오준선은 원수 갚는 의리가 가슴 속에 절실하여 한시도 복수 할 것을 잊은 적이 없다47)고 하며 복수하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1906년 오준선이 담양군(潭陽郡) 삼인산(三人山) 아래서 오준선이 고광순과 기우만에게구순의 노모가 계시는데 봉양 할 다른 형제가 없으니 떠나기가 어렵네48) 라며 노모와 친척을 봉양하는 어려운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기우만·고광순에게 사정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오준선은의병 참여를 기다려 주라49) 고 하며 후일 의병 참여를 약속하였다.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 여름철이 되면서 오준선은 양모가 세상을 떠나자 혼자서 거상을 치러야 했다.50) 오준선은 망국의 현실을 통곡하며오백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금수의 오랑캐 나라가 되었구나51)하며,망국에서 살아남은 자 몸을 던져 죽을 수 없다면, 뜻에 따르는 충의가 있어야 한다52)면서 입산하였다.53) 처음 석문산에 은거했으나 용진산으로 문도들이 거처를 축성하여 용진산으로 옮겼다. 용진산으로 들어간 오준선은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들의 행적을 수집하여〈의병전〉을 지었는데.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오준선의 의병관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는〈의병장 기삼연 (省齋 奇參衍)전〉,〈의병장 고녹천광순(高鹿川光洵)전〉,〈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海山 全垂鏞)합전〉찬술(撰述)하였다. 그리고 〈의병장 심남일(德弘 沈南一)행장〉54) 〈의병장 고광순(鹿川 高光洵)행장〉55)등 5명의 의병장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의병장 기삼연전〉을 보면매양 김준·김영업(痴齋 金英業, 1869~1909)·전수용이 찾아와서 만날 적마다, 기삼연의 순국에 눈물을 흘리며 원수를 갚자56)고 하였다. 김준·김영엽·전수용이 오준선을 찾아와 의병장 기삼연의 순국에 관한 일제 응징전략을 논의한 것으로 보아, 오준선이 의병에 관하여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의병장 고녹천광순 (高鹿川光洵)전〉에서 고광순이 적을 토벌하여 원수 갚기로 맹세하고, 충의가 분발하는 모습을 보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날짜를 약속하였다57)고 하며 오준선은 고광순 충의에 의병참여에 따르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고광순이 연곡사 전투에서 일제와 싸우고 원수 갚기로 목숨을 바친 것을아름다운 대의라하며 충․효․열과 군신․부자 관계를 실천한 것으로 보았다.58)
오준선은〈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합전〉에서김준은 1908년(무신년) 정월 초하룻날 담양 남면(南面) 무동(茂洞)에서, 적장 요시다(吉田勝三郞) 쏘아 승리를 거두었다59)라고 하면서 김준의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全垂鏞)합전〉에서 의사 전수용은천안 사람인데 을사년에 의병장 오성술(吳聖述, 1884~1910)과 서로 힘을 합하여 광주 도림마을에 와서 머물렀다60)면서 의병투쟁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오준선은 의병들의 의(義)가 해와 별과 같이 밝아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동방에 의병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면서 이석용(李錫庸, 1878∼1914)·김영엽(痴齋 金永燁,1869~1909)·심남일 등 10여 인이 또한, 의가 있으니 빠뜨릴 수 없다고 하였다.61) 오준선의 행장에서 고광선의 말처럼도를 안고 산으로 들어가(抱道自靖) 법도를 지키는 뜻에 따른 것이다. 오준선은 옛 법도를 지키는 길(去之守舊)을 선택한 것이다. 오준선은뒷날에 충성을 사모하고 의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거든 의병들을 표창하여 드러내길 바란다고 하였다.62)
기정진은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지극한 선의 발현과 그 실현이 더욱 요청된다고 하였는데 기정진의 노사학파의 사상은 세 가지 방향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첫째로 위정척사 운동을 통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통성 회복, 둘째로 이른바 도학의 진흥, 즉 성리학 이론의 탐구와 발전, 셋째로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의병활동의 전개 등 이들의 가치는 서로 별개가 아니며, 의병항쟁은 위정척사 운동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조선왕조의 근왕운동(勤王運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63)
오준선의 의병관은 국치를 씻기 위한 의병들의 의(義)가 해와 별과 같이 밝아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동방에 의병이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장한 것이며, 군자라면 좋아하는 의로움이 의병항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64) 오준선의〈의병전〉에서 기삼연, 고광순의 의병 활동을 군왕을 위한 근왕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65) 무장투쟁에 참여하지 못한 오준선은〈의병전〉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다.
〈의사 김준(竹峰 金準: 金泰元), 전수용합전〉에서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대항한 의병들이 살육 당하거나 체포됨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무장투쟁으로 요시다를 사살한 전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제의 화력과 군대 대적하기 위해 의병들의 총기 노획한 점을 강조하면서 화력보강을 강조하고 있다. 의병전쟁 중 고광선·기삼연·김준·전수용·심남일·이석용·김영엽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민중의 전통적인 반침략 항쟁의 민족정신과 을 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Ⅳ. 의병들의 오준선 인식
오준선은 일제에 대한 강한 배일의식과 충․효․의리관을 강조하며 문하생을 가르치며 문하에서 걸출한 의병장들을 배출하였다. 이기손·오상렬·오성술·전수용은 오준선의 문생들이였다66) 오상렬은 삼도면(三道面) 명도리(明道里) 영사제(永思齊)에서 무기공장을 만들어 일제와 투쟁하면서,67)죽을 곳에 마땅히 죽으니 한스러움이 없다68)하면서 무장투쟁에 나갔다. 당시 의병들은의롭게 죽는다면 죽음도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69)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이 오준선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준선과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한 김열은 (金烈, 1857~1936)은 장성군(長城郡) 삼서면(森西面) 석마리(石馬里) 운곡초당(雲谷草堂)후학을 가르치고, 1894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70) 김열은 문생록에서 오준선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각금(却金)을 물리치고 평생토록 옥빛 같은 정직한 마음, 이제 어느 곳을 우러러볼까71)라고 하며 오준선의 평소 모습을 정직한 모습에 일본의 은사금을 거부하는 각금의 모습을 높이 흠모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 비슷한 시대를 산 의병장 김열의 인식은 산과 하늘같은 평생 충과 의를 가르친 극진함을 머금은 옥빛으로 인식하였다.
고광순은 거의(擧義)하면서오준선이 충의가 분발 하였다72)하며, 오준선의 의기를 안다라고 하였다.73) 고광순은 오준선과 동문수학하였기에 누구 보다 더 오준선을 잘 알고 있었다. 의리정신을 이끌어 가는 오준선을 고광순은 학문이 높고 깊으며, 의리가 밝은 모습을 인정하고 있다.
기우만은 오준선이치밀하여 향중에서 이름이 있다74)고 하며,매월 초하루의 윤강을 행하여 선비들의 학풍을 진작 시켰다75)하며 김천일(健齋 金千鎰 , 1537∼1593)의 문집이 당시까지 간행되지 않은 것을 간행하는 사업을 일으켰다76) 이러한 모습을 보아온 기우만은 향촌 일에 앞장선 오준선이 향리에 이름난 학풍의 소유자라고 하고 있다.
기삼연과 오준선은 간담이 서로 비치어 흰 머리가 되도록 변치 않는 사이다77)라며 정미년 가을에 기삼연이 오준선집으로 찾아가 오일간 떨어지지 못하고 의병 일으키는 일만을 의논하였다78) 의병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오준선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오준선의 학풍과 충의정신은 의병들은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Ⅴ. 맺음말
한국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일제는 의병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제의 군경 및 일제의 앞잡이들이 의병에게 죽거나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09년을 전후하여 군대를 동원한남한대토벌작전을 악랄하게 실시하였다. 용진산, 석문산, 대명산, 어등산은 호남의병의 치열한 전투지역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일원이다.
오준선은 광산구 의병의 스승으로〈의병전〉찬술하고 정신적 지도자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한말 의병을 이해하는데 오준선은 또 하나의 통로인 것이다. 〈의병전〉에 4명의 의병장이 언급되어있는데, 일제강점기에 금서 처분을 받을 만큼, 의병사의 생생한 기록을 담고 있다. 오준선은 634명이나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그중에 이기손, 오상렬, 오성술, 전수용은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다.
오준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으로 초기 수학했던 지어제와, 중년에 강학했던 빙설당과 영사제, 만년의 강학장소인 용진정사가 남아있다. 스승 기정진을 찾아가 오준선은 예법과 경전 등을 탐구하고, 기우만과 고광순과 동문수학하며 교류하였다. 임헌희, 송근수, 최익현, 송병선, 송병순 등 사림의 영수들을 찾아 배알하고, 활동 무대를 기호까지 넓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오준선은 기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라고며무조건 스승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고 하였다.
기우만, 고광순과 함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 할 모의를 논의하였으며, 원수 갚는 의리가 가슴 속에 절실하여 한시도 복수 할 것을 잊은 적이 없다. 용진산으로 들어간 오준선은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들의 행적을 수집하여〈의병전〉을 찬술하였다. 오준선은 의병들의 의가 해와 별과 같이 밝아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동방에 의병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면서, 충성을 사모하고 의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거든 의병들을 표창하여 드러내길 바란다고 하였다.
오준선은 무장투쟁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의병전〉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다.〈의사 김준․전수용합전〉에서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대항한 의병들이 살육과 체포됨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무장투쟁으로 요시다를 사살한 전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제의 화력과 군대 대적하기 위해 의병들의 총기를 노획한 점을 강조하면서 화력보강을 강조하고 있다. 의병전쟁 중 고광선·기삼연·김준·전수용·심남일·이석용·김영엽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민중의 전통적인 반침략 항쟁의 민족정신과 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당시 의병들은 오준선 정직한 마음과 오준선의 의기를 높이 사 향리에서 이름이 있는 정신적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